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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척탄병 쿠아녜의 모험 - 마렝고 전투

by nasica-old 201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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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원래 마렝고 본편이 나와야 하는데, 제가 요즘 집안에 충실하느라 준비가 미진합니다.  완전 휴재로 가기는 좀 그렇고, 마렝고 전투의 맛배기로, 자료 수집하다가 알게된, 마렝고 전투에 직접 참전했던 쿠아녜(Jean-Roch Coignet)라는 이름의 어떤 척탄병의 수기 일부를 번역해서 올립니다.  원본은 http://www.napoleonic-literature.com/Book_13/Notebook_3.htm 에 있으니 직접 보셔도 됩니다.  재미없거나 본 내용과 상관없는 내용은 과감히 생략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전체적인 전투의 흐름은 보이지 않지만, 당시 병사들의 군기는 어땠는지, 머스켓 소총을 이용한 전투의 실제 어려움은 어땠으며 보급은 어떤 양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입니다.





참고로 이 쿠아녜라는 척탄병은 파란만장한 경력의 소유자로, 나중에 나폴레옹의 근위대에 들어가서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고 틸지트 조약에서 나폴레옹과 러시아 짜르의 회담을 직접 지켜보기도 합니다.  총 16번의 원정에 참여하여 참전한 전투만 48회였다고 합니다.  러시아 원정 때도 당연히 함께 했고, 이 원정 끝무렵 대위로 승진했지요.  백일천하에서는 역시 나폴레옹의 깃발 아래로 모였습니다.  나중에 고향인 옥세르(Auxerre)에서 담배 가게를 하던 이 양반은 무려 1865년, 즉 89세까지 살았는데 (아마 손님들에게만 팔고 자신은 담배를 안 피웠던 듯...) 1853년에야 최초로 이 회고록을 썼다고 합니다.  다만 아래 글에서도 나왔듯이, 이 양반은 아주 늦은 나이에야 글을 배운 덕에, 회고록 문체가 아주 엉망이어서, 딱 500부만 인쇄하여 자기 담배가게 손님들에게만 팔았던 이 책은 그다지 잘 팔린 편은 아니었답니다.  나중에 1883년 경에 다른 작가가 다듬어서 새로 출판한 이후에야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네요.  (저작권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지요 !  제가 번역해서 팔아볼까요...)




(쿠아녜와 나폴레옹...)



아래 글은 란 장군이 몬테벨로 (Montebello)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오트(Peter Ott) 장군을 격파한 6월 9일 그 다음날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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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는 전투 현장에서 노숙했다.  10일날 아침에 전투 대형을 명하는 북소리가 울렸다.  란 장군과 뮈라 장군이 오스트리아 군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전위대와 함께 출발했지만, 적군을 찾지는 못했다.  그들은 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행군을 해야 했다.  내가 속한 반편 여단 (half-brigrade)은 전날 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군 부상병들을 마저 찾아내 실어 날랐다.  우리는 그들을 구급 마차 있는 곳까지 날랐고, 결국 우리가 전투 현장을 떠날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우리는 교차로를 따라 밤새도록 행군을 했다.  자정 무렵, 우리의 지휘관인 르프뢰(Lepreux) 대령이 정지를 명하고는, 병사들의 대오를 따라 지나가면서 "절대 침묵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  그러고는 그는 첫번째 대대에게 이동 명령을 내렸다.  (...중략...)  우리는 쟁기질을 해놓은 밭에 도착했으나 여전히 소음을 내거나 불을 피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결국 우리는 커다란 흙덩어리 사이에서 배낭을 베게삼고 누워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전진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전진했으나 마을들은 이미 완전히 약탈당하여 텅 비어있었다.  우리는 도랑과 늪지, 큰 시냇물을 지나 관목으로 둘러싸인 마을들에 도착했으나, 식량은 아무데도 없었다.  모든 집들은 버려진 듯 했다.  우리 장교들도 피로와 굶주림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우리는 이 늪지투성이의 장소를 떠나 왼쪽으로 선회하여, 과수원과 정원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서는 밀가루를 약간 찾았고, 빵 조금과 가축 몇마리를 구할 수 있었다.  시기를 딱 잘 맞춘 것이, 우리는 이때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6월 12일, 2개의 반편 대대들이 우리의 우측으로 행군해왔고, 우리 사단이 다시 집결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마을의 이름이 마렝고(Marengo)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이 되자 아침식사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퍼젔다.  얼마나 기뻤던지 !  빵으로 가득찬 마차가 27대나 도착해있었다.  굶주린 병사들에게는 정말 행복 그 자체였다.  모드가 추가 사역을 기꺼이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만큼 실망도 컸다.  빵들은 모두 축축하고 곰팡이투성이였다.  그래도 그것으로 족해야 했다.

6월 13일 아침, 활짝 열린 평원으로 행군해들었고, 오후 2시에 전투대형으로 펼쳐서서 소총을 쌓아놓았다.  참모 장교들이 우리 여단 오른쪽으로부터 도착하더니 곧 모든 방향으로 서둘러 흩어졌다.  전면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24 반편 여단은 따로 떨어져 전진하도록 명령받았는데, 가만 보니 아무 지원도 없이 혼자 전진하는 것이었다.  제24 반편 여단은 멀리까지 행군하다가 결국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결국 거기서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제 24 반편 여단은 4각형의 보병 방진을 짜고 적의 공격에 저항해야 했다.  보나파르트는 이 여단을 그냥 이 끔찍한 상황에 내버려둔 채 포기해 버렸다.  들리는 말로는 보나파르트는 이 여단이 산산조각나도록 일부러 방치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몬테벨로 전투 때, 이 반편 여단은 란 장군으로부터 전진 명령을 받자, 오히려 자기 여단의 장교들을 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위 딱 한명만 살려두었는데, 나로서는 이 끔찍한 복수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제1통령(보나파르트)는 이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척 했다고 한다.  그는 적군을 앞에 둔 상태에서 분노를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살아남은 중위는 대위로 승진했고, 참모진이 즉각 새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결국 보나파르트는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 5~6시 경이 되어서야 우리 여단이 제24여단을 구해내라는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제24여단의) 병사들과 장교들이 우리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어댔다.  우리가 그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그들을 지원하여 함께 행군했었어야 했다는 투였다.  그들은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다.  내 짐작으로는 사상률이 50% 정도 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24여단은 그 다음날 매우 잘 싸웠다.




(알레산드리아 시의 내성은 보방식 요새의 전형으로서, 당시 피에몬테 지역의 주요 요새 중 하나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우리는 무장한 채로 대기했다.  경계 초소는 가능한한 멀리 앞쪽에 설치되었고, 몇몇 분견대가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8월 14일 새벽 3시 경에, 오스트리아군이 우리의 전진 초소 2곳을 습격하여 우리 초병들을 죽였다. 이것이 오전 전투 개시의 신호였다.  오전 4시가 되자 우리 오른쪽에서 사격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대형 소집을 알리는 우리 북소리가 전체 전선에 걸쳐 울려퍼졌고, 참모 장교들이 와서 우리에게 전투 대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무성한 밀밭 너머로 약간 후퇴하도록 명령 받았는데, 이 밀밭은 약간 솟아오른 지형이라서 우리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가려주었다.  거기서 우리는 한동안을 대기했다.  갑자기 적의 저격병들이 버드나무 숲과 늪지로부터 나왔고, 적의 포병대가 불을 뿜었다.  폭발탄 하나가 제1중대 안에서 터져 7명이 전사했고, 샹발락(Chambarlhac) 장군 옆에 있던 행정병 하나가 적의 저격병들이 쏜 탄환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샹발락 장군은 이를 보고는 허겁지겁 말을 달려 전속력으로 사라졌고, 그날 하루동안 장군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키가 작은 장군 하나가 다가와 우리 대령을 찾아내어, 우리 장군(샹발락)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 대답은 "그 양반 가버렸습니다" 라는 것이었는데, 그러자 그 작은 장군은 "알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이 사단의 지휘를 맡겠다"고 했다.  그는 즉시 나 자신이 속한 척탄병 중대의 지휘를 맡아 일렬 횡대로 공격에 나섰다.  우리는 사격을 시작했다.  "재장전하느라 멈추지 말라 !" 라고 장군이 말했다.  "너희들을 다시 소환할 때는 북소리를 울리겠다"  그러고는 그는 급히 자신의 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가 자신의 사단에 도착하자마자 버드나무 숲 너머에서 오스트리아군 대열이 쏟아져 나와 우리 앞에 늘어섰다.  그들은 대대별로 번갈아가며 일제 사격을 시작했고, 우리에게 소총탄을 퍼부어댔다.  우리의 그 키작은 장군이 응사를 해댔고, 덕분에 우리 척탄병 중대는 양쪽의 사격 사이에 갇혀 희생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큰 버드나무 뒤로 달려가 적군에게 사격을 했지만,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총알이 전후좌우로부터 날아왔기 때문에, 나는 결국 머리를 땅에 쳐박고 엎드려야 했다.  머스켓 소총탄이 사방에서 날아와 작은 가지들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내 몸은 그런 버드나무 가지들로 완전히 덮혀 버렸다.  난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우리편 전체 사단이 대대별로 전진을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 어느 일반 머스켓 중대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날 종일 그 중대 소속으로 움직였는데, 어차피 우리 중대의 척탄병 170명 중 고작 14명만 죽거나 부상당하지 않고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처음 위치로 다시 되돌아가야 햇는데, 계속 머스켓 소총 세례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전체 프랑스군의 좌익을 담당하여 알레산드리아로 가는 큰 길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온갖 적의 공격이 다 쏟아져내렸다.  우리 위치는 정말 고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적군은 끊임없이 우리 측면으로 돌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도 그에 대응하여 적이 우리 배후에서 기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했다.

우리 대령은 그의 존재로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전열 좌우로 계속 움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중대원 전체를 상실한 우리 대위는 팔에 부상을 입었는데, 우리의 그 용감한 장군의 행정 장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자욱한 화약 연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대포 사격으로 밀밭에 불이 나서, 병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몇몇 탄약 상자가 폭발했고, 결국 우리는 후퇴하여 재빨리 다시 집결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위치가 취약해졌지만, 이 상황은 모든 것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우리의 용감한 장교들에 의해 회복되었다.

우리 사단의 한 가운데에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창고가 한채 있었고, 거기에 오스트리아 용기병 1개 연대가 매복해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튀어나와 제43 여단의 1개 대대를 포위해버렸고, 대대 전체가 포로로 잡혀 알레산드리아로 끌려갔다.  다행히 켈레르만 장군이 프랑스군 용기병을 이끌고 달려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의 돌격이 오스트리아군 기병대의 공격을 좌절시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수많은 포병대가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우리 대열은 눈에 띄게 얇아지고 있었고, 우리 주변에는 부상병들이 가득했는데 이 부상병들을 후방으로 데려갔던 병사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방어선이 크게 약해졌다.  결국 우리는 후퇴해야 했다.  적군의 대오는 계속 증원되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지원군이 전혀 오지 않았다.  우리 머스켓 총열은 너무 뜨거워져서 재장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뜨거운 총열에 의해 장약이 장탄 도중에 폭발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총열에 소변을 봐서 식힌 후, 총열에 화약을 조금 뿌려 넣은 뒤 불을 붙여 말리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다시 사격이 가능해지자마자 우리는 질서를 유지한 상태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탄약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고 앰뷸런스 마차까지 한대 상실한 상태였다.  그때 800명의 통령 근위대 (Consular Guards)가 아마포 겉옷에 탄약포를 잔뜩 채워넣은 채로 도착했다.  그들은 우리 뒤편을 통과해 지나가면서 탄약포를 나눠 주었고, 이것으로 우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마렝고 전투에서의 통령 근위대의 분전... 그러나 결국 이들은 패배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사격이 다시 치열해졌을 때, 제1통령이 나타났다. 우리는 다시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의 근위대를 우리 군 중앙에 배열하고는 앞으로 전진시켰다.  그들은 즉각 적의 진격을 멈춰 세우고, 4각형 방진을 짠 뒤 전투 대오로 행군해나아갔다.  화려한 차림의 근위 기마 척탄병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적에게 돌격했고, 적군의 기병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아 !  덕분에 우리는 숨을 돌릴 틈을 가질 수 잇었고, 1시간 정도는 우리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근위 기마 척탄병들을 당해낼 수 없었던 적 기병대는, 내가 속한 반편 여단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렸고, 제1 소대를 밀어붙이며 우리에게 칼질을 해댔다.  나도 적의 군도에 목 뒤를 얻어맞았는데, 하도 세게 얻어 맞아 내 땋은 머리(queue  영국군도 하고 있던 이 땋은 머리에 대해서는 영국군은 레드를 입는다  참조)가 거의 잘려나가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내 땋은 머리는 전체 연대에서 가장 두꺼운 것이어서 완전히 잘려나가 내 목까지 베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견장이 코트와 셔츠 일부분과 함께 잘려나갔고, 어깨 피부도 조금 베였다.  나는 이때 충격으로 도랑에 거꾸로 처박혔다. 

프랑스군 기병대 돌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켈레르만 장군은 그의 용기병들을 이끌고 3번 돌격을 감행했다.  그는 그들을 이끌고 돌격해 들어갔다가 다시 이끌고 나왔다.  그 기병대 전체가 도랑에 빠져 반쯤 정신을 잃은 내 몸 위를 뛰어 넘어갔다.  나는 배낭과 탄약 주머니, 그리고 군도까지 도랑에 내버리고, 후퇴하는 용기병의 말꼬리를 잡고 도랑에서 기어나왔다.  이 말꼬리를 잡은 채로 몇걸음 크게 내달리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난 아군에게 구조되었다.  지금 내 나이 72세가 되도록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의 그 땋은 머리가 아니었다면 난 그날 죽었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의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영국군의 탄약통 주머니입니다.  속에 나무로 만든 틀이 있네요.)



나는 잠깐 짬을 내어 머스켓 소총과 탄약 주머니, 그리고 배낭을 주웠다.  (평원은 그런 것들로 뒤덮혀 있었다.)  나는 제2 척탄병 중대에 자리를 찾았는데, 이 중대원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그 중대의 대위가 다가와 나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난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용감한 친구야."  그는 말했다.  "자넨 군도에 한방 크게 얻어맞은 것 같군.  땋은 머리가 잘려나가고 어깨에도 부상이 심한 걸 보니 말이야.  자넨 후방으로 물러가는 것이 좋겠어."  "고맙습니다만 제겐 탄약이 꽤 많이 있으니, 제게 걸려드는 기병놈들에게 복수를 하겠습니다.  걔들이 제게 한방 먹였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뤄야 할 겁니다."

우리는 질서를 유지한 채로 후퇴했다.  하지만 우리 대대들은 눈에 띄게 병력이 줄어 있었고, 장교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언제라도 굴복하고 도망칠 태세였다.  우리는 정오때까지도 대오를 정연하게 유지한채 버텼다.  뒤를 돌아보니 알레산드리아로 가는 대로 옆의 도랑 둑에 제1통령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기 말의 고삐를 잡은 채로, 말 채찍으로 작은 돌조각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마치 바로 옆 도로 위를 휩쓸고 있는 대포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통령 근처에 다가가자, 그는 말에 올라타고는 우리 대오 뒤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용기를 내라, 제군들 !"  그는 외쳤다. "예비대가 오고 있다.  대오를 굳게 하라 !"  그러고는 그는 전체 군의 우익으로 달려나갔다.  병사들은 외쳤다.  "보나파르트 만세 ! Vive Bonaparte ! "  하지만 이미 들판은 전사자와 부상병들로 뒤덮혀 있었고, 우리에겐 그들을 수습할 시간조차 없었다.  우리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 싸여있었다.  후방에서 사선으로 형성된 대대들의 사격으로 적의 진격을 잠시 멈출 수 있었으나, 화약찌꺼기가 잔뜩 끼고 뜨거워진 머스켓 총열에 빌어먹을 탄약포가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다시 총열에 소변을 봐야 했다.  이로 인해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마렝고에서의 나폴레옹과 통령 근위대)



우리 중대의 용감한 메를 (Merle) 대위가 제2 대대 뒤를 지나갔는데, 이 대대의 대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지금 자네 척탄병 하나를 데리고 있네.  적 기병군도에 한방 크게 먹었지."  "그 병사는 어디 있지 ? 얼굴을 보게 그자를 데려와 주게. 아! 자네였군, 쿠아녜 ?"  "예 대위님."  "난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자네가 도랑에 처박히는 것을 봤어."  "그들이 제게 칼탕을 먹였지요.  보세요. 제 땋은 머리를 잘라놓았습니다."  "보게나, 내 배낭을 뒤져보라고. 내 '생명수통'을 받아들고 그 안의 럼 한모금 마시면 기운이 좀 날거야.  오늘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에 다시 와서 자네를 찾아봄세."  "이제 기운이 납니다, 대위님.  아주 기운차게 싸울 수 있습니다."  다른 대위가 말했다.  "후방으로 가라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듣더군."  "그럴 만 하네.  이 친구가 몬테벨로에서 내 목숨도 구해줬거든."  그들은 나와 악수를 했다.  이렇게 인정받는다는 것처럼 기쁜 것도 없었다 !  난 평생 그 기쁨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갖은 애를 썼음에도, 우리는 패배하고 있었다.  때는 오후 2시 경이었다.  "이 전투는 패배한거야."  우리 장교들이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참모 장교 하나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그는 외쳤다.  "제1통령은 어디에 계신가 ? 예비대가 오고 있다.  용기를 내라 !  너희는 곧 증원병력을 받을 거야, 30분 안에 !"  곧 제1통령이 나타났다.  "침착하라."  그가 대오를 지나가며 말했다. "예비대가 바로 근처에 있다."  우리 불쌍한 소대는 몬테벨로 쪽 길을 자꾸만 뒤돌아 보았다.

마침내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 왔다, 여기 왔다 !"  그 휘황찬란한 사단이 무기를 들고 다가왔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숲 같았다.  부대들은 안정된 발걸음으로 행군해왔고, 각 반편 대대 사이의 공간에는 포병대가 위치하고 있었고, 맨 후방에는 중기병연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전투 위치에 도착한 그 사단은, 마치 일부러 전열을 거기에 정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포진했다.  우리 좌측, 즉 대로 왼쪽으로는 높은 관목 울타리가 처져 있어서 적의 기병대조차도 새로 도착한 사단을 볼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제1통령의 명령에 따라 후퇴를 계속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소총을 비스듬히 매고 마치 집에 가는 것처럼 여유있게 행군해왔다.  그들은 우리가 완전히 패퇴했다고 보고 우리에겐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우리가 드제(Desaix) 장군 사단의 뒤쪽으로 300보 정도 물러서고, 오스트리아군도 그 선을 넘어서 통과하려는 순간, 적의 선두에 벼락이 떨어졌다.  포도탄, 폭발탄, 머스켓 탄환이 그들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우리 북들은 전원 돌격을 알리는 박자를 울렸다.  전체 전열이 뒤로 돌아서 앞쪽으로 달려나갔다.  우리는 외치지 않고 고함을 질러댔다. (역주 : 뭔 소리인지 ?  shout 하지 않고 yell 했다는데 ?)

용감한 제9 반편 여단의 병사들은 관목 울타리 사이를 마치 토끼처럼 달려나갔다.  그들은 헝가리 척탄병들에게 총검을 들이대며 덤벼들었고, 그들이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제30 여단과 제59 여단은 차례로 적군에게 덤벼들어 적 포로를 4천명이나 잡았다.  그 다음은 중기병 연대가 뛰어 나갔다.  적군은 완전히 패주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의무를 다했지만, 제9 여단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우리의 다른 기병대가 다가와 탄탄한 대오를 짜고 오스트리아 기병대에게 돌격했는데, 적 기병대는 완전히 박살이 나서 알레산드리아를 향해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우측으로부터 오스트리아 사단 하나가 다가와 우리에게 총검 돌격을 가해 왔다.  우리도 달려나가 총검을 맞대었는데, 결국 우리가 그들을 압도하고 패주시켰다.  나는 적 척탄병이 내지르는 총검을 젖혀 내다가 오른쪽 눈두덩에 작은 부상을 입었다.  내 총검은 빗나가지 않아서 그를 쓰러뜨렸으나, 눈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적군은 그날 하루 내 머리통에 대해 불만이 많았나 보다.)  그건 작은 문제였다.  난 계속 전진했고 그로 인해 문제는 겪지 않았다.  우리는 밤 9시까지 그들을 추격했고, 물이 가득한 도랑에 그들을 처박았다.  그들의 시체는 다른 병사들이 딛고 도랑을 건널 다리 역할을 했다.  그 불운한 녀석들이 물에 빠져 죽으며 다리 전체가 그 시체로 꽉 막힌 광경은 정말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그들의 비명 소리 뿐이었다.  적군은 도시로 가는 길을 봉쇄당했고, 우리는 적의 짐마차들과 대포들을 노획했다.  밤 10시 경, 내 대위가 하인을 보내 저녁을 함께 하겠냐고 물어왔다.  난 눈가에 붕대를 감고 머리 모양도 다듬었다.

우리는 전투 현장에서 노숙했고, 다음날 새벽 4시경, 휴전을 뜻하는 백기를 든 사절단이 도시(알레산드리아)로부터 나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휴전이었고, 제1통령의 사령부로 향했다.  그들은 정중하게 호송되었다.  병사들은 다시 한번 즐거워했다. 

(...중략...  이하 간추림) ---------------------------------

쿠아녜는 이날 대위에게 친구를 만나보러 보나파르트의 사령부에 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처음에 대위는 거절하지만 일찍 돌아오겠으며, 혼자 가다가는 탈영병으로 오인받을 수 있으므로 다른 병사 하나를 붙여달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냅니다.  쿠아녜가 사령부에서 만난 것은 친구라기보다는 통령 근위 기병대의 대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통령 근위 기병대의 군마를 파리에서 훈련시킨 사람이라고 알리고, 대위도 그 말들이 무척 훈련이 잘 되어있었다고 칭찬합니다.  쿠아녜는 전날 있었던 오스트리아 기병대와의 전투에서 자신의 땋은 머리를 잘렸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자기도 통령 근위 기병대로 소속을 바꿨으면 한다는 로비를 합니다.  대위도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소속 중대 대위에게 편지를 써주겠다고 약속하며, 파리로 복귀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주소를 알려줍니다.  대위가 브랜디를 한병 주자, 쿠아녜는 자기 동료들에게 가져다 줄 빵을 좀 얻을 수 있겠냐고 묻고, 빵 5덩어리를 받아갑니다.  (굶주리는 일반 부대와는 달리, 역시 통령 근위대는 보급이 풍족했다는 반증이지요.  쿠아녜가 기를 쓰고 근위대에 들어가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지요.)




(결국 이 마렝고 전투 이후 쿠아녜는 정말 통령 근위대로 발탁되었고, 이렇게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도 황실 근위대로 참전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부대 중위의 검문을 받는데, 자기 부대 대위에게 가져다 주려고 통령 사령부에서 빵을 좀 얻어간다는 대답에, 이 중위도 체면불구하고 그 빵을 좀 얻을 수 있겠냐고 청합니다.  이 중위에게 작은 빵 한조각을 나누어주자, 이 중위는 정말 내 목숨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다며 고마와하며, 다른 장교들에게 체포되는 일이 없도록 소속 부대까지 호위까지 해줍니다.  쿠아녜는 원래 소속 부대 대위에게 돌아와, 빵과 브랜디를 기꺼이 상납했고, 더 나아가 빵 한덩어리는 대령과 장군에게 가져다주라고 대위에게 권합니다.  대위도 반색하며 빵 한덩어리를 대령과 장군에게 바치러 갑니다.  (프랑스군의 보급이 정말 안구에 쓰나미 수준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6월 16일에 전군은 월계관을 갖추라는 명령을 받고 (당연히 월계수가 없으므로) 애꿎은 떡갈나무 가지를 잘라 비슷한 장식을 갖춥니다.  나폴레옹 앞에서 사열식을 하던 쿠아녜의 여단은, 마렝고 전투에서 꽁무니를 뺐던 자신들의 장군 샹발락이 말을 타고 나타나자 그에게 적대적인 일제 사격을 퍼부어 망신을 주었고, 샹발락은 창피를 당하고 물러납니다.  이후 샹발락 장군의 이야기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반면 자신을 용감하게 지휘했던 그 키작은 장군은 쿠아녜의 여단으로부터 3번의 환호성을 받는 영예를 누립니다.  (당시 나폴레옹 휘하 군대의 군기가... 참 뭐라고 말하기 어렵네요.  군기가 어지럽다고 해야 할지, 정말 능력있는 지휘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바람직한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이날 아침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인 멜라스(Melas) 장군이 프랑스군 포로 1200명을 반환했고, 이 일로 프랑스군은 또 크게 기뻐합니다.  이렇게 되돌아온 프랑스군 포로들은 동료 프랑스군들로부터 따뜻하고 명예로운 영접을 받습니다.  6월 26일, 오스트리아군이 휴전 협정 하에 프랑스군 앞을 지나가는데, 그 무장 수준도 높고 또 그 수자가 하도 많아서 프랑스군은 스스로 이런 군대를 격파했다는 사실에 무척 뿌듯해 합니다.  이렇게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 앞을 지나가는데 무려 3일이나 걸릴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많은 포병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남겨두고 가야 했고, 또 보급품의 절반은 프랑스군에게 남겨두고 갔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식량이나 탄약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었습니다.  (휴전 협정 내용이 그러했나 봅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군은 약 40리그(league - 약 4.8km, 그러니까 40리그 = 192km =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입니다)를 양보하여 민치오(Mincio) 강 너머로 후퇴하기로 합니다.  특히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맨 마지막 부대는, 그들을 배웅하며 그들이 철수하는 지역을 점령하러 가는 코이녜가 소속된 여단과 함께 길을 갑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길의 왼편에서, 프랑스군은 길의 오른편에서 행군했는데, 이 두 부대는 사이좋게 행군했으며, 프랑스군 중 부상병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짐마차에 올라타고 행군할 정도로 우호적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크레모나 시의 전경입니다... 아우... 정말 도시가 아담하고 이쁘네요.  서울은 무리겠고... 세종시 같은 신도시는 아파트 말고 뭐 좀 저렇게 예쁘게 지으면 몇백년 뒤에 관광 명소로 좀 띄울 수 있지 않을까요 ?)



이렇게 전진한 쿠아녜의 여단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크레모나(Cremona)에 수비대로 주둔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쿠아녜는 난감한 일을 겪습니다.  수비대의 거처가 벼룩과 빈대가 들끓는 짚단을 쌓아놓은 곳이다보니, 이 해충에게 시달리던 쿠아녜는 군복 자켓에서 벼룩과 빈대를 없애겠다고 잿물을 만들어 자켓을 담궈놓습니다.  그러나 자켓이 너무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것이었는지 잿물이 너무 강한 것이었는지, 안감만 남기고 자켓이 그냥 녹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  당장 입을 옷이 없어진 쿠아녜는 글자를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고향 집의 아버지와 삼촌에게 편지를 각각 씁니다.  군복을 새로 살 돈을 조금만 보내달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늦게나마 착불 형식의 답장들이 왔고, 쿠아녜는 그 편지 2통 값으로 3프랑(약 3만7천원 정도)의 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글자를 아는 하사관에게 그 내용을 읽어달라고 하니, 아버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돈을 못보내겠다는 내용이었고, 삼촌은 세금을 방금 낸 상태가 돈이 한푼도 없다는 핑계로 역시 돈을 못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쿠아녜는 크게 실망하고 삐져서, 두번 다시 아버지나 삼촌과는 편지를 주고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동료들에게 꿨던 우편비용 3프랑을 갚아야 했으므로, 1번에 15수(약 9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민치오 강변에서 동료들 보초 서는 것을 대신 서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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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에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마렝고 전투의 전말에 대해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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