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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총재 정부 - 그들의 이야기

by nasica-old 201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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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혁명 기간을 1789년 ~ 1799년의 10년간으로 정의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1789년이야 삼부회 소집이라든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시민인권선언이라든가 하는 워낙 중요한 사건이 많이 생겨났으니 1789년이 혁명의 원년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도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사람들도 (특히 학교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1799년에 끝났다고요 ?  모든 일에는 근사하건 초라하건 끝이 있기 마련인데, 1799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버린 것일까요 ?

먼저 (상당히 뒤늦은 감이 있지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시지요.




(프랑스 대혁명 하면 뭐니뭐니 해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백미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어찌 보면 그 시작이 다소 알쏭달쏭한 편입니다.  궁극적으로야 귀족들은 특권을 누리며 잘 사는데,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상황이 계속 되다보니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서 혁명이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현대도 포함하여) 안 그런 시대가 있었나요 ?  왜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대사건이 터지지 않았을까요 ?  더군다나, 당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이 (일설에 따르면 아이슬란드 등에서의 화산 폭발로 인해) 일종의 소빙기를 겪고 있는 중이라서 모든 국가들이 흉년을 겪고 있었으며, 그나마 프랑스는 좀 사정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경제 상황이 더 열악했던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지에서는 그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굳이 프랑스에서만 이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한두가지가 아니겠습니다.  일단 프랑스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주도하던 선진국이라는 점이 있겠습니다.  루소(Rousseau, Jean Jacques)나 몽테스키외 (Montesquieu, Charles De), 디드로 (Diderot, Denis) 등은 모두 프랑스인이고, 또 프랑스는 동구권에 비하면 그래도 문맹률이 낮아서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수의 국민들이 책과 신문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역시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책과 신문이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읽지 않고 포털이나 TV에서 헤드라인으로 뽑아주는 내용만 대충 받아들이지요...)  또 프랑스는 산업화/도시화가 발달되어 혁명을 조직적으로 이끌, 귀족은 아니지만 돈과 실력을 갖춘 부르조아들이 존재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인구 50만이 넘어가는 도시는 런던(90만)과 파리(60만)이 유일했지요.  베를린만 하더라도 당시에는 인구가 고작 17만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제네바에 있는 루소의 동상)



하지만 문맹률이나 계몽주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부르조아 계급의 성장 등은 모두 영국이 오히려 한발짝 앞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프랑스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  그건 정치와 재정의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이미 17세기에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을 거치면서, 입헌군주국으로서의 기반을 튼실하게 다져 놓은 상태였습니다.  즉, 의회 정치가 이미 상당히 발전한 상태라서, 국민 대다수가 굳이 요란스럽고 피가 흐르기 마련인 혁명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하여 프랑스는 의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입헌군주국보다는 절대 왕정을 추구했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에서는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은 위법'이라는 권리 장전이 만들어지던 시절에,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이니라'를 떠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 화려함 뒤에는 빚더미가...)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빚이었지요.  호화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궁정 생활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전쟁, 플랑드르 전쟁, 에스파냐 계승권 전쟁, 아우구스부르크 동맹 전쟁 등 유럽의 온갖 싸움판에 끼어들어 위세를 과시했던 일들이 모두 돈을 어마어마하게 잡아 먹는 것들이었습니다.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참조)  특히 프랑스가 그동안 영국에게 당한 것을 되갚아준답시고 호기롭게 끼어들었던 미국 독립전쟁은 그렇지 않아도 비틀거리던 프랑스의 재정 상태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의 용사들이 귀국하여 '왕 없이도 나라가 만들어지더라' '귀족이 없는 나라가 있더라' 등의 혁명적인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는 동안, 루이 16세는 바닥이 난 국고를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어야 했습니다.  (이 상황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겪은 미국의 현실과도 비슷합니다.)




(대표적인 미국 독립전쟁 참전 용사 라파예트 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fayette 입니다.  정작 혁명이 벌어지자, 이 역전의 용사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지요.)



이렇게 바닥이 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는 뭔가 조치가 필요했는데, 당시 재무상이던 네케르(Jacques Necker)는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더 이상 고금리의 국채를 발행하는 것보다는 세금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일본의 재정 상태가 딱 이 모양... 그동안 쌓인 국채의 이자 지급을 위해 새로운 국채를 찍어내는 악순환...)  그러나 평민들에게서 더 이상 쥐어짜낼 세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귀족들은, 결국 면세 혜택을 누리던 자신들에게 과세를 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반발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대변하던 왕비 앙트와네트에 의해 1781년 네케르가 쫓겨나면서 결국 프랑스의 재무 상태를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자크 네케르의 딸이 바로 스탈 부인입니다.)




(1789년에 영국에서 그려진 이 만화는 네케르가 프랑스에 자유를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반면에 윌리엄 핏 수상의 영국은 노예제로 비하되었습니다.)



1788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프랑스 국가 재정이 나빠지자, 결국 루이 16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네케르를 불러 들입니다.  네케르는 당시 평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 조치는 평민층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호평에 부응하듯이 1789년, 운명의 삼부회(Estates-General) 소집을 건의합니다.  이 삼부회를 통해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에게 전보다 더 많은 세금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고 동의를 받으려 했던 것이지요.  특히 네케르가 삼부회 (사제-귀족-평민 계급) 중 평민 계급의 대표자 수자를 2배로 늘려준 것이 매우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평민, 즉 제3 계급의 대표자 수자는 2배로 늘었으나, 결국 의결권은 전과 마찬가지로 각 계급당 1표씩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평민 계급은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열린 삼부회가 씨앗이 되어, 프랑스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3계급이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을 먹여살리는 이 그림에서, 당시 평민들이 느끼던 좌절과 분노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말이 길었습니다만,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과감하게) 한줄로 요약하면 "감당할 수 없는 나라 빚을 처리하는데 있어 각 계급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서 귀족 계급들은 상당수 쫓겨나고 (애초에 그냥 특권 포기하고 세금 부담에 동의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왕과 왕비는 목이 잘리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대혁명의 시발점을 제공한 네케르 본인은 혁명의 과격성에 반대하여 결국 이미지만 구긴 채 1790년 사임한 뒤 고향 스위스로 낙향한 사실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고 왕이 목이 잘린다고 있던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한 주체인 부르조아 계급(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역사적으로 농민이나 노동자가 정권을 잡은 적이 없어요.  공산당 치하에서조차도요.) 은 이 재정 파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  일종의 약탈, 좀더 유순한 말로는 '부의 재분배'로서 해결했습니다.  당시 귀족들이나 사제 계급은 방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런 자산들을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만든 뒤, 이를 다시 대중들에게, 정확하게는 부르조아 계급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재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용된 것이 악명높은 아시냐 (Assignat) 지폐였습니다.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참조)  원래 돈이라는 것은 은행 금고에 금을 쌓아두고 그를 담보로 찍어내는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대신 토지를 담보로 찍어낸 것이 바로 아시냐 지폐였습니다.




(생-상 리브르, 500 리브르 짜리 아시냐 지폐입니다.  현재 가치로 약 600만원이 넘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괜찮았으나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는 돈을 찍어내는 것에 너무 재미를 들린 나머지, 그렇게 확보한 토지 자산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돈을 마구 찍어냈습니다.  (아마 자신들도 세금을 내는 것은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마구 찍어낸 아시냐 지폐의 가치가 폭락하자 당연히 상대적으로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되자 피를 보는 것이 누구였겠습니까 ?  항상 그렇지만 서민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정말로 굶게 되자 프랑스 대혁명의 무력을 담당했던 서민들, 즉 상 퀼로트(sans-culottes)들은 국민공회에 해결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내놓은 것이 또 다시 무리수...  바로 1793년의 최고 가격제 (Maximum Price Act) 였습니다.  즉, 빵 같은 주요 생필품에 대해서 최고 판매가를 법으로 정하고, 그 이상의 가격으로 팔면 잡아 가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북한식 경제였지요.  실제로 당시는 전체 프랑스가 국민공회 공안위원회(Committee of Public Safety)의 공포 정치의 맹위에 벌벌 떨고 있던 때였습니다.  바로 단두대의 사나이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이 법안을 집행한 당사자였지요.




(이 웃기게 생긴 양반이 로베스피에르.  별명은 L'Incorruptible, 즉 부패시킬 수 없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당연히 장사꾼들은 물건을 정규 시장이 아닌 암시장에다 내다 팔았고, 농민들은 아예 파리나 도시로 농산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주요 도시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지요.  공안위원회가 그에 대해 내놓은 답은 정말 현대의 '좌익 빨갱이들'이 삼성 본가에 대해 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정말 용기병들을 파리 근교 시골로 보내 농가를 수색하여 감춰놓은 식량을 강제로 빼앗아 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국가가 운영이 되겠습니까 ?  혁명에서 몸빵을 담당했던 파리의 서민들, 즉 상 퀼로트들은 국민공회의 무능함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 혁명을 했는데, 그 결과는 참혹한 굶주림이었으니까요.  결국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Thermidor) 반동 사건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자코뱅 당이 몰락할 때, 상 퀼로트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총칼을 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정말 청렴결백의 화신이라고 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그런 점이 대중을 움직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민중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로베스피에르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아래턱만 박살이 난 채로 다음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테르미도르 반동 때 로베스피에르는 권총을 맞고 아래 턱이 부서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르다 Charles-Andre Merda 라는 헌병이 그의 얼굴에 총을 쏘았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두번째 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메르다라는 병사는 나중에 귀족의 지위에 올라 대령으로 프랑스 경기병대에 복무하다가, 러시아 원정 때 보로디노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국민공회의 인기가 바닥을 치자, 국민공회를 이루었던 부르조아들은 정치판을 새로 짜서 "총재 정부"라는 것을 만들기로 합니다.  즉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따라 행정권을 가진 총재(directory)들 5명과, 입법권을 가진 500인 위원회 (Council of Five Hundred, 미국으로 치면 하원에 해당), 그리고 500인 위원회가 만든 법안에 대해 승인 또는 거부를 할 수 있으나 스스로 법을 만들 권한은 없었던 원로원 (Council of Ancients, 미국으로 따지면 상원에 해당)을 새로 뽑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공회가 워낙 인심을 잃었던 까닭에, 이대로 정직한 선거를 하게 되면 전에 국민공회를 이루었던 부르조아들은 필연적으로 권력을 잃게 될 것 같았고, 대신 왕당파가 다시 득세를 하여 국민공회를 이루었던 부르조아들이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크게 되었습니다.  이러자 전직 국민공회 의원들은 꼼수를 부려 선거법을 바꿔버렸습니다.   즉, 새로 뽑히는 의원들 중 2/3는 무조건 지난 국민공회 의원 중에서 뽑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버린 것이었지요.  이 법은 투표에 붙여졌는데, 이제 정치라면 지긋지긋했던 국민들은 이 법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서 투표율이 매우 낮았고, 법안도 그대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격렬하게 반발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킨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반혁명세력이었지요.  이 반혁명세력에는 여러가지 사람들이 섞여있었는데, 왕당파인 구귀족들, 그리고 국민공회가 탄압한 카톨릭을 지키고 싶어한 시민들, 그리고 혁명이 가져온 피의 혼란이 싫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파리 시내의 국민방위군 무려 3만 !  그러나 국민공회를 지켜낼 공안위 소속 병력은 겨우 5천 !  이렇게 총재 정부는 미처 구성이 되기도 전에 좌초되어 반혁명 세력에게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홀연히 나타나 반혁명세력을 대포 한방으로 무찌르고 총재 정부를 무사히 출범시킨 불세출의 무림 고수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나폴레옹, 시민 봉기를 대포로 진압하다 -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참조 )




(내란으로 혼란에 빠진 파리 거리에 무림 고수가 등장하다 !)



이렇게 나폴레옹의 무력에 의해 겨우 출범한 총재 정부는 시작부터가 그다지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명한 수학자이자 5인 총재 중 한명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처럼 공정하고 능력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5인 총재 중 가장 영향력이 막강했던 바라스(Paul François Jean Nicolas, vicomte de Barras) 같은 인물은 부패의 상징이다시피 했습니다.  카르노처럼 청렴하건, 바라스처럼 썩었던, 이들도 아시냐 지폐와 최고 가격제로 대표되는 국민공회의 경제 정책 실패를 어떻게든 만회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들도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로베스피에르처럼 죽어나갈테니까요.  총재 정부가 택한 경제 문제 해결 방법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국외의 자산을 손에 넣자는, 일종의 약탈 경제를 추구했던 것이지요.  이는 총재 정부가 나폴레옹에게 이탈리아와 이집트를 침공하도록 허락하면서 내린 훈령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훈령 내용 중 중요한 한 구절이 바로 이거였지요. "Show me the MONEY !!!"   게다가 전쟁을 통해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자신들의 정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속셈도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총재 정부의 전쟁 도박은 모로(Moreaux)와 나폴레옹의 활약 덕분에 대성공을 거둡니다. 




(카르노는 원래 수학자였고,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 기하학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혁명 초창기 모든 것이 엉망일 때도 신생 프랑스 공화국이 강력한 외국 연합군의 침공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카르노의 재능 덕분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의 별명은 '승리의 설계자'였지요.  나폴레옹도 방데미에르 사건으로 뜨기 전에는 카르노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신세였지요.)



총재들 중 바라스를 포함한 권력 지향파 3인 (Barras, Rewbell, Lépeaux)은 구귀족들과 사제들을 계속 탄압하고,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장기 집권하자는 강경파였습니다.  그에 비해 카르노와 바르텔레미는 온건파로서, 망명 귀족들 및 그 친척, 그리고 카톨릭 사제들에 대한 탄압을 풀어주자는 의견을 내고 있었지요.  특히 왕당파에게 동정적이라는 평이 자자했던 피슈그뤼(Pichegru) 장군이 하원인 500인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카르노의 온건파가 득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바라스의 강경파는 작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1797년 프뤽티도르 (Fructidor) 쿠데타입니다.  이 프뤽티도르 사건에 동원된 것은 또 다시 모로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즉 이들이 라인 방면군과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탈취한 군기를 총재 정부에 전달한다'는 명목하에, 파리로 군대를 파견하여 카르노의 온건파를 무력으로 진압해버린 것입니다.  언제 나폴레옹이 이런 친위 쿠데타에 참여했냐고요 ?  전에 캄포 포르미오 - 나폴레옹의 우승컵 편에서 언급된 피슈그뤼(Pichegru) 장군의 음모가 분쇄되었다는 사건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이 직접 파리로 오지는 않았고, 당시 왼팔 격이던 오쥬로 장군을 보내어 바라스파의 총재들을 도왔지요.




(오쥬로가 튈르리 궁에 병력을 이끌고 들이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뤽티도르 쿠데타입니다.)



이렇게 총재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것은, 이 정권도 거의 끝장난 상태라는 것의 반증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총재들은 헌법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없는 체포 및 구금, 검열 등을 마구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총재 정부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군국주의라는 모험이 어느 정도 성공했고, 그로 인해 경제 사정도 그런대로 버틸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라스로 대표되는 총재 정부는 너무나 부패했고, 또 무능했으며, 거의 그 종말이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총재 정부를 유지시키고 있던 장군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총재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1차 대불 동맹 전쟁이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대략 정리되고,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나고 나자, 이제 쌓였던 경제 문제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국민들의 불만은 쌓여갔으며, 정치가들은 장군들을 몰래 만나 자신의 쿠데타에 참여하라고 선동을 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장군들은 그런 쿠데타 제의를 거절했는데, 그것은 공화국을 지키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자신의 쿠테타를 일으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인권 선언입니다.  1789년에 선언된 이 기본적인 인권이 아직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당시에도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이 불합리한 인간 사회에서는 영원히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이런 상황에서, 1799년 10월, 그동안 총재 정부를 일으켜 세우고, 먹여 살리고, 지켜줬던 사나이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돌아옵니다.  그가 총재 정부에게 내놓은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요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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