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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이집트 원정 - 남은 이야기

by nasica-old 201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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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는 나폴레옹이 뮈롱 호를 타고 프랑스에 극적으로 귀환하여 엄청난 환호를 받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광 뒤에는 더러운 뒤처리가 남아 있는 법이지요.  특히 이 경우에는 뒤에 남은 프랑스 동방군 병사들의 처지가 그랬습니다.

클레베르는 갑작스럽게 '꼭 면전에서 의논할 것이 생겼다'는 나폴레옹의 소환 편지에 응하여 헐레벌떡 달려왔으나, 나폴레옹은 이미 프랑스로 튄 뒤였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므누(Menou) 장군이 그에게 전달한 나폴레옹의 편지들 뿐이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정말 기가 막힌 내용이었지요.  프랑스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자기는 먼저 가니, 니가 남아서 뒤치닥거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그 사실 자체도 분통터지는 것이었는데, 특히 클레베르의 염장을 지른 것은 그 편지 내용이 정말 세세한 지시 사항까지 시시콜콜 참견하는 것으로서, 마치 초급 군관에게 제갈공명이 묘책을 남기는 것처럼 생색을 냈다는 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에게 남긴 편지에서, 이집트 동방군의 운명을 자기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겠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기회 닿는대로 프랑스 본토에서 코미디언(개그맨이 아니라 희극 배우 정도입니다)들을 꼭 보내주겠다고까지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클레베르는 정말 화가 날 대로 나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말투조차 마초스러웠던 클레베르)



"나폴레옹 이 녀석이 제 바지에 똥을 싸질러놓고 버리고 갔네 !  유럽에서 다시 그 자식을 만나게 되면 이 똥바지에다 그 자식 얼굴을 비벼 주겠어 !!"  (표현이 좀 적나라하긴 하지만, 이건 제가 개그 코드를 넣은 것이 아니라 클레베르가 정말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화가 좀 가라 앉은 다음에 클레베르가 나폴레옹의 지시 내용을 정리해보니 대략 이랬습니다.

1) 곧 원군을 보내줄테니 버틸 때까지 버텨봐라.  너의 궁극적 임무는 유럽에서 내가 크게 뭔가를 해내서 영국과 평화 협정을 맺을 때까지 버티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다.
2) 하지만 다음해 (1800년) 5월까지 원군이 오지 않거나, 역병으로 1,5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게 된다면, 오스만 정부(쉬블림 포르트, Sublime Porte)와 평화 협상을 하여 이집트를 포기해도 좋다.

클레베르는 화끈한 군인답게, 개쉐이 나폴레옹의 1번 지시는 깡그리 무시하고, 당장 2번 옵션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즉, 그는 즉각 영국 해군의 시드니 스미스 및 오스만 투르크에게 사절을 보내어 '이집트에서 물러날테니 명예로운 퇴각을 보장해다오' 라고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은 나폴레옹을 따라갔던 학자들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모두를 크게 만족시켰고, 군 내부에서 그렇잖아도 괜찮았던 클레베르의 인기를 한껏 더 드높였습니다. 

클레베르가 이렇게 제멋대로 어렵게 손에 넣은 이집트를 포기하기로 독단을 내린 것은 사실 제대로 된 판단이었습니다.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더군다나 강력한 오스만 투르크의 재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집트를 붙잡고 있어봐야 프랑스의 국익에나 이집트 국민들에게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클레베르가 이 당시 파리 총재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프랑스 동방군의 재정 상태는 약 1천만 프랑의 적자 상태였고, 이 중 병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급료만 해도 4백만 프랑이 밀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전체 병력 수도 출발할 때의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어 있었고요.  이것만 봐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대재앙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세수는 농민들에게서 거두는 토지 임대료 외에도 홍해를 통한 커피 무역 등에 부과되는 관세가 짭짤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진데다 영국 해군이 해상을 봉쇄했으니, 그런 관세는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지요.)



원래 이집트 원정을 출발하기 전, 나폴레옹과 총재 정부가 추산하기로는 이집트의 1년 세수는 약 5천만 프랑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 현지에서 프랑스군의 재무관 노릇을 한 푸시엘그(Poussielgue)의 정확한 추산에 따르면 평화 시기에도 그 액수는 2천만 프랑을 넘지 못했고, 프랑스군의 침공이 있은 다음에는 1천2백만 프랑 정도로 줄어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이집트 농민들의 저항과 무라드 베이의 게릴라 활동 덕택에, 세금 징수는 거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요.  사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가장 크게 실망한 부분도 그 재정 분야였습니다.  나폴레옹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재정 적자는 약 150만 프랑 정도였지만, 나폴레옹이 떠난지 2달 정도 뒤인 10월 8일 장부를 맞추어 본 결과 그 적자 액수는 무려 1200만 프랑에 달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게다가 푸시엘그의 계산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떠날 때 200만 프랑 정도를 개인 용도로 슬쩍 해간 것 같았습니다.  이 추정의 진실 여부야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지난 '뮈롱 (Muiron), 나폴레옹을 2번 살리다'  편에서 나폴레옹은 수중에 있던 4만 프랑을 코르시카 주둔 프랑스군을 위해 모두 아낌없이 뿌렸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엄청난 비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  흠...




(원래 영웅이 영웅스럽기 위해서는 돈이 꽤 많이 필요하다지요 ?)



이집트 원정 자체가 나폴레옹이라는 정신병자의 병정놀이에 불과했다는 확신을 가진 클레베르는 당장 오스만 투르크와 협상에 들어갑니다.  그가 오스만 투르크의 국무총리 (Grand Vizier)인 유세프 파샤 (Yussef Pasha)에게 최초로 쓴 편지는 1799년 9월 17일,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줄행랑을 친지 1달도 안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서두른 것은 사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유세프 파샤가 직접 이끈 8만의 대군이 이집트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클레베르는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와의 사이에서 중재를 해줄 조정자로서 영국 해군의 시드니 경을 골랐습니다.  (그의 전함 티그르 호는 10월 초에 다시 이집트 해변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이렇게 적장들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행위는 반역 행위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클레베르에게는 그럴 권한이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1797년 자기 독자적인 행동으로 오스트리아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했었지만, 그건 조약 내용이 승리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괜찮았던 것입니다.  특히 전임자인 나폴레옹이 구체적인 평화 협상 개시 조건 (1800년 5월까지, 혹은 병사자가 1,500명 이상 나거든)을 제시했는데도 그를 무시하고 당장 항복에 가까운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부하들이야 집에 가서 좋을지 몰라도, 클레베르 본인은 본국에서 단두대에 오를지도 모르는 모험이었습니다.  클레베르는 그를 잘 알면서도 협상을 서둘렀습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 때, 뭐하러 꽃다운 젊은 나이의 병사들 1,500명이 죽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  라는 것이 클레베르의 생각이었지요.  이 점에서 저는 정말 클레베르가 남자다운 군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시드니 경의 중재로, 프랑스 측과 오스만 투르크 측은 영국 전함 티그르 호 함상에서 1799년 12월 22일, 평화 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합니다.  이때 프랑스 측의 대표는 재무관 푸시엘그와 드제 (Desaix) 장군이었습니다.  민간인이었던 푸시엘그는 당장 이집트를 떠나고자 이 평화 사절단에 자원했고, 드제는 이런 치욕스러운 자리에 나서는 것이 탐탁치 않았지만, 푸시엘그 혼자 보냈다가는 혹시 무조건 항복에라도 동의할까봐 마지못해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이들이 내세운 조건 2가지는  그럴싸한 것들이었습니다. 

1. 오스만 투르크는 제2차 대불 동맹에서 탈퇴하여 프랑스와의 국교를 회복할 것
2. 유세프 파샤가 끌고 내려오고 있는 오스만 투르크군의 진격을 즉각 중단할 것

그러나 이 두가지는 모두 거절되었습니다.  먼저 1번 항목은 시드니 경 자신이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고, 2번 항목은 유세프 파샤가 거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1번 항목을 시드니 경이 거절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2번 항목을 유세프 파샤가 거절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  그 이유는 전에 나폴레옹이 시리아 원정길에 점령했던 엘 아리쉬(El Arish) 요새에서 나중에 드러납니다.




(그랜드 비지어의 텐트에서 그랜드 비지어와 이야기를 나누는 영국군 장교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HMSTigre에서 1799년과 1800년 2년간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스필스베리(Spilsbury)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니까,저 그랜드 비지어가 유세프 파샤인 모양입니다.)



아무튼 프랑스 측이 요청한 조건 2가지는 거절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0년 1월 28일, 엘 아리쉬 요새 앞바다에 닻을 내린 HMS 티그르 호 함상에서 평화 조약이 맺어집니다.  협상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프랑스군은 군기, 무기와 화물 등 모든 소지품을 그대로 가지고 프랑스로 귀환하고, 오스만 투르크가 이집트를 점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측 모두에게 공정한 조건이었지요. 

그러나 문제가 곧 벌어집니다.   어느덧 유세프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대군이 시나이 반도 사막을 지나 250명의 프랑스군이 지키는 엘 아리쉬 요새 앞에 나타났습니다.  프랑스군 지휘관은 즉각 농성 준비를 명했지만, 이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 자신들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지휘관을 살해한 뒤, 술 창고를 털어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투르크군을 요새 내부로 불러 들였습니다.  투르크군은 이 프랑스 병사들의 목을 베어 효시함으로써 답례를 했지요. 




(1830년대의 누비아인들의 그림입니다.)



이 비극적인 사태에도 불구하고, 클레베르는 투르크와 계속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는 사절단을 엘 아리쉬로 보내어 유세프 파샤를 만나 이 참극에 대해 항의하도록 했지요.  그런데 엘 아리쉬에 도착한 프랑스군 사절단은 이 투르크군의 구성과 상태를 보고는 경악합니다.  이들은 하나의 정규군이라기보다는, 알바니아인, 투르크인, 모로코인, 아랍인, 마멜룩, 심지어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Nubia) 흑인들까지 포함된 혼성 부대였고, 이들은 민족별로 제각각 민족 전통 복장과 장비를 갖춘 채 진도 따로 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십여 km에 걸쳐 무질서하게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를 보니 굶주리고 병든 형색이 완연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제1인자 그랜드 비지어(Grand Vizier)인 유세프 파샤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인데도, 시리아의 실권자인 제자르(Jezzar) 파샤가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바람에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방 정권들이 거의 반독립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지요.  게다가 즉각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더 이상 진격하지 말아달라는 프랑스 사절단의 요청에, 유세프 파샤는 이렇게 답합니다.


"미안한데, 역사적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그랜드 비지어가 이끄는 부대가 적을 앞에 두고 전진을 멈춘 적이 없다."




(이스탄불에서 유럽 대사들을 면접하는 그랜드 비지어의 위엄)



즉, 이들은 애초에 멈출 의사도 없었고, 의사가 있다고 해도 멈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이들의 사정을 이해해주기로 하고, 다만 불안한 눈길로 카이로 인근까지 진군하는 이들을 감시했습니다.   엘 아리쉬 요새 수비병력 250명의 학살에 대해서도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클레베르는 자신들이 자파(Jaffa)에서 저지른 빚이 아직 남아있음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저 멀리 영국 지중해 함대에서 벌어집니다.  애초에 클레베르나 시드니 경이나, 정부를 대신하여 국가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없었지요.  게다가, 영국 정부가, 정확하게는 영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인 키쓰(Keith) 제독이 판단하기에, 제2차 대불 동맹 전쟁이 한창이 지금, 완전 무장을 그대로 유지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나폴레옹 직속 부대 2만 5천명이 곱게 프랑스 본토에 돌아가는 것은 영국의 국익에 크게 이롭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800년 3월 18일 영국 해군으로부터 카이로의 클레베르에게 쪽지 하나가 전달됩니다.  그 내용은 클레베르와 일개 영국 해군 함장 (스미스 시드니)이 맺은 평화 협정은 아무런 효력이 없으니 무조건 항복만이 너의 가련한 목숨을 살릴 길이다 뭐 이런 내용을 몹시 모욕적인 어투로 통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었던 키쓰 제독입니다.  오브리-머투어린 시리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소설 속에서 이 키쓰 제독 부인은 소시적에 어린 잭 오브리의 가정 교사였던 '퀴니'(Queeny)로 나옵니다.  실제로 키쓰 제독의 2번째 부인의 별명이 퀴니였습니다.)



클레베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비록 그가 나폴레옹을 무척 싫어했고, 지금 이 상황이 나폴레옹이 싸질러놓은 똥무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랑스러운 대 프랑스 육군의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창 이집트 철수를 준비 중이던 부대원들에게 즉각 동원령을 내립니다.  당시 유세프 파샤의 8만 대군 (이들 중 절반은 짐꾼, 노예, 요리사, 마굿간지기 등 비전투 요원이었지요) 중 상당수는 카이로 바로 8km 인근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는 곳까지 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기서 프랑스군이 카이로에서 물러나면 즉각 카이로에 무혈 입성할 생각이었지요.




(헬리오폴리스 전투 전경)



3월 20일 새벽 3시, 열혈장군 클레베르가 이끄는 카이로 수비군 1만명 전원이 헬레오폴리스에 무질서하게 진을 친 오스만 투르크의 진영을 들이쳤습니다.  전혀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오스만 투르크의 혼성 부대는 크게 당황하여 대패합니다.  이 전투에서 약 3백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고 오스만군은 6천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피해 규모는 산출이 어렵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난 적이 없다는 그랜드 비지어의 부대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해 도망치는 수나라 군대처럼 시리아로 도망쳤기 때문이었지요.  다만 이 오스만 군 중 일부는 우회하여 텅빈 카이로로 들어가 카이로 시민들의 반란을 유발시켰기 때문에, 클레베르의 개선군은 다시 1달 동안 잔혹한 카이로 반란 진압 작전에 나서야 했습니다.







(헬리오폴리스 전투의 상세 부분입니다.  저는 특히 2번째 그림의 쌍권총 투르크 전사가 인상적이네요.)



이렇게 빛나는 승리를 거둔 클레베르는 불과 3개월이 안되어 8월 14일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명문대 알 아자르 (Al Azahr)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솔레이만 (Soleyman El-Halaby)이라는 시리아인이, 뜰에서 산책 중이던 클레베르의 심장을 칼로 찔러 암살했던 것입니다.  당시 클레베르 옆에는 딱 1명의 민간인이 동행 중이었는데, 처음에 이 시리아인이 어눌하게 접근해올 때는 뭔가 동냥을 구걸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우연이겠습니다만, 바로 이 날, 저 멀리 이탈리아에서는 그 사이에 프랑스 본국으로 소환되어 돌아간 드제 장군이 마렝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총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클레베르 장군의 암살.  그림과는 달리 옆에 있던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프로탱이라는 건축가였습니다.)



이 시리아인은 재판을 거쳐 이집트 전통의 방식대로, 산 채로 오른손을 불태운 뒤, 창으로 몸을 꿰어 산 채로 매달아 놓은 뒤 독수리들이 그 시체를 다 뜯어먹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형벌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 처형을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한 프랑스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X꼬를 칼로 길게 째고 긴 창을 가슴팍 부분까지 찔러 넣은 뒤 그 창을 딱에 박아 넣어 세워 놓을 때까지, 이 시리아 청년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신의 몸이 창에 꿰여 똑바로 세워지자, 그는 창끝에 X꼬가 꽂힌 채로,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모하멧이 그 예언자다" 라는 무슬림의 선언을 내뱉었다고 합니다.  이 용기있는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 행동에 감동한 한 프랑스 병사가 그에게 물을 주려 하자, 악명높았던 그리스인 경찰 책임자였던 바르텔레미(Barthelemy)가 '그러면 범죄자가 일찍 죽는다'며 제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지요.  이 시리아 청년의 머리는 수석 외과의 라리(Larrey, 나폴레옹 전쟁에서 살아남기  참조)에 의해 광기와 범죄 성향을 담은 샘플로서 프랑스로 보내져 프랑스 의학도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이나 클레베르나, 모두 카리스마나 지휘 능력에 있어서 남에게 딸리는 인물들이 아니었지요.  비록 둘다 때때로 병사들의 원성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의 지휘에 대해 병사들이 의구심을 갖는 일은 없었고, 그들은 항상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쟁쟁한 전임자들을 뒤를 이은 프랑스 동방군 총사령관이... 므누 (Jacques-François de Menou)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압달라 므누입니다.)



50대의 똥배나온 아저씨였던 므누 장군은 당시 쟈끄-프랑소와 므누가 아니라 압달라 므누 (Abdallah Menou)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현지인들과 융합하고 이슬람 종교를 존중하라고 지시한 보나파르트의 가르침에 충실하게도, 이집트 현지 부호의 딸인 주베이다(Sitti Zoubeida)와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바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다른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이집트 현지에 남아 있고 싶어 했습니다.  아무래도 젊고 아름다운 부인 때문이었겠지요.  그는 항상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적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던 클레베르와는 달리, 이집트 현지에 끝까지 남아 이집트를 프랑스의 식민지로 굳힌다는 방침을 세워, 휘하 프랑스 병사들과 현지 이집트 주민들 모두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산 흑연을 대체할 근대적 연필을 발명하고  (나폴레옹 시대의 워드 프로세서 - 펜과 연필 참조), 이집트에서 기구를 띄워올리는 등 뛰어난 기술자였던 콩Nicolas-Jacques Conté 조차도, 자신의 공장에서 이집트인들에게 기술을 이전하는 것은 결사 반대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기술적으로 우수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던 프랑스인들의 심정이 그대로 보이는 행동이었지요.  애초에 이 원정의 목표 중 하나가 이집트에게 문명을 전수한다는 것이었다는 점을 되새겨보면, 이 원정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처적으로 오히려 군인들보다는 학자들이 오히려 더 인종차별적이었고 이집트인들에 대한 편견이 더 심했다고 합니다. ) 



므누 장군은 나름 뛰어난 행정가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동안, 프랑스 동방군의 운영 상태는 오히려 약간 개선되었습니다.  므누가 이런저런 세금을 새로 부과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원래 나폴레옹 휘하에 있을 때도 므누는 더러운 옷차림과 부시시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나폴레옹으로부터 '제발 부하들 앞에서 체통이 서는 외모를 갖추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딱 한번 나폴레옹에게서 칭찬을 들었던 때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주베이다와 결혼했을 때였지요.  그러나 그럼으로써 동료들과 부하들의 경멸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므누는 남자다운 군인이었던 클레베르를 질투하고 싫어하여, 그와 함께 일하던 여러 장교들을 해임시켜 빈축을 샀습니다.  결정적으로, 므누는 결코 뛰어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은 곧 전장에서 입증됩니다.




(홍해에서 영국/인도 혼성군을 이끌고 상륙한 베어드 장군은 Sharpe 시리즈 초반부인 Sharpe's Tiger와 Sharpe's Prey 편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위 그림은 Sharpe's Tiger 편에도 묘사된, 티푸 술탄의 시체를 발견하는 베어드 장군을 묘사한 것입니다.)



1801년 3월, 애버크롬비(Sir Ralph Abercromby of Tullibody) 장군이 지휘하는 1만7천의 영국군이 알렉산드리아 인근에 상륙합니다.  동시에 인근 해안에 투르크군도 상륙했고, 이번엔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은 영국군이 아주 확실하게 프랑스군을 전멸시키겠다고 베어드(Baird) 장군 지휘 하에 영국/인도 혼성군을 홍해 해안의 코세이르(Kosseir)에 상륙하여 카이로로 향합니다.  이 소식은 곧 므누 장군에게 도달합니다만, 므누의 대응은 나폴레옹이나 클레베르의 것과는 차이가 컸습니다.  나폴레옹이나 클레베르는 즉각 전체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달려가 적이 자리를 굳히기 전에 뿌리를 뽑았었지요.  그러나 므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3주일이나 지난 다음에 천천히, 그것도 전체 병력의 절반은 카이로에 남겨 둔 채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벌어진 제2차 아부키르 전투에서 (실제로는 캐노푸스 Canopus 인근에서 벌어졌는데), 영국군 1만5천과 프랑스군 1만2천이 격돌했습니다.  이 전투는 므누가 루아즈(Roize) 장군에게 '2년전 뮈라처럼' 프랑스 기병대의 위력을 보여주라며 돌격을 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2년전 뮈라'와는 달리, 혼란스러운 투르크 군에 대해서 이 돌격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캐니스터와 라운드샷을 더블로 쟁여두고 기다리고 있는 영국군 포대에 대해서 이 돌격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과는 양쪽 모두에게 참혹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는 4천, 영국군도 2천 가량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원래 수가 더 많았던 영국군의 피해가 더 적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프랑스군이 패퇴해야 했지요.  그러나 영국군도 총사령관인 애버크롬비 장군이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가 며칠 뒤 사망하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측에서는 제1차 아부키르 전투에서, 투르크군의 제1 방어선을 뚫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던 라뉘즈(Lannuse) 장군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에도 특별히 전령을 므누 장군에게 보내어, '당신은 파리 식당에서 양파껍질 까는 역할도 제대로 못해낼 인간이다' 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므누의 지휘에 대해 역겨움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애버크롬비 장군의 부상... 이때만 해도 죽을 줄은 몰랐겠지요 ?)



므누 장군은 대체 뭔 생각이었는지 그대로 잔존 병력 7천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가 농성합니다.  영국군은 공병을 동원하여 옛 운하에 물을 끌여들여 알렉산드리아를 물로 포위, 하나의 인공섬으로 만든 뒤 4천의 병력을 남겨두어 포위하게 한 뒤, 그대로 카이로로 진격합니다.  1만2천의 병력으로 카이로를 지키고 있던 벨리아르(Belliard) 장군은 쓸데없는 피를 흘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6월 22일 영국군에게 전령을 보내, 평화 협상을 시작합니다.  곧 평화 조약이 이루어졌는데, 그 조건은 허무하게도 1년전 클레베르와 시드니가 합의했던 것과 동일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럴 것이었다면 대체 왜 이들은 쓸데없이 피를 흘려야 했을까요 ?  결국 클레베르와 시드니가 옳았던 것이지요.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므누 장군은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적군보다는 오히려 휘하 장교들과의 투쟁에 더 열을 올려 휘하의 레이니에르(Reynier) 장군을 명령 불복종으로 군사 법정에 회부하는 등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는 당시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전투에서 죽을 줄은 알아도, 항복하는 방법은 모른다'고 허세를 부렸으나, 그 허풍이 무색하게도 결국 영국군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톰 (Ganteaume) 제독에게 명하여 병력 5천을 실은 함대를 이집트로 보내려 여러 차례 노력햇으나, 결국 무능한 강톰이 그런 항해들에서 번번히 뚜렷한 이유없이 회항하여 되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에 포위된 므누에게 도착한 유일한 프랑스 선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이 클레베르에게 약속했던 프랑스 희극 배우들을 실은 연락선 뿐이었습니다.  결국 8월 30일 영국군이 알렉산드리아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한 뒤 2일 뒤인 9월 2일, 므누는 같은 조건으로 영국군과 평화 조약을 맺고 항복합니다.   




(이 로제타 스톤은 1799년 제1차 아부키르 전투 직전, 투르크군의 침공에 대항하여 진지를 구축하던 부샤르라는 공병 장교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지휘관인 므누 장군에게 이 돌에 대해 보고했으니, 므누 장군도 이 로제타 스톤의 발견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지요.  므누 장군은 클레베르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된 뒤, 이 돌의 너무나 소중한 것이므로, 도난을 막기 위해 이 돌을 자기 침대 밑에 넣고 자겠다고 우겨서 학자들을 아연실색케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억류되어 있던 프랑스 학자들은 새로운 영국 사령관인 허친슨(Hutchinson) 장군이 수많은 발굴품을 모조리 압류하려는 바람에 또 치열한 저항을 펼쳐야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있어야만 이 발굴품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항의하며,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모두 불태우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오벨리스크와 석관, 그리고 소중한 로제타 스톤 등을 영국군에게 양도하는 선에서 합의가 되어, 프랑스 학자들은 그동안의 발굴품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01년 10월 27일이 되어서였습니다.  이 마지막 철수에 포함된 사람은 바로 므누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페스트에 걸린 상태로 영국군 프리깃함 다이앤(Diane) 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는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부인 주베이다와 수석 외과의사였던 라리였습니다.  라리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툴롱 항에 내리기 전에 므누의 페스트는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이 무능하지만 나폴레옹의 지시에 잘 따랐던 므누 장군은 그 후 피에몬테 행정관, 투스카니 주지사, 베니스 주지사 등을 지내다 1810년 나폴레옹 제국의 전성기에 프랑스에서 병사합니다.  무능함과는 상관없이, 나름 행복했던 인생이었지요. 


그 사이 본국에서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 뒤 날아온 클레베르의 고발장 등은 나폴레옹과 그 부하들에 의해 철저히 묵살되었지요.  이집트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의 실체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나폴레옹은 정말 너무 큰 거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은 바가 있었지요.




(클레베르 장군의 유해는 방부처리되어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철수할 때 가져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했던 이 알사스인의 무덤이 민주주의 인사들의 성지로 이용될까 두려워 한적한 장소에 조촐한 무덤만을 허락했습니다.   나중에 루이 18세가 복위된 이후, 그의 무덤은 고향인 알사스의 스트라스부르로 옮겨져 성대하게 꾸며집니다.  위 조각판도 스트라스부르의 그의 무덤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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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제 브뤼메르 쿠데타를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제 책도 좀 많이 읽고 준비도 해야 합니다.  여태까지는 주로 Paul Strathern의 Napoleon in Egypt와, 국내에서도 아테네 출판사에서 나온 '나폴레옹의 학자들'을 많이 베꼈습니다.  이제 뭘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해서, 약 1달간은 업뎃이 없을 것 같아요.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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