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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하편)

by nasica-old 2011.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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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는 넬슨이 1798년 8월 1일 오후 2시, 드디어 아부키르 만에 만반의 수비 준비를 갖추고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는 장면까지 보셨습니다.  프랑스 함대에서도 당연히 영국 함대를 발견했습니다.  이때 양측 함대 사이의 거리는 약 17km.  바람이 좋다고 해도 약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이 순간에는 아직 프랑스 함대가 유리한 편이었습니다.  아직 영국 함대가 완전히 진열을 갖추기 전이었거든요.  전함 2척(Swiftsure 호와 Alexander 호)은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정찰 중이었고, 전함 1척(Culloden 호)은 나포한 상선을 예인하느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함대를 위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애초에 4척이나 가지고 있었던 프리깃 함 중 1~2척이라도 아부키르 앞바다에 내보내어 초계라도 하고 있었다면 좀더 빨리 영국 함대의 접근을 탐지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군인은 용서가 되지만,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안된다고 맥아더 장군이 말했었지요.  이 점에서 브뤼예를 비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브뤼예는 브뤼예대로 사정이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였지요.




(뭐 ?  나폴레옹이 이걸 다 가져갔다고 ?)



보통 군함이든 상선이든 항구에 도착하면 일단 신이 납니다.  신선한 물과 식량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프랑스 함대의 수병들은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긴 항해 끝에 항구에 도착했더니, 식량이 항구에서 배로 선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던 식량마저 배에서 항구로 하역이 되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선창 속에 남아있는 건빵을 박박 긁어갑니다.  이집트 상륙 초기에 나폴레옹의 '동방군' 병사들이 겪었던 식량 부족 사태는 빵이냐 콩이냐, 이집트에서의 고뇌  편에서 다루었지요.  이로 인해 정작 브뤼예 휘하의 수병들은 식량 창고가 텅 비게 되어 당장 굶주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편에서 나폴레옹이 '난 브뤼예가 멍청하게 왜 아부키르 만에 남아 있었는지 이해를 못했다' 라고 발뺌을 했다고 했지요.  그러나 나중에 공개된 나폴레옹의 편지를 보면, 나폴레옹은 7월 하순 경에 브뤼예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곧 카이로로 부터 식량을 공급해주겠다'라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즉, 알고 보면 나폴레옹은 브뤼예가 아부키르 만에 남아 있을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고, 결국 브뤼예가 거기 남았던 것은 나폴레옹의 명령 때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굶을 수는 없었으므로, 브뤼예는 수병들을 아부키르 만에 상륙시켜 인근 마을로부터 식량을 구해오게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그곳은 북아프리카의 곡창지대인 이집트였으니까요.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지키고 있는 클레베르 (Klebert) 장군의 부하 병사들조차도 성벽 밖으로 나갈 때면 중무장을 하고 무리를 지어 나가야 할 정도로 이집트 벌판은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바람처럼 움직이는 베두인 유목민들이 사실상 사막을 지배하고 있었거든요.  이들에게 혼쭐이 난 프랑스 수병들은 사정을 브뤼예에게 보고했고, 브뤼예도 어쩔 수 없이 식량 조달단(...이라 쓰고 떼강도라고 읽습니다)을 상륙시킬 때 대규모의 무장병력을 함께 상륙시켜야 했습니다.  이 덕분에, 프랑스 함대에는 식량도 없지만 수병들도 많이 부족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튼 프랑스 애들은 이 베두인들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덜컥 나타난 영국 함대를 보고 브뤼예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그는 즉각 전령을 상륙시켜 '영국놈들이 나타났다, 전원 귀함하라'는 명령을 전하게 했지만, 먹을 것을 찾아 넓은 지역에 뿔뿔이 흩어진 수병들을 쉽게 불러 모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식량 조달단은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도 소속 전함에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요.)  아울러 그는 아직 몇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보고, 다른 전함들의 함장들을 기함인 오리앙 호에 불러모아 작전 회의에 들어갑니다.

이 작전 회의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고 합니다.  일단 나온 아이디어는 가벼운 브릭(brig) 함들을 두 척 내보내, 영국 전함들을 유인하여 아부키르 만 입구의 감춰진 모래톱에 좌초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설픈 유인 작전에 영국 함대는 속아주는 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쟎아요 ?  최신 잠수함도 좌초되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이어서 당장 수병들이 부족하여 대포에 인원을 배치하는 것조차 어려웠으므로, 그 인원 충당을 위해 프리깃함들에서 수병들을 차출하여 전함들에 승선시키도록 했습니다.  어차피 헤비급 전열함들끼리 난타전을 벌이는 함대 결전에서 라이트급인 프리깃함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오후 4시경 흩어져 있던 나머지 영국 전함 3척이 마저 나타나자, 점점 증가하는 영국 전함들의 수자에 브뤼예는 불안감을 느꼈나 봅니다.  그는 닻을 내리고 전열을 굳게 지키며 정적인 포격전으로 승부를 건다는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전함들은 닻을 올리고 출항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휘하 제독이었던 블랑케 (Armand Blanquet du Chayla) 소장이 이에 반발하고 나섭니다.  가뜩이나 수병들이 부족한 마당에 돛을 움직여 기동전을 펼치면서 적과 포격전을 펼칠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 말이지요.  이렇게 나가 싸울지, 앉아서 기다릴지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 함대는 점점 더 다가 왔습니다. 

프랑스 함대에게는 다행히도, 넬슨은 뒤떨어졌던 전함 3척이 함대에 합류할 시간을 주기 위해, 함대의 항진 속도를 늦추도록 했습니다.  이를 본 브뤼예는, 아마도 영국 함대는 해도도 없는 낯선 만에서 야간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나보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약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자 다시 침착해져서, 돛을 올리라는 바로 전의 명령을 (지휘관이 이렇게 왔다갔다 하면 곤란한데...) 취소합니다.  그는 몇시간 뒤 밤이 되면 그 어둠 속에서, 영국 함대의 봉쇄를 뚫고 (어차피 아부키르 만은 만이라고 부르기에 어색할 정도로 입구가 넓었으니까요) 슬쩍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프랑스 지휘부가 이렇게 허둥지둥하는 사이, 넬슨과 그의 일당들은 어땠을까요 ?  매우 침착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넬슨과 그 휘하 함장들은 이미 여러 해 동안 함께 작전을 해왔던 전우들이어서 서로 간의 호흡이 착착 맞았던데다, 이집트로 달려오는 동안 프랑스 함대를 어떤 식으로 요리할지 이미 논의가 다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후자의 이유보다는 전자의 이유가 컸습니다.  즉, 당시 함대 간 결전이라는 것에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당장 현장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에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아군의 13척이 다 현장에 제때 함께 도착할 수 있을지부터 시작하여, 적의 전함이 몇척일지, 해안이나 암초의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바람의 방향이 어떨지는 전투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거든요.  아무튼 넬슨과 그의 휘하 함장들은 한가지 원칙은 다들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이것이었지요.

"적 함대가 몇척이건 간에, 전열의 후미는 내버려두고 선두와 중앙부까지만 두들겨 팬다 !"

이건 사실 뭐 놀라운 작전도 아니고, 영국 해군이 함대전에서 아주 즐겨쓰는 수법이었습니다.  영국 함대의 주요 작전을 살펴 보면 이런 패턴이 많습니다.  즉 적 함대를 넓은 바다에서 만나면 함대 기동을 하다가, 적 함대의 중간 부분을 가로지르며 잘라 먹기를 하곤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간 부분을 잘라서 적 함대의 약 2/3만 쌈싸 먹으면, 쌈 밖에 있는 적의 함대 1/3은 바람의 방향 등으로 인해 전투에 적극적인 참여를 못하게 되므로 적의 수자가 줄어드는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먼저 적 함대의 2/3를 괴멸시키고 나면, 나머지 1/3은 대다수의 아군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도망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Patrick O'Brian의 Aubrey-Maturin 시리즈를 보면 주인공인 잭 오브리 함장이 넬슨이 했다는 이 말을 인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요. 

"Never mind manoeuvres, go straight at 'em."  (함대 기동 같은 건 신경쓰지 말게.  그냥 돌격 앞으로.)




(이 Fortune of War 편에서, 영국 해군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기동은 신경쓰지 않고 그냥 돌격' 했다가 미해군에게 탈탈 털립니다.)



이것만 보면 넬슨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닥치고 돌격 앞으로' 전법을 맹신하는 지휘관처럼 보입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위와 같이 이야기했던 것은 적 함대의 전열을 적절한 곳에서 잘라먹는다는 확고한 전략이 함대 내 모든 함장들에게 잘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특히 저 위의 말은, 그렇게 전열을 잘라먹기 위해 돌격할 때는 필연적으로 적의 포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지만, 그를 무시하고 일단 무조건 신속히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아부키르 만에는 적의 함대가 해안가에 붙어서 일렬로 늘어서 아예 닻을 내리고 있었으므로, 넬슨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적의 함대의 선두 쪽에서 거의 평행으로 접근하다가 자신들도 닻을 내리고 적과 교전할 작정이었습니다.  다만, 적의 전체 함대와 1대1로 교전할 생각은 없었지요.  즉 적의 함대 후미까지 전진하지 않고 적 함대 선두부터 중간까지에 차례로 닻을 내리고, 이쪽 전함 2척이 적 전함 1척씩을 맡아서 싸울 작정이었지요.  상대할 적이 없는 적 함대의 후미에 있는 전함들은 바람이 불어가는 쪽(leeward)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함대 선두 및 중앙부의 아군을 돕기 위해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맞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은 넓은 바다에서도 그렇게 쉬운 기동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일렬로 서서 해안가에 바짝 붙어있기만 하면 어느 정도 효율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브뤼예의 전술은 정말로 초보적인 실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저 빨간 사각형 안이 프랑스 함대가 해안선을 등지고 늘어섰던 곳입니다.)



브뤼예의 미숙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날 전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밤중에 탈출극을 벌일 작정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은데, 그는 전함들에게 스프링을 설치하는 대신, 그냥 닻줄을 선수 쪽에 하나씩만 내리라는 안이한 명령만 내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스프링이 뭐냐고요 ?  그건 대가 C. S. Forester의 글을 통해서 배워 보시지요.




Hornblower in the West Indies by C. S. Forester (배경: 1821년 베네주엘라 연안) ---------------

(복잡한 정치적 사정에 의해서, 혼블로워 제독이 탄 영국 해군 프리깃함 1척이 스페인 및 네덜란드 해군의 프리깃함 2척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혼블로워가 말했다. "토마스 경, 배 양쪽의 뒤쪽 현창을 통해 케이블에 스프링을 달아주면 고맙겠소."

"스프링을요, 자작님 ?  알겠습니다.  자작님."

뒤쪽 현창을 통해 닻줄에 케이블이 연결되었다.  이로써, 캡스턴(capstan, 닻이나 무거운 짐을 감아올리기 위해 돌리는, 갑판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바퀴살 같은 장치)을 통해 왼쪽 혹은 오른쪽 케이블을 당기면, 프리깃함의 선체를 회전시켜 포문을 어느 방향이든 원하는 쪽으로 향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혼블로워가 최근 항해를 통해 그의 선원들을 단련시킨 많은 훈련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 작업은 수병들이 잘 조직된 중노동을 수행해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명령들이 큰 소리로 외쳐졌고, 준위들과 하사관들이 각자 맡은 수병들을 이끌고 케이블을 들어내어 후미 쪽으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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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스프링이라는 것은 배의 양현에 내린 닻줄에 추가로 밧줄을 달아, 그걸 잡아 당김으로써 정박한 배가 좌우로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위 소설 속에서 보시듯이, 정박한 상태로 배의 포문들이 집중된 옆면(broadside)을 원하는 방향으로 들이대기 위해서지요.  당시 군함의 포는 그 구조 때문에 좌우로 20도 정도 밖에 회전을 못했거든요.  따라서 이렇게 스프링 장치도 없이 정박해 있다가, 적함이 자기 포문의 약 45도 정도에 비껴 서서 자리를 잡고 포격을 가해 온다면, 정말 속수무책으로 일방적인 폭행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영국 함대는 넬슨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함대에 접근하는 동안 이미 스프링 밧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범선들의 대포는 모두 옆면, 즉 broadside에 있었기 때문에 적이 옆면에 있지 않다면 공격이 곤란했지요.)





게다가 브뤼예가 내린 명령 중, 그래도 쓸만 한 것이었던 명령, 즉 각 전함은 자신의 앞쪽 및 뒤쪽 전함과 굵은 밧줄을 연결하여 적함이 그 사이로 파고 드는 것을 방지하라는 명령의 실행을 감독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프랑스 전함들에서는 밧줄 연결을 해놓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 결정적인 미숙함이 더 있었습니다.  이는 사실 브뤼예의 미숙함이라기보다는,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의 역량의 차이가 너무 커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  이제 전투가 시작되니 함께 보시도록 하시지요.




(원래는 왼손은 도울 뿐이어야 하는데, 난 그냥 왼손으로 조팰 뿐...)



시간이 어느덧 오후 5시반이 되어 영국 함대가 진열을 제대로 갖추자, 넬슨은 갑자기 돛을 더 펴서 항진 속도를 높입니다.  비로소 영국 함대가 당장 전투를 벌일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브뤼예는 허겁지겁 스프링 밧줄을 준비할 것을 함대에게 명령합니다.  이때 프랑스 함대의 함장들은 아직 오리앙 호 함상에서 서로 갑논을박하며 작전회의를 하느라 각자의 전함에 돌아가지도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 함장들은 허겁지겁 보트를 내려 각자의 전함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대부분의 함장들은 자기 배로 돌아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넬슨은 돛을 완전히 펴고, 저녁 6시가 되자 비로소 영국 국기를 돛대에 올립니다.  당시 군함들은 정체를 감추기 위해 평소에는 국기를 올리지 않다가 전투 직전, 첫번째 포격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국기를 게양했습니다.  즉, 국기를 올렸다는 것은 전투를 시작한다는 신호였던 것이지요.  마침내 저녁 6시 20분, 영국 함대의 선두에서 쾌속으로 접근해오던 영국 전함 골리앗(Goliath) 호와 젤러스(Zealous) 호에게, 프랑스 함대 선두에 있던 게리에(Guerrier) 호와 콩퀘랑(Conquérant) 호가 첫 발포를 시작하며, 아부키르 해전이 시작됩니다. 

아부키르 만 북쪽 해안을 스치듯이 내달리며 프랑스 함대의 북쪽 끝, 그러니까 프랑스 함대의 선두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던 영국 함대의 선봉 골리앗 호에게는 좌우 양쪽에서 포탄이 날아왔습니다.  물론 좌측에서 날아오는 포탄은 프랑스 함대의 게리에와 콩퀘랑에서 날아오는 것이었고, 우측에서 날아오는 것은 브뤼예가 철통 방어선을 구축한답시고 아부키르 만 입구에 있는 작은 섬 (후에 넬슨 섬이라고 영국인들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였습니다만)에 설치한 포대(4문의 대포와 1문의 박격포)에서 날아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포화가 그다지 격렬하지도 않았고, 또 주로 너무 높게 날아와서 명중탄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프랑스 해군의 포격 솜씨는 느리고 너무 높게 조준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거든요.  ( 나폴레옹 시대의 해전 참조) 




(저 그림 오른쪽의 섬이 넬슨 섬이고, 거기에서 불을 뿜던 프랑스군 포대는 전투가 끝난 뒤 영국 해군이 상륙하자 곧장 저항없이 항복했습니다.  애초에 74문짜리 전함들에게 대포 4문과 박격포 1문 정도는 뭐 모기가 무는 정도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넬슨의 말처럼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그냥 마구잡이로 달려가던 골리앗 호의 함장 폴리(Thomas Foley)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습니다.  바로 간격이었지요.  무슨 간격이냐고요 ?  위에서 언급하다 말았더 브뤼예, 아니 프랑스 해군의 미숙함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즉, 프랑스 함대 선두인 게리에 호와 해안선 사이의 간격이었습니다.  원래 브뤼예 제독의 방어 전술의 핵심은 해안선에 바싹 배를 붙여 놓고 저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싸움꾼들이 주먹 싸움을 벌일 때, 수적으로 열세라면 등이 노출되지 않도록 벽에 기대서서 싸우쟎습니까 ?  그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함대는 자신의 역량이 떨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정신없이 좌우 양쪽에서 영국 전함들이 달려들면 불리하다고 보고, 오로지 우현쪽에만 신경쓰면 되도록 전함의 좌현을 해안선에 바싹 붙여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해군의 눈에 '이 정도의 간격이라면 74문 짜리 전함이 감히 파고 들지 못할 정도로 좁겠지'라고 판단될 정도의 간격이, 노련한 영국 해군의 눈에는 '충분히 파고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인데' 라고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폴리 함장은 이날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을 독단으로 내립니다.  즉,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눈 앞에 보이는 프랑스 함대 전열의 왼쪽, 그러니까 바다 쪽 방면으로 선회하여 게리에 호의 우현에 닻을 내리고 교전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사실 영국 전함 2척이 프랑스 전함 1척을 상대하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았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게리에 호의 선수 부분과 해안선 사이에 (영국 해군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넓어보이는) 간격이 보였던 것입니다.  폴리 함장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서 게리에 호의 왼쪽이 아닌 오른쪽, 그러니까 해안선 쪽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면, 영국 전함들은 프랑스 전함의 좌현과 우현에서 1척씩 자리를 잡고 정말 2대1의 일방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투 개시 몇시간 뒤의 모습입니다...)



폴리 함장의 결정은 사실 꽤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니 멋대로 하느냐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영국 함대는 아부키르 만의 해저가 얼마나 얕은지 암초가 혹시 숨겨져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상선에서 입수한, 손으로 개발새발 그린 해도 하나와, 아주 오래 전에 영국에서 출판된 해도 하나, 그리고 35년 묵은 프랑스 해도 한장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육지와 인접한 좁은 바다길로 용감하게 달려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로 이 부분이 영국 해군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영국 해군에는 딱딱한 규정이나 명령 등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지휘관이 역량을 발휘하여 중대 결정을 현장에서 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단 넬슨만 해도 앞서 말씀드린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총사령관인 저비스 제독의 전열에서 제멋대로 이탈하여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훗날 1801년 코펜하겐 해전에서도, 넬슨은 함대를 철수시키라는 총사령관 파커 제독(Admiral Sir Hyde Parker)의 신호 깃발을 향한 망원경에 자신의 애꾸눈을 들이대고는 '내게는 신호가 보이지 않는구만' 이라고 하며 계속 공격을 진행시킨 바 있지요.  모든 경우에, 결과가 좋으면 해당 지휘관은 그에 대해 칭송을 받는 분위기였습니다.  폴리 함장이 무엇을 하려는지 내다 본 나머지 영국 함대, 즉 그 뒤를 따르던 젤러스(Zealous) 호나 오라이언(Orion) 호, 오데이셔스(Audacious) 호, 그리고 테세우스(Theseus) 호의 5척은 모두 골리앗의 뒤를 따라 프랑스 함대와 해안선 사이로 침투합니다.




(넬슨의 망원경 드립으로 유명한 제1차 코펜하겐 해전입니다.)



이는 영국 해군의 지휘 체계가 개판이라기보다는, 급변하는 전황 속에서 당시의 열악한 통신 체계를 극복하려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는 원칙이 존중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기민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휘관들만 뽑아서 전장에 데리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았다는 것이 영국 해군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골리앗 호의 이 기동은 원래 넬슨의 계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폴리 함장의 독단적인 결정이다라는 논쟁이 좀 있습니다만, 글쎄요, 넬슨이 제 아무리 바다의 신이라고 해도 그 먼 곳의 현장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을 것 같군요.

어쨌거나 골리앗 호는 게리에 호의 선수를 돌아 게리에 호의 우현쪽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물론 선수를 통과할 때 얌전히 통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raking 위치였거든요.  이때를 위해 대포알을 하나가 아니라 두개씩 쟁여 넣어두었던 골리앗 호의 좌현 포문은 게리에 호의 선수를 직각으로 통과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영점거리에서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와 함께 갑판에서는 붉은 제복의 로열 마린(Royal Marines, 해병대)의 머스켓이 일제 사격을 시작했고요.  이 일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게리에 호는 아직 함장인 트륄레(Jean-François-Timothée Trullet)조차 오리앙 호의 함장 회의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골리앗 호는 게리에 호의 우현에 닻을 내리고 롤스로이스처럼 부드럽게 정지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실상은 3.1절 새벽에 질주하는 폭주족처럼 미끄러지며 게리에 호를 완전히 지나쳐 그 뒤에 있던 프랑스 전함 콩퀘랑(Conquérant) 호의 선수 근처에서야 멈춰설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골리앗 호는 콩퀘랑과 툭탁툭탁 포격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골리앗 호가 찜해두었던 자리, 즉 게리에 호의 우현 자리는 그 뒤를 따르던 영국 전함 젤러스(Zealous) 호의 차지가 됩니다.  물론 골리앗 뒤를 따르던 젤러스도 게리에의 선수 부분, 즉 raking 위치를 지나갈 때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고, 끔찍한 raking 포격을 퍼붓고 지나갔으니, 게리에 호는 프랑스 함대 중 가장 먼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아예 게리에 옆에 닻을 내리고 자리를 잡은 젤러스 호는 게리에를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었습니다.  게리에 호는 자신의 우현, 그러니까 바다 쪽에서만 적이 올 줄 알고, 아예 좌현 쪽의 포문 쪽에는 이런저런 짐짝을 쌓아 놓아서 포문을 열 수조차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프랑스 함대의 선두부를 휘돌아 raking fire를 포붓는 골리앗,  저 오른쪽에서 대포를 쏘고 있는 조그마한 프리깃은 프랑스의 세리외즈 Sérieuse 호입니다.  원래 이런 함대 전투에서 전함은 적 프리깃함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처럼 적 프리깃함이 먼저 아군 전함에게 발포하는 경우는 예외지요.  당연히 저 세리외즈 호는 오라이언의 일제 사격 한방에 완전히 박살이 나서 표류하는 상태가 되버립니다.)



프랑스 함대와 해안선 사이로 침투해 들어간 영국 전함들은 모두 차례로 프랑스 함대 선두의 전함들 옆에 닻을 내리고 침착하지만 무자비하게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가령 테세우스 호는 프랑스 전함 스파르시아트(Spartiate) 호 옆에 닻을 내렸고, 오라이언 호는 푀프 수브랑(Peuple Souverain) 호와 프랭클린(Franklin) 호 사이에 닻을 내리고는 이 두 전함을 동시에 상대했습니다.  오데이셔스 호는 아예 게리에 호와 콩퀘랑 호 사이에 코를 쳐박고, 좌현 포문으로는 콩퀘랑 호의 선수 부분을, 우현 포문으로는 게리에 호의 선미 부분에 raking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프랑스 함대 선두부는 궤멸 상태였습니다.  사실 오데이셔스 호가 게리에와 콩퀘랑 사이에 자리를 잡고 raking을 시도한 것은 승전의 환희 속에서도 궁시렁궁시렁 욕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완전히 승부가 날 정도로 다 부서진 두 적함 사이에 굳이 파고 들어가서 그렇게 이미 기절한 적 위에 올라타고 앉아 파운딩(pounding) 주먹질을 할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지요.  차라리 아직 건드리지 않은 프랑스 함대 중앙부 쪽을 공격했었어야 한다는 비난이었습니다. 




(오라이언 호의 함장 소머레즈입니다.  그도 이 아부키르 해전에서 발생한 부상자 중 하나였지요.  이때 참전한 대부분의 함장들이 그랬듯이, 소머레즈도 나중에 당연히 제독도 되고 기사 작위도 받고 귀족 작위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오데이셔스 호를 지휘했던 굴드 함장은 기사 작위와 제독 지위에는 올랐지만, 결국 귀족 작위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용감하기는 하지만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하지만 영국 함대의 주력은 아직 전투를 개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 다음 영국 전함은 바로 넬슨이 탄 기함 뱅가드(HMS Vanguard) 호였는데, 뱅가드 호부터는 굳이 프랑스 함대와 해안가 사이를 파고 들지 않고 원래 의도대로 프랑스 함대의 우현 쪽, 그러니까 열린 대양 쪽으로 접근했습니다.  원래 골리앗이 굳이 프랑스 함대와 해안가 사이로 파고 들었던 이유는 프랑스 전함의 좌현과 우현에서 영국 전함이 1척씩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 공격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프랑스 함대 선두 부분은 이미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HMS 뱅가드 호는 게리에나 콩퀘랑은 내버려두고 스파르시아트 호를 맡았고, 그 뒤를 따르던 HMS 미노타우어(Minotaur) 호는 아직 건드리지 않았던 프랑스 전함 아퀼론 (Aquilon) 호를, HMS 디펜스(Defence) 호는 푀프 수브랑(Peuple Souverain) 호를 맡아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함대 선두부는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벌집투성이가 되어 갔습니다. 




(미노타우어 호는 후에 트라팔가 해전과 제2차 코펜하겐 전투에도 참여했으나, 1810년 그만 네덜란드 근해에서 난파되고 맙니다.)



문제는 그 다음의 영국 전함들이었습니다.  HMS 벨레러폰(Bellerophon) 호와 HMS 머제스틱(Majestic) 호는 이미 난장판이었던 프랑스 함대 선두부를 그대로 지나쳐 아직 교전을 시작하지 않은 중앙부를 노렸습니다.  벨레로폰 호는 어정쩡하게 좌현에 있는 오라이언 호와 교전 중이던 프랑스의 프랭클린(Franklin) 호 우현에 닻을 내리려고 했습니다만, 역시 제동을 제대로 못 걸고 미끄려지는 바람에 약간 더 밀려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프랑스 함대의 자랑인 120문 짜리 1급함 오리앙 호가 있었습니다.  머제스틱 호도 역시 닻을 제대로 못 내리고 미끄러져 버렸는데, 그러다보니 아직 교전 상대를 찾지 못한 프랑스의 80문 짜리 전함 토낭(Tonnant) 호까지 떠내려가 토낭 호와 돛줄이 엉키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토낭과 그 다음에 있던 외르(Heureux) 호의 집중 공격을 받아야 했지요.  원래 계획으로는 영국:프랑스 = 2:1의 싸움을 해야 했었는데, 반대로 1:2의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머제스틱 호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함장인 웨스트캇(George Blangdon Westcott)마저 전사합니다. 

벨레로폰도 원래 계획에 따르면 3:1로 싸우기로 했던 120문 짜리 1급함 오리앙 호를 1:1로 상대하려니 애로 사항이 많았습니다.  벨레로폰은 오리앙의 집중 사격을 받고 중앙 돛대와 뒷 돛대, 그러니까 3개의 돛대 중 2개를 잃고 사상자도 200명에 달할 정도의 피해를 입습니다.  벨레로폰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는 닻줄을 끊고 그 자리를 뜨려고 했습니다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역시 강적인 토낭 호의 포격도 받게 되었습니다.  토낭의 공격에 하나 남은 앞돛대까지 꺾여버린 벨레로폰은 완전히 기동력을 잃고 포연이 자욱한 아부키르 만을 표류하는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오데이셔스가 이미 반쯤 기절한 게리에와 콩퀘랑을 괜히 두들겨 패느라 정작 필요한 곳에서 화력을 보태지 못한 점이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아부키르 전투 당시의 상황도... 쓸쓸히 떠내려가는 벨레로폰의 모습이 안타깝군요.)



영국 함대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벨레로폰 호보다도 오히려 더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는 전함이 있었습니다.  바로 HMS 컬로덴 (Culloden) 호였습니다.  영국 함대의 전열함 중에서는 마지막 배였던 컬로덴 호는 해안선에 너무 바싹 붙어 항해를 하다가, (애초에 프랑스 해군이 원했던 것처럼) 넬슨 섬의 모래톱에 그만 덜컥 좌초를 하고 만 것입니다.  갑자기 좌초가 되어버린지라, 돛대가 부러질만도 했지만 다행히 그렇게는 안되었습니다.  돛대라는 것이 사실 튼튼하게 고정된 물건이 아니고 shroud라고 하는 돛대 밧줄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라, 고속으로 항해하다가 갑자기 좌초가 되면 바람의 힘 때문에 덜컥 부러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러나 워낙 쾌속으로 항진하다가 좌초된지라, 함체가 모래톱에 깊히 박히는 바람에 보트들을 내려 아무리 용을 써서 끌어내려고 해도 다시 물에 띄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50문짜리 4급함인 HMS 리앤더(Leander) 호와 작은 브릭함(brig)인 Mutine(뮤틴) 호까지 가세히여 끌어보았습니다만, 컬로덴 호는 파도에 밀려 점점 더 깊이 모래톱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컬로덴 호의 이날 활약은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제 막 축구 시즌 시작되었는데, 개막전도 하기 전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선수라고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영국 함대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먼저 제일 먼저 일방적 집중 폭행 대상이 되었던 프랑스 선두함들은 밤 9시경 결국 항복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영국 전함들이 다 한번씩 '담그고' 지나간 콩퀘랑 호는 이미 저녁 7시 경에는 3개의 돛대를 모두 잃고 완전히 앉은뱅이 오리가 되어 있었고, 그 함장인 달바라드(Etienne Dalbarade)도 치명상을 입고 있던 터라, 가장 먼저 항복해야 했습니다.  게리에 호는 좀더 오래 버티어 선체가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 투성이가 되도록 밤 9시까지는 항복하지 않고 버텼으나, 젤러스 호에서 보트를 보내 육박전을 벌이려 하자 마침내 항복했습니다.  이 젤러스 호에서는 영국 해군측 사상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까 언급되었다시피, 게리에 호의 우현 포문들은 이런저런 짐짝으로 막혀 있었던데다, 젤러스 호의 함장 후드(Samuel Hood, 툴롱 포위전 때의 그 유명한 후드 제독의 사촌 동생입니다)는 교묘하게 게리에 호의 포문 밖에 젤러스 호를 정박시켰기 때문에, 게리에와 젤러스의 교전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 폭행에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게리에의 함장 트륄레는 애초에 일찍 항복했었어야 하는데, 그저 자존심 때문에 항복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 뿐이지요.  프랑스 함대에 그놈의 스프링만 미리 준비를 해놓았다면 이런 결과까지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게리에와 콩퀘랑이 항복하자, 그들에게 무자비한, 그러나 무의미한 폭행을 퍼붓던 오데이셔스 호는 (프랑스 함대와는 달리) 스프링 시스템을 이용하여 얄밉게도 자유자재로 선체를 회전시켜 이번에는 콩퀘랑의 꼬리 쪽에 위치한 스파르시아트 호에게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스파르시아트는 이제 테세우스, 뱅가드에 이어 오데이셔스까지 1:3의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돛대 3개를 모두 잃은 스파르시아트의 함장 에머리오(Maurice-Julien Emeriau)도 큰 부상을 입었고, 그는 결국 밤 9시를 넘겨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넬슨의 마빡을 강타했던 랭그리지 포탄)



스파르시아트는 사실 1대3이라기보다는 1.2대3의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뒤의 아퀼론 호가 약간 도와주고 있었거든요.  아퀼론 호는 프랑스 함대의 선두에 있던 전함들 중 유일하게 영국 해군 미노타우어와 1대1의 공정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아퀼론 호는 다른 프랑스 전함들과는 달리 재빨리 스프링 밧줄을 갖출 수 있어서, 이를 이용하여 넬슨의 기함 뱅가드 호에 raking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뱅가드 호는 이 포격으로 1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는데, 넬슨 자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저녁 8시 30분 경, 아퀼론에서 발사한 랭그리지 포탄 (langrage, 낡은 쇠막대기 여러개를 밧줄로 묶거나 주머니에 넣어 쏘는 포탄.  주로 적함의 돛줄을 끊기 위해 사용됨)이 파편 하나가 넬슨의 이미 시력을 잃은 오른쪽 눈 위를 강타한 것입니다. 




(아퀼론의 회심의 일격에 마빡을 얻어맞고 쓰러지는 넬슨.  실제로 그는 마침 옆에 있던 에드워드 베리 함장의 품 안에 넘어졌다고 합니다.)


넬슨은 전투 시작 전 식사 자리에서 부하 장교들에게 "내일 이 시간이면 난 귀족 작위를 얻던가 아니면 웨스트민스터 국립묘지의 한자리를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데, 이 파편이 제대로 맞았다면 정말 웨스트민스터로 갈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살짝 비껴 맞았는지 두개골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이마의 피부 가죽이 길게 벗겨져 얼굴을 덮는 바람에 완전히 시야가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넬슨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여, "으아아 나 죽는다, 내 와이프에게 안부를 전해줘 !" 하며 소리를 지르고 목사를 불러오라고 했으나, 군의관이 먼저 와서 그냥 가죽만 상했다고 말해주며 벗겨져 매달린 이마의 피부를 꿰메어 주었습니다.  그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면 겁도 날 만한데, 넬슨은 주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탄과 포탄, 각종 파편이 난무하는 갑판 위로 다시 나와 전투를 계속 지휘했습니다.  덕택에 넬슨도 조금 후 오리앙 호가 대폭발을 일으키는 장관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이마에 붕대를 감고 오리앙의 폭발을 지켜보는 넬슨 제독)



넬슨에게 이런 봉변을 안겨준 스파르시아트는 혹독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함체를 돌려 뱅가드에게 raking 포격을 가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로 인해 자신의 선수 부분이 미노타우어 호의 raking 위치에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물론 미노타우어 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미노타우어의 포격으로 스파르시아트는 돛대들을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용감한 함장인 테브나르(Antoine René Thévenard)까지 전사해버렸습니다.  남은 장교들은 기가 꺾여 9시 30분 경 항복합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미노타우어가 다시 그 뒤에 있던 프랭클린 호를 목표로 삼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전함들이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될 때마다, 남아 있는 프랑스 전함들의 처지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이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오데이셔스 호의 기동 경로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잠깐, 저 전투 상황도를 보면 스파르시아트 다음은 푀프 수브랑(Peuple Souverain)이지 프랭클린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미노타우어는 푀프 수브랑을 건너 뛰었을까요 ?  그건 푀프 수브랑이 더 참혹한 꼴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왼쪽에서는 오라이언, 오른쪽에서는 디펜스의 샌드위치 공격을 받던 푀프 수브랑은 대번에 앞돛대와 중앙 돛대를 잃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샌드위치 공격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푀프 수브랑은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생각으로, 닻줄을 끊고 힘없이 떠내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둠 속을 떠내려가던 푀프 수브랑을, 같은 프랑스 함대의 오리앙 호가 적함으로 오인하고 포격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푀프 수브랑은 조금 더 떠내려 간 뒤 다시 닻을 내렸지만, 그것으로 그의 활약은 끝이었습니다.  푀프 수브랑은 그날 밤 늦게까지 힘없이 앉아있다가 결국 항복합니다.  

한편, 블랑케(Blanquet) 제독의 기함인 프랭클린도 영국 전함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고전했습니다.  블랑케 제독과 길레(Gillet) 함장 모두 심한 부상을 입고 갑판 아래로 실려간 상태에서도, 프랭클린은 오리앙 호의 폭발 뒤에도 항복하지 않고 그야말로 끝까지 분전합니다. 




(운명의 오리앙...)



이제 운명의 오리앙 호 순서입니다.  오리앙 호도 사정이 그다지 좋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겁없이 혼자서 덤벼든 영국 전함 벨레로폰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는 했습니다만, 벨레로폰도 오리앙 호를 심하게 물고 지나갔던 것입니다.  특히 프랑스 함대의 총사령관인 브뤼예 제독은 대포알의 직격탄을 허리에 비껴 맞고, 거의 허리가 두동강이 나는 끔찍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의 부상이면 사람이 죽는게 정상인데, 그런 끔찍한 상태에서도 브뤼예 제독은 기절조차 하지 않고 살아서 말도 하고 갑판 아래의 병실로 옮겨지는 것도 거부하여 그렇쟎아도 겁에 질린 부하들을 더욱 질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브뤼예 제독을 위해서나 그 부하들을 위해서나, 다행스럽게도 15분 뒤 브뤼예 제독은 숨을 거둡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리앙 호의 함장인 카사비앙카(Luc-Julien-Joseph Casabianca) 함장은 나무 파편에 얼굴을 얻어맞고 기절했고, 그 옆에 서있던 그의 12살짜리 아들은 대포알에 다리를 직격 당하여 다리가 잘려져 나가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상황은 프랑스 함대에 점점 더 안좋게 돌아갔습니다.  좌초한 컬로덴 호를 끌어보려고 용을 쓰던 50문짜리 4급함 리앤더 호가 마침내 컬로덴 호를 포기하고 난전 속으로 뛰어들어 프랭클린과 오리앙에게 raking 포격을 퍼부었고, 또 다소 뒤쳐졌던 영국 전함들인 HMS 스위프트슈어(Swiftsure) 호와 HMS 알렉산더(Alexander) 호도 도착하여 오리앙과 프랭클린을 난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 함대의 후미부, 그러니까 남쪽에 있던 전함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메르퀴르(Mercure), 귀욤 텔(Guillaume Tell), 제네로(Généreux)와 티몰레옹(Timoléon)은 모두 강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도 어찌할 수가 없었지요.  북쪽으로 올라가 아군을 도우려면, 바람과 조수의 방향을 거슬러 가야 하는데, 가뜩이나 미숙한 프랑스 수병들이, 그것도 인원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게다가 그 좁은 공간에서 그런 어려운 기동을 해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 것은, 바람과 조수의 방향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너무나도 기초적인 사실을 간과한 브뤼예 제독 이하 프랑스 지휘부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파국이 다가옵니다.  밤 9시 경, 오리앙 호 하갑판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오리앙 호는 최근에 페인트칠을 새로 했기 때문에, 아마도 하갑판에 저장해둔 페인트에 불이 붙은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요.  스위프트슈어의 함장 할로웰(Benjamin Hallowell)은 그 화재 발생 지점을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을 것을 지시합니다.  불을 끄려는 프랑스 수병들을 살상시켜, 화재가 더욱 번지게 만드려는 것이었지요. (어찌 보면 비열한 수작 같기도 하고...) 곧 불길이 번져 오리앙의 돛까지 불이 붙을 정도가 되자, 그 근처에 있던 영국 전함들(스위프트슈어, 알렉산더, 오라이언)은 닻을 올리고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군함이 그렇게 화염에 휩싸인다는 것은, 곧 화약고가 폭발할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은 아예 포격도 중지하고 수병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돛과 갑판에 바닷물을 뿌려댔습니다.  오리앙이 폭발할 때 불붙은 파편들이 튀어서 불이 옮겨 붙을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영국 전함들 뿐만 아니라, 그 인근의 프랑스 전함들(토낭, 외르, 메르퀴르)도 닻줄을 자르고 불타는 오리앙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돛대가 그대로 서있는 것을 보니, 이건 아마 폭발 직전의 오리앙 같습니다 ?)



그리고는 화재가 발생한지 약 1시간 뒤, 밤 10시 경 마침내 엄청난 폭발이 아부키르 만을 수놓습니다.  이 대폭발로 인해 영국 전함 스위프트슈어와 알렉산더에 불붙은 파편이 떨어져 화재가 발생했지만 곧 진화되었습니다.  프랑스 측에서는 프랭클린에 역시 파편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작은 2차 폭발까지 발생할 정도였습니다만, 결국 진화되었습니다.  20세기 이후 고고학자들이 아부키르 만에서 수행한 해저 조사에 따르면, 오리앙 호의 파편은 반경 500m까지 날아갈 정도로 폭발이 대단했으며, 또 하나의 폭발이 아니라 연속된 두번의 폭발로 파괴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오리앙 호의 수병들도 다가오는 운명을 예상하고 배를 탈출하려 수백명이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구조된 것은 7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오리앙 호에 같이 있던 강톰 (Ganteaume) 제독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헤엄을 쳐서 해안에 도착한 몇 안되는 생존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머지 거의 1천명의 수병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카사비앙카 함장의 다리를 잃은 어린 아들도 속절없이 죽었지요.




(대폭발 !!)



폭발의 위력과 그 참극에 다들 넋이 빠져, 그 후 10분 동안은 잠시 의도하지 않은 휴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10시 10분, 정말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프랭클린 호에서 다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다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이미 전체 승무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상자를 낸 프랭클린은, 스위프트슈어와 디펜스의 협공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하지요.   토낭도 끝까지 머제스틱과 스위프트슈어를 상대로 끝까지 분전합니다만, 결국 새벽 3시 즈음 모든 돛대를 잃고 만신창이가 됩니다.  토낭의 함장이자 임시제독(Commodore)인 투와르(Aristide Aubert Du Petit Thouars)는 아마 프랑스 지휘관 중 가장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다리가 모두 잘려져나가고 한쪽 팔도 잃은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지휘권을 넘기고 병실로 가지 않고, 피를 흡수하도록 밀낟알을 담은 통에 몸을 세우고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특히 그는 혹시 포격에 프랑스 국기엔 삼색기가 떨어져 나갈까 봐, 아예 삼색기를 남은 돛대 그루터기에 못질을 하여 고정시키고 전투를 계속 했습니다.  원래 당시 전투에서 국기를 내린다는 것을 'strike colors'라고 하여, 항복의 표시로 사용했거든요.  그런데 가끔 (실은 자주) 포격에 돛대나 국기가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있었고, 그것이 항복 의사로 오인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항복 의사 표시는 이쪽에게나 저쪽에게나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지요.  항복한다고 해놓고 계속 대포를 쏘는 것은 신사도를 무척이나 중요시했던 당시 전장에서 무척 뻘쯤한 일이었고, 또 저쪽이 항복했다고 좋아하던 이쪽 입장에서도, 계속 대포알이 날아오면 무척이나 화가 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군함들은 원래 1장만 달아도 되는 국기를, 전투에 들어갈 때는 가능한 여러개 휘날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아부키르 만 해전처럼 격렬한 전투에서는 모든 돛대가 다 부러지는 일도 종종 일어났습니다. 




(부러진 돛대에 삼색기를 못박아 놓은 토낭의 분전입니다.  뒤에 보이는 영국 전함은 HMS 머제스틱입니다.)



새벽 4시 경에 토낭이 이렇게 처절한 분전을 벌이며 서서히 프랑스 함대 후미 쪽으로 떠내려 오자, 여태껏 잘 맞지도 않는 원거리 포격만 가끔씩 날리며,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프랑스 함대 후미부의 전함들도 비로소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빌뇌브 (Pierre-Charles Villeneuve) 제독이 지휘하는 이 후미부 전함 3척(Guillaume Tell, Généreux, Timoléon)과 토낭은 토낭을 쫓아, 사실 쫓는다기 보다는 역시 돛대를 대부분 상실하고 토낭과 함께 떠내려온 영국 전함 머제스틱과 알렉산더를 상대로 4대2의 수적 우세 속에서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본 영국 전함 골리앗과 테세우스가 또 달려오는 바람에 금방 다시 수세에 몰렸습니다.  특히 테세우스는 이렇게 후미부를 향해 내려오는 도중 감히 프리깃 주제에 74문짜리 3급 전함 테세우스에게 포문을 연 건방진 프랑스 프리깃함 아르테미스(Artémise)를 손봐주었습니다.  아르테미스에서는 테세우스가 포문을 자기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어차피 되지도 않을 싸움'이라며 항복의 표시로 깃발을 내리고는, 보트를 내려 해안으로 도주하며 배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 불로 인해 아르테미스도 결국 화약고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이 광경까지 본 빌뇌브는 (희한하게도 불은 어른이나 애들에게나 묘한 심리적 효과를 내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포격을 가하면서도 닻줄을 끊고 동쪽, 그러니까 먼 바다 쪽으로 도주를 시작합니다.  물론 이미 돛대를 모두 상실하고, 또 용감한 투와르 함장도 밀낟알 통 속에 피를 있는 대로 다 쏟고 결국 사망해버린 토낭은 탈출의 대열에 끼지 못했습니다.  가장 남쪽에 있던 티몰레온 호는 영국 함대를 피해 탈출하기가 좀 어려워 해안 가까이를 돌아 탈출하려다가 결국 좌초하고 맙니다.  결국 남아 있는 프랑스 함대 중 탈출에 성공한 것은 빌뇌브 휘하의 귀욤 텔(Guillaume Tell)과 제네로(Généreux), 그리고 프리깃함인 쥐스티스(Justice)와 디앤느(Diane) 4척 뿐이었습니다.  이들의 뒤를 집요한 젤러스 호가 혼자서 끝까지 추적했으나, 결국 도망치는 개는 건드리면 안된다고 도주하는 귀욤 텔과 제네로의 집중 포격을 받고는 결국 추적에 실패합니다.  




(나일강에서 프랑스 악어를 잡아서 끌고온 넬슨.  당시 만화입니다.)



결국 전투는 8월 1일 저녁부터 시작되어 8월 2일 아침에야 끝이 납니다.  8월 2일 하루 동안 나포한 프랑스 전함들을 손보고 포로를 처리하고, 또 좌초한 컬로덴 호의 수리에 정신이 없던 영국 함대는, 거의 난파된 상태로 아부키르 만에 남겨진 토낭과 티몰레온이 아직도 항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워낙 다른 일이 바빴던 지라, 이들의 항복은 8월 3일에야 받아냅니다.  다른 배들로부터 헤엄쳐온 프랑스 수병들까지 합해 무려 1,600명이나 타고 있던 토낭은 즉각 항복했지만, 사실상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티몰레온은 아직 기운이 남았는지 배에 불을 지르고는 보트를 내려 해안으로 탈출합니다.  티몰레온은 결국 정오 쯤 화약고 유폭으로 폭발합니다.  토낭에서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냐고요 ?  갑판 위에 묶어놓았던 보트들이 모두 포격에 부서져버려, 탈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롬써 일단 아부키르 해전은 종료됩니다.  다음주에는 그 후일담을 그린 에필로그 편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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