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빵이냐 콩이냐, 이집트에서의 고뇌

by nasica-old 2011. 5. 2.
반응형

지난 편에 피라미드 전투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아부키르만 해전이 나올 것을 기대하셨을 (피에 굶주린) 여러분...  오늘은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이 먹고 사는 이야기입니다.

피라미드 전투는 사실 나폴레옹과 그 일당들에게 별로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프랑스군이 대단했다거나, 유럽의 강력한 무력이 돋보였다기보다는, 마멜룩 지휘자들의 무능력이 승패를 결정한 전투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마멜룩 전사들과의 전투에서 죽은 프랑스군 수자보다는, 사막의 행군에서 낙오되었다가 그 뒤를 밟던 베두인 유목민들에게 목숨을 잃은 프랑스군의 수자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건 아라비아의 로렌스 관련 삽화입니다만... 손에 볼트 액션식 소총 말고 플린트 락 머스켓을 쥐고 있다면 당시 베두인들의 모습과도 그리 다르지는 않겠습니다.)



엄격한 군대 행군에서 왠놈의 낙오자가 그리 많으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의외로 용변을 보기 위해 본대에서 좀 떨어졌다가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의 수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탁 트힌 허허벌판 사막에서는 몸을 가릴 곳이 없는지라, 아무래도 남들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응아를 하기가 좀 거시기했던 병사들이 많았나 봅니다.  특히 장교들은 병사들 앞에서 함부로 엉덩이를 까기가 더욱 좀 곤란했으므로, 그런 이유로 잡혀간 장교들의 수가 좀 되었나 봅니다.  나폴레옹이 특별히 아끼던 젊은 장교 데스나노(Desnanots)도 이런 이유로 약간 뒤쳐졌다가 그만 베두인들에게 포로로 잡혀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평소와 달리 스페인 은화 500 피아스터(piaster)를 꺼내주며 몸값을 내고 데스나노를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젊은 장교는 베두인 족장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이유가 또 재미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사자가 들고간 은화가 1 파이스터짜리 500개가 아니었는지, 그 개수가 베두인 족들 모두에게 돌아가기엔 불충분하자, 베두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두인 족장이 권총을 꺼내들고 데스나노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뒤, 은화를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방법은 거칠지만, 장사는 공평하게.  물건이 상했으면 돈을 받지 않습니다.)



물론 베두인보다 더 많은 프랑스군을 죽인 것은 바로 사막 그 자체, 즉 갈증과 배고픔이었습니다.  갈증에 대해서야 지난 편에 상세히 썼으니 그만 하고, 이번에는 좀더 현실적인 문제, 즉 프랑스군의 이집트 침공 초기에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시지요.

먼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하여 사막을 가로질렀던 프랑스군은 사실 목이 마를 이유는 있었어도 배가 고플 이유는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자마자,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했던 것처럼 속도전을 펼치고자, 서둘러 병사들을 출발시키면서 모두에게 2~3일분의 비스킷을 배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스킷이 있는데 왜 병사들이 배가 고파야 했을까요 ?

여기 그에 대해서 말해주는 생생한 체험담이 하나 있습니다.  비고-루시옹(Vigo-Roussillon)이라는 이름의 척탄병이 하나 있었는데, 이 병사는 이탈리아 방면군 출신으로서 로디 전투에도 참전하여 그 생생한 전투 신을 묘사한 비망록을 남긴 바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는데, 그는 나폴레옹의 준비 부족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 폐위 후에 쓴 비망록인가 봅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지급한 비스킷이 상해버려서 먹을 수가 없었고, 또 이집트에는 풍차도 물레방아도 없어서, 가는 곳곳마다 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나, 그것으로 빵을 구울 수가 없어서 병사들이 굶어야 했다고 썼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현지 조사를 미리 했다면, 병사들이 작은 맷돌이라도 들고 와서 빵을 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폴레옹을 비난했습니다.  물론 개인용 수통을 지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마구 헐뜯었지요.



(이런 물건이 사막에서 2~3일만에 상했다고요 ?)



하지만 이 비고-루시옹이라는 병사의 비난이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폐위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 관련 비망록을 썼지만, 대개는 그 진실성이 매우 의심되는 글들로 취급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나, 특히 비망록을 쓴 당사자들이 당시 정치 상황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은 나폴레옹과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 진짜 직접 목격자였지만,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거짓된 정보를 많이 써놓았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에서 온 남자  참조)

이 비고-루시옹이라는 병사의 기록도 사실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지급한 비스킷도 틀림없이 배에서 먹던 그 비스킷일텐데, 따뜻하고 습기찬 지중해에서 수개월을 묵혀도 (비록 바구미는 들끓더라도) 상하지 않는 물건이, 그 메마른 사막에서 불과 2~3일만에 상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비고-루시옹은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  아니, 그보다 왜 병사들은 배가 고파야 했을까요 ?

다른 기록을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병사들은 당시 말라붙은 운하를 따라 터벅터벅 걸으면서 뜨거운 태양에 지글지글 볶이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면 가뜩이나 힘든 행군이 더욱 힘들어지겠지요.  더군다나, 아무도 이 원정 목적지가 이집트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므로, 이 병사들의 군복은 유럽 기후에 알맞는 모직이었습니다.  결국 일부 병사들은 군복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벗어던지는 거, 가뜩이나 무겁고 또 지난 몇주간 질리도록 먹은 맛없고 딱딱한 비스킷도 사막에 내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배급량은 1인당 하루에 약 1파운드, 그러니까 약 450그램이었는데, 3일치면 한 1.35kg 정도 됩니다.  뭐 별거 아닌 무게일 수도 있지만 사막에서 덥고 목이 말라 검열때 무슨 일을 당할지 생각도 안하고 모직 군복을 내버릴 정도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내버려야 할 당위성을 제공할 정도의 무게지요.  또 프랑스 병사들은 이미 약탈에 익숙해져서, 곡창지대라는 이집트에서 설마 식량을 못 구하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옷은 면도 아니라 울이었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병사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고 나폴레옹의 생각과도 달리) 빵이 넘쳐나는 풍요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밀은 분명히 넘쳐 났습니다.  그러나 비고-루시옹의 증언대로, 대부분의 밀은 밀가루 형태가 아닌 낟알 형태였는데, 이를 빻아 가루로 만들 도구가 없었습니다.  이때 프랑스군과 동행했던 드 샤브롤(De Chabrol)이라는 학자는 이집트 국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이 학자의 결론에 따르면 이집트에 빵이나 밀가루가 없는 것은 연료 부족으로 인해서 빵은 부자들이나 먹는 귀한 식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집트인들의 태생적인 게으름 때문에, 밀가루를 대량으로 만들 풍차나 물레방아가 없다는 평가도 내렸습니다. 




(원시적인 손맷돌을 이용하여 밀을 갈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여인)



글쎄요, 이집트인들이 게으르다는 평가는 점령군으로서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만, 연료가 부족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맨 처음 프랑스군이 쳐들어왔을 때, 만나는 마을마다 주민들은 허겁지겁 가축과 귀중품을 챙겨 도주했는데, 그 귀중품 중에는 집의 대문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이집트와 같은 사막에서 나무라는 것은 굉장한 귀중품으로서, 나무를 연료로 태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거든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학사원을 창시하고 나서 첫 회합을 가졌을 때, 나폴레옹이 낸 연구 과제 6개 중에 2개가 빵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빵을 완벽하게 구울 수 있는가, 그리고 카이로에서 물레방아를 만드는 것이 좋을까 풍차를 만드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나머지 4가지 중 3가지도 상당히 실용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호프 말고 다른 재료를 이용한 맥주 양조법, 나일강 물의 정화 방법, 그리고 현재 재료를 이용한 화약 제조법이었지요.  그 빵에 대한 학사원의 해결책은 갈대를 연료로 하면 오븐에서 훌륭한 빵을 구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풍차/물레방아에 대한 학사원의 해법은 다소 스타일이 구겨지는 것으로서, 처음에는 당연히 나일강에 물레방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건설에 들어갔으나, 나일강의 범람을 깜빡한 관계로, 곧 '아니다 풍차가 더 낫겠다'라고 말을 바꿨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학사원을 조직하여 야심차게 찍어낸 정기 회보, '이집트의 10일간' 입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발행주기는 10일이 아니고 들쭉날쭉 했다고...)



그런데, 이집트인들은 다른 쓸모가 많은 귀한 갈대를 태워 없애는 것보다 더 쓸만 한 해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축들의 응아를 말려서 연료로 쓰는 것이었지요.  가축들이 곡식 줄기와 풀을 뜯어먹고 소화시킨 뒤 남은 섬유질은 응아로 빠져 나오는데, 이는 말리기만 하면 충분히 연료로 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는 이집트같은 사막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일부 지방에서도 행해지는 풍습이었습니다.  전에 소개드린 빅토르 위고의 '바다의 노동자' (Travailleurs de la Mer) 라는 소설에도, 프랑스 시골에서 소 응아를 벽에 집어 던져 붙인 뒤 말려 연료로 쓰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저렇게 낙타 응아를 주워서 납작하게 말린 것은, 중동에서는 중요한 연료원입니다.)



아무튼, 프랑스인들은 쫄쫄 굶었을지 몰라도 이집트인들은 빵을 잘 구워먹고 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집트처럼 밀이 풍부하고, 또 세계 최초로 빵이 구워졌다고 하는 나라에서 빵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겠습니까 ?  다만 프랑스인들이 편하도록 밀가루로 만들어두지 않고, 주로 그때그때 맷돌로 조금씩 갈아서 빵을 구웠을 뿐입니다.  성서 시대부터도, 중동 지방에서는 매일 저녁이면 여인네들이 그날 먹을 밀가루를 빻느라 맷돌 굴리는 소리가 집집마다 울렸다고 하거든요.  결국 나중에는 프랑스 병사들도 이 이집트 주민들의 맷돌을 손에 넣어, 이것으로 밀가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구한 밀가루로 프랑스군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결국 비스킷이었다고 하네요 ㅎㅎ  이집트 농민들은 도주할 때, 프랑스군이 쓰지 못하도록 오븐을 부숴놓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맷돌 돌리는 것은 동양이나 아랍이나 뭐 비슷한데요 ?)



이집트인들은 물론 비스킷 대신, 그들만의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아이쉬(Aysh)라는 납작한 형태의 빵은 난 빵이나 피타(pita) 빵과 비슷한 것인데, 다소 다른 점이라고 하면 반죽한 뒤 한 두 시간 정도 햇빛에 놔두어 발효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빵은 '태양 빵'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집트 같은 사막에서 야외에 두 시간 정도 반죽을 놓아두면 빵에 모래 먼지가 안 들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이집트 농민들은 치아의 마모가 심했다고 하더군요. 




(이집트의 피타 빵, 아이쉬입니다.)



이야기가 빙빙 돌았습니다만, 결국 그래서 맷돌을 손에 넣기 전까지, 프랑스군은 무엇을 먹었을까요 ?  밀 말고도 이집트에 넘쳐나고, 또 이집트인들이 밀 못지 않게 많이 먹고, 또 영양학적으로 밀보다 더 우수한 곡물이었습니다.  바로 콩이었지요. 

프랑스군이 험난한 사막 행군을 마치고 나일 강변의 라마니에 (혹은 라마니야 Rahmaniya)에 도착했을 때, 마르몽 장군이 본 것은 집집마다 앞마당에 수북히 쌓여있는 렌틸콩(lentil)과 잠두콩(fava bean), 그리고 양파 더미였습니다.  그렇게 이집트인들은 콩을 많이 먹었던 것이지요.  사실 콩은 밀과는 달리, 빻아서 가루를 낼 필요도 없고, 그냥 간단히 삶거나 굽기만 해도 즉각 먹을 수 있으니, 요리하는데 들어가는 연료도 더 적게 필요했지요. 





(위 쪽이 렌틸콩, 아래 쪽이 잠두콩입니다.  렌즈콩이라고도 하는 렌틸콩은 아주 작은 콩으로서, 우리나라의 녹두 비슷하답니다.  유럽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민들의 음식으로 애용되었습니다. 저 잠두콩, 즉 fava 또는 faba는 꽤 큰 대형 콩으로서, 제2차 포에니 전쟁때 한니발을 결국 무찌른 로마 장군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름도 이 파바 콩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군도 나일 강변에 도착한 이후로는, 주로 콩을 씹어야 했습니다.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식량도, 이런 렌틸콩이나 잠두콩을 일인당 하루에 반파운드 정도였습니다.  아직 식량 사정이 그리 원활하지는 않았거든요.  나일 강변을 따라 남진하면서는 곳곳에서 마을을 만났는데,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마멜룩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러 온' 정의의 사도답게, 약탈을 엄금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병사들이 주민들로부터 이런저런 식량을 훔쳐내거나 약탈해했고, 특히 닭이 도둑질 품목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나름대로 기름기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장교들, 특히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최고위급 장교들은 체면상 그런 약탈품에 손을 대지 못하고 기름기없는 콩만 씹어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프랑스군은 군대답게, 그냥 콩을 삶아서 구할 수 있는 대로 식초나 소금을 쳐서 먹었겠습니다만, 원래 이집트인들은 콩으로 주로 풀 (ful 또는 fool)이라는 일종의 스튜 요리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장교 중 10대 중반의 어린 이집트 '직업 여성'과 재미를 본 뒤 함께 식사를 한 사람이 써놓은 글을 보면, 이 어여쁜 직업 여성을 위해 식탁 가득히 요리를 차려 놓았는데, 이 소녀는 화려한 식탁에 놀란 듯 식탁을 몇바퀴 돌더니, 다른 요리를 다 거절하고 fava ful, 즉 잠두콩 스튜만을 골라서 아이시 빵과 함께 먹더랍니다. 




(현대 이집트에서 아이쉬 빵과 함께 아침식사로 제공되는 풀 메다메스 요리입니다.  생김새는 그다지 맛나 보이지는 않은데요 ?)



이 파바 풀, 또는 풀 메다메스(ful medames)이라는 요리는 이집트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민 요리 같은 것으로서, 삶아서 으깬 콩에 올리브유, 양파 및 마늘, 레몬즙 같은 양념을 넣은 것인데, 특히 아침 식사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요리는 카이로에서도 특정 구역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데, 바로 대목욕탕이었습니다.  더운 이집트에서도 목욕탕에서는 더운 물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밤까지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나면, 그 남은 예열로 콩을 대량으로 삶았다는군요.  귀한 연료를 아껴 쓰기 위한 풍습이었답니다.  이렇게 밤새도록 삶은 콩을 새벽녁에 카이로 곳곳의 식당에서 사갔다고 합니다.  다만, 이렇게 만들어진 파바 풀을, 스푼을 쓰지 않는 이집트같은 중동 지방에서는 무엇으로 먹었을까요 ?  간단합니다.  저 위에 어린 '직업 여성'이 보여줬듯이, 납작한 아이시 빵을 뜯어서 스푼삼아 떠먹었습니다.

콩으로 만든 유명한 중동 지방 요리는 파바 풀 말고도 또 있습니다.  팔라펠(falafel)이라는 콩반죽 튀김 요리는 특히 인기가 있어서, 중동 지방의 피타(pita) 빵 안에 채소와 함께 넣어 먹기도 하는데, 중동 지방의 맥도널드에서는 아예 맥팔라펠(McFalafel)이라는 메뉴가 따로 나올 정도로 인기랍니다.  이렇게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팔라펠은,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음식이었는지, 나폴레옹의 병사들 중에 먹어본 사람은 없나 봅니다.  특히 저렇게 피타 빵에 햄버거처럼 넣어먹는 것은 현대의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하네요.




(펠라펠의 모습입니다.  콩이든 생선이든 버섯이든, 튀기면 일단 다 맛있어지는 것 같아요.)




(피타 펠라펠입니다.  확실히 햄버거보다는 건강식이겠네요.)



결국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맛없는 콩만 먹어야 했을까요 ?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이집트에는 수박을 많이 재배하고 있어서, 어떤 병사들은 더위도 먹었겠다 해서 다른 음식은 다 먹지 않고 오로지 수박만 먹었다고 합니다.  또 대추야자 (대추야자에 대해서는 페르시아 한 가운데서 http://blog.daum.net/nasica/5459519 참조)도 풍부했고, 프랑스인들의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흰 치즈도 꽤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진격하기 전에, 콩에 지친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카이로에만 가면 너희들이 꿈꾸던 모든 빵을 다 얻을 수 있다' 라고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작 빵을 찾아온 거라면 뭐하러 프랑스에서 이집트까지 온 거냐'라고 병사들이 비아냥거리자, 다음번 연설에서는 '카이로에만 가면 고기와 포도주, 설탕과 커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라고 메뉴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이집트는 홍해 쪽에서 수입된 모카 커피를 지중해 쪽으로 유통하는 주요 경로로서, 이집트의 수입원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 관세였습니다. 




(모카가 저 예멘의 홍해 쪽 항구 이름이라는 거 다들 아시지요 ?  저는 예전엔 초컬릿 종류 이름인 줄 알았어요.)




(갓 볶은 모카 커피 콩입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은 결국 이집트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집트에는 나일강의 풍요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 곡물은 넘쳐 났지만, 정작 돈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기로 하시고, 여기서는 나폴레옹이 형 조셉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만 보시도록 하시지요.

"이집트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밀과 쌀, 채소와 가축이 풍부해.  하지만 주민들의 상태는 완전 야만 그대로야.  병사들의 급료를 지불할 돈조차 구할 방법이 없군.  두달 안에 프랑스에 갈지도 몰라."

금화나 은화가 나오지 않으면 야만인가요 ?  ㅎㅎ  확실한 건, 나폴레옹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에게 금은보화를 안겨주지 못하는 이집트에 많은 실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