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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문명의 충돌 - 1798년 10월 카이로 폭동

by nasica-old 201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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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영국 해군에게 함대를 탈탈 털어먹힌 나폴레옹과 그의 '동방군'은 물론 크게 당황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보다는 부하 장교들과 일반 병사들의 당혹스러움이 더 컸습니다.  인도까지 사정권에 두었던 나폴레옹과는 달리, 이들은 그저 이집트를 후딱 털어먹고 금은보화를 잔뜩 챙겨서 몇달 안에 아름다운 프랑스로 귀환할 꿈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이집트에 상륙해보고는 그 삭막함과 가난함에 질려 버렸거든요.  그나마 카이로에 입성한 이후, 알렉산드리아나 기타 시골 마을들과는 달리 다소 번화한 카이로 시내 모습에 약간 기분이 풀리기는 했습니다만, 여전히 대부분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이런 곳에 오는 줄 알았다면 탈영을 했을 거다' 라며 불만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정에 참여했던 뒤떼르뜨르 DuTertre와 콩테 Conte 가 그린 카이로의 전경입니다.  그나마 촌락보다는 상태가 좋았지만, 그래도 빠리나 밀라노에 비하면...)



나폴레옹 본인의 반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크게 당황하여 호들갑을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국 해군이 내게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군.  이제 우리는 고대의 정복자들이 했던 것처럼 이 땅에 우리의 제국을 세워야 한다."




(하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신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선포한 것도 이집트의 암몬 신전에서였지요.  까짓거 나폴레옹도 못할 바는 없었겠지요.)



이건 약간 허세를 부리는 발언이기는 합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에 의해 제해권을 박탈당한 것 여부와는 별도로, 이집트의 식민지화 작업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폴레옹도 어릴 때부터 꿈에 그리던, 즉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지배하던 나일 강의 선물 이집트가 아닌, 마멜룩의 학정에 무척이나 초라한 현실 속의 이집트를 보고는 무척 마음이 상했지요.  하지만 일반 장교들이나 병사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불평을 늘어놓을 여유가 없없습니다.

그는 카이로에 입성한 것이 1798년 7월 22일인데, 불과 5일 만인 7월 27일에 4개조로 된 훈령을 공표합니다. 

제1조는 디완(Diwan, Divan)의 결성입니다.  디완이라는 것은 오스만 투르크가 마멜룩을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이집트 현지 지배의 도구로서 활용한 일종의 자치 위원회였습니다.  우리말로는 명사회 정도로 번역되지요.  현지의 실력자(주로 이슬람 학자들이지요)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실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지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실권을 쥔 오스만 투르크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 좋은 제도였지요.  나폴레옹도 이 제도를 활용하기로 하고, 이집트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의 명망있는 이슬람 율법학자 7인을 선정하여 디완을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이슬람에서는 인물화를 별로 안 그리는 바람에, 디완을 묘사한 그림이 없네요.  이것은 카이로 현지에서 운영되던 이집트 학회의 모습입니다.  이 이집트 학회에는 이집트의 이슬람 율법학자들도 초대되었습니다만, 이집트 학자들은 프랑스인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프랑스의 과학 문명에 그다지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제2조는 예니체리로 구성된 경찰 조직의 발표입니다.  아시다시피 예니체리는 마멜룩처럼, 오스만 투르크의 노예 병사들입니다.  (둘 중에 누가 세냐고요 ?  오스만 투르크가 이집트를 정복한 걸 보면 답이 나오지요.)  비록 이집트의 명목상의 주권자인 오스만 투르크의 허울 뿐인 태수는 이미 이브라힘 베이와 함께 시리아로 도망쳤으나, 오스만 투르크의 관리 및 예니체리 병사들은 아직 상당수가 카이로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예니체리 병사들은 박봉에 시달리느라, 이제는 거의 전사로서의 본분을 잊고 이집트 시장통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거나 서당을 열어 학교 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나, 그래도 예니체리라는 이름과 정통성은 가지고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이들을 경찰로 활용하기로 하고, 프랑스군과의 협조 하에 1인당 60명의 무장 현지인을 거느린 경찰 조직을 만들게 합니다.




(예니체리 병사들도 원래는 코카서스 지방의 기독교 자제들이었다가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은 군사 훈련 뿐만 아니라 이슬람 경전과 읽고 쓰기, 서예 등의 기본 학문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지식인에 속했습니다.)



제3조는 현실적인 문제, 세금이었습니다.  과거 마멜룩에게 돌아갔으나, 이제는 프랑스 공화국이 받게 될 세금 징수원을 각 지역마다 두도록 했습니다.

제4조는 이 세금 징수원을 감독할 프랑스 직원의 임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포고문을 통해 드러난 나폴레옹의 의도는 상당히 근대적이고 또 근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사권을 제외한) 일부 권력을 현지 이집트인들과 공유하여, 단계적으로 이집트를 세계 최초의 근대적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권력자들과 사상가들은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혁명사상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므로, 당연히 역사적, 종교적 배경이 다른 다른 국가와 민족, 그러니까 이집트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당장의 이집트는 마멜룩의 폭정으로 인해 피폐되었지만, 과거 이집트의 영광이 말해주듯이, '제대로 된 문명인들의 지배 하에서는 부를 창출해내는 금광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습니다.  마치 미국이 먼 극동의 빈국 조선에 뿌린 자본주의와 공화주의의 씨앗을 통해, 오늘날 번영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작지만 멋진 동맹국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본 이 사진의 원제는 '빵셔틀의 위엄 - 아무나 빵셔틀 시켜주는 거 아니다' 였습니다. 씁쓸하기는 하지만,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군요.)




어떻게 보십니까 ?  불과 5일만에 이 정도의 훈령을 발표했다는 것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이집트 정치 사회 제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던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준비할 때 단순히 군사 작전만을 연구/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친위(?) 학자인 베르톨레와 몽쥬를 시켜 교황청이나 제노바로부터 이집트 관련 책자는 물론, 아랍 문자를 인쇄할 수 있는 인쇄기와 활자까지 강탈해 오도록 했지요.  프랑스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에 쏟아 놓은 것은 3만2천명의 냄새나는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인쇄기도 함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 인쇄기를 이용하여 아랍어로 인쇄된 포고문을 4천장이나 찍어 주민들에게 마구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랬지요.

- 마멜룩은 이집트의 주인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을 무시하고 이슬람의 대의를 거역한 죄인들이다.
- 프랑스 공화국이야말로, 이슬람의 적인 카톨릭 교회를 부수고 그 수장인 교황을 포로로 잡은 진정한 이슬람의 친구이다.
- 프랑스 공화국은 이집트의 주권자인 오스만 투르크 술탄을 대신하여 이슬람과 이집트의 적인 마멜룩으로부터 이집트를 해방시키겠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우월성보다는 정통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어차피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이집트 정복 이래로, 마케도니아, 로마, 다시 동로마 제국을 거쳐 아랍, 결국 오스만 투르크에 이르기까지 2천년 동안 외국인들의 지배를 받아 왔쟎습니까 ?  당장 이집트를 현지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마멜룩조차도 인종은 그루지아나 코카서스 지방에서 온 외국인들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이집트 지배의 정통성만 잘 정립하면, 프랑스가 그 이전 지배자들처럼 수백년간 이집트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논리를 만들고,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정말 프랑스가 이슬람의 친구이자 이집트의 해방자로 믿게 만들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소설에는 이집트인과 투르크인과 베두인, 알바니아 인등이 복잡하게 뒤얽혀 등장합니다.  영어를 하는 예니체리 병사 이야기도 나오고요.  매우 재미있었어요.)



위 포고문의 내용 중 1번과 2번은 사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포장을 잘 했을 뿐이지요.  그러나 3번 내용, 즉 정말 나폴레옹이 오스만 술탄의 칙령을 받고 이집트를 침공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까지 새빨간 거짓말도 아니었습니다.   Patrick O'Brian의 오브리-머투어린 시리즈 중 이집트 및 발칸 반도에서의 모험을 그린 "The Ionian Mission" 편에 그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정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일종의 춘추전국 시대 비슷한 상황이었거든요.  제국의 각지에는 이런저런 파샤(태수)들이 거의 반독립 상태의 자치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고,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 황제인 술탄에게는 형식적인 조공만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치 정부의 파샤들은 분명히 이스탄불에서 임명하는 관직이었습니다만, 그건 형식상의 이야기 뿐이고, 실제로는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일 정도로 독립적이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벌이더라도 항상 "오스만 술탄의 명을 받들어 대역무도한 XXX를 치겠다"라는 식으로, 이스탄불 정부의 체면을 살려주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중국의 주나라 때의 춘추 시대나, 한나라 말기의 위촉오 삼국시대 정도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도 그런 파샤들 흉내를 내어, 비록 술탄과는 아무 이야기가 없었지만 '술탄의 명을 받들어 불충한 마멜룩을 치겠다' 라고 한들, 뭐 크게 거짓말을 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이 양반도 그런 파샤 중의 한명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원래 알바니아 사람인데, 프랑스군을 몰아내러 아부키르에 상륙한 투르크군 지휘관 중 하나였지요.  프랑스군이 물러간 뒤, 결국 이집트를 차지하는 것은 이 무하마드 알리였고, 이 사람은 사실상의 독립 이집트 왕국을 건설합니다.  이 왕조가 근대 이집트의 시초입니다.)



또, 실제로 술탄에게 협조를 구할 계획도 있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공을 시작하면, 탈레랑이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전후 상황과 국제 관계의 이득을 설명한 뒤 술탄의 사후 승인을 받아내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키겠다는 입장 표명이라도 받아낼 계획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어차피 술탄으로서야, 제대로 조공도 바치지 않는 마멜룩들을 괘씸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만약 프랑스가 마멜룩들을 쫓아내고 원래의 조공을 재깍재깍 바친다면 손해볼 것도 없는 셈이라고 프랑스에서는 판단한 거지요.  그러나 실제로 이 계획은 수행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국제 관계 속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오직 하나, 무력이거든요.  아부키르 만에서 프랑스 함대가 괴멸되고 영국 함대가 동지중해를 완전 장악한 이후, 이스탄불의 입장은 친영국 반프랑스 분위기로 재빨리 돌아섰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또 프랑스 공화국이야말로 카톨릭의 적이고 이슬람의 친구라는 말도 어쩌면 사실이었습니다.  일단, 프랑스 공화국이 카톨릭의 적이라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일단 당시 교황 비오(Pius) 6세는 나폴레옹의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작전 시에 휘하 교황령 부대를 동원하여 프랑스군과 정식으로 교전하여 (당연히) 탈탈 털린 적이 있는데다, 1798년 이집트 원정 무렵에는 아예 나폴레옹의 부하 베르티에(Berthier)에게 체포되어 시에나(Siena)로 다음은 플로렌스(Florence)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비운의 교황 비오 6세...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결국 타향에서 객사합니다.  그 뒤를 이은 비오 7세도 나폴레옹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또 당시 나폴레옹의 얼치기 신학에 따르면, 프랑스의 자코뱅 병사들이야말로 무슬림(muslim)이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원래 무슬림(muslim)이라는 말은, 꼭 이슬람교 신도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다신교를 배척하고 오직 하나의 신을 믿는 자들을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교도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무슬림이라고 불릴 수 있었지요.  다만 마호멧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대문자 M을 써서 Mulsim이라고 불렸고, 이들이 진짜 이슬람교도라는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 원정군 병사들 및 장교들 대다수는 자코뱅의 무신론 스피리트가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이들의 종교 상태는 이신론(deism)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보다는, 신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 등에 나오는 것처럼 인격체로서 감정을 느끼고 인간사에 참견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무심하지만 완벽한 우주 그 자체가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대표적인 인사가 볼테르(Voltaire)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볼테르는 신을 시계공에 비유했다고 하지요 ?  "신은 이미 이 우주를 완벽하게 창조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참견(즉, 기적)이 필요하지 않다." 라는 볼테르의 말로 이신론이 요약된다고 하면 지나친 축약일지 모르겠네요.  이런 분위기에 따라, 당시 프랑스에서는 카톨릭이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참조)



(하긴 신이 만드신 것에 불량품은 없으니, 신이 창조한 세상은 이미 완전하겠고, 따라서 버그도 없어서 가끔씩 기적이라는 팻치를 설치할 필요도 없겠지요 ?  볼테르의 이론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홍해를 가른 것은 무엇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이며... 무엇보다 신이 아들을 세상에 직접 내려보내는 것은 무어죠 ?  신학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학문 같아요.)



기본 배경이 이러했으므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자코뱅 군대가 이집트의 무슬림들에게 잘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실제로도 병사들에게 훈령을 내려 이슬람교를 보호하고 존중하라고 지시했지요.  로마인들은 모든 종교를 보호했다는 사실도 인용하면서 말이지요.  또 그는 디반의 주요 구성원인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마치 프랑스군 전체가 이슬람으로 개종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이들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그는 단지 '아쉽게도' 그럴 수 없는 이유로, 무슬림이 되려면 할례(포경수술)를 해야 하고 또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데, 그 두가지는 프랑스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유아 할례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  알고보니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포경 수술을 거의 다 하는 나라가 몇개 밖에 없더군요 ?  우리나라에 포경 수술이라는 것을 알려준 미국인들조차 요즘은 별로 하지 않는다고...)



구약 성경 창세기 34장에도 이 할례로 인해 일족이 하루 아침에 전멸한 이야기가 있지요 ?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족 부족장의 아들 세겜에게 X간을 당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모두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세겜이라는 X간범 청년은 아름다운 디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어, 디나와 정식 결혼을 하겠다고 야곱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은 '우리 율법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과 혼인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으니, 정말 디나를 사랑한다면 너희 부족 전체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우기지요.  사랑의 힘은 위대하여, 세겜은 부족장인 아버지의 권력으로 자신을 포함한 전 부족민들이 한꺼번에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고 전체 부족 남자들이 끙끙 앓고 있는 사이에,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들고 난입하여 모두를 한꺼번에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는 희대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를 납치, X간하는 세겜.  아무튼 X간범은 중죄로 다스려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성범죄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상당히 관대해요.  특히 술에 취해 저지른 성범죄는 중벌에 처해지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  이상하지요 ?  술에 취해 낸 교통사고는 더욱 가중처벌을 받던데 ?)



아무튼 나폴레옹의 핑계에 대해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자신들끼리 회의를 열어, 할례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니 프랑스인들에게는 면제해주겠다고 하여 나폴레옹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술은 정말 안된다' 라고 결정이 나는 바람에, '거 봐라, 그것만 아니면 정말 개종을 할텐데 말이야...' 하며 나폴레옹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도 술 핑계를 대고 이슬람의 덫을 빠져나갔네요 ?)



하지만 실제로도 프랑스 병사들과 이집트인들과의 관계가 정말 좋았을까요 ?  그럴리가 없지요.  일단 한쪽은 정복군이고 다른쪽은 피정복민이쟎습니까 ?  나폴레옹은 7월 말부터,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는 이집트인들을 처형하고 그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아 효시하는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내린 '이집트인과 이슬람교를 존중하라'라는 일반 포고령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부하 장군들에게는 '이집트인들을 다스리려면 엄격한 규율을 적용해야 한다.  그들에게 복종이란 곧 공포다' 라며 야만적인 철권 통치를 강조했습니다.  그가 쓴 편지 중에는, 현재 카이로에서는 거의 매일마다 5~6명씩의 목을 잘라 효시하고 있다고 적을 정도였지요.

일단 이집트인들은 이들이 자신의 종교를 말살할 것이라는 생각에 크게 두려워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곧 그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요.  하지만 프랑스 병사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이집트인들을 바로보는 시선은 경멸 그 자체였습니다.  본국의 카톨릭교인들조차도 경멸하던 병사들인데, 하물며 이집트의 이슬람교인들을 존중할 리가 없었지요.  또 이집트인들도 프랑스인들이 이슬람의 친구라는 소리는 처음부터 귀에 담아두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프랑스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요 ?  인종의 차이 ?  글쎄요, 바로 전에 이집트를 지배했던 마멜룩들도 그루지아 코카서스 계통의 백인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또 이스탄불의 투르크인들도 이때 즈음에는 이미 어느 정도 백인들과 많이 피가 섞인 상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역시 아무래도 종교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카톨릭 문화에서 성장한 프랑스인들과, 또 역시 배타적이기는 마찬가지인 이슬람 문화에서 성장한 이집트인들은 서로 어울려 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지요.  마케도니아나 로마 시대의 종교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랍의 이슬람 정복 이후로는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다 같은 이슬람 문화권 내의 정복자들이었지요.  그렇게 1천년이 넘도록 이슬람 문화권에 있던 이집트가, (비록 지금은 잠깐 일탈 중이라고는 해도) 카톨릭 문화권인 프랑스인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십자군 전쟁 기간 중 유일하게 이집트를 침공했던 십자군이 하필 프랑스의 루이 9세였고, 그 루이 9세도 바로 마멜룩 전사들에 의해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자존심을 생각할 때,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점령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타민족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던 것은, 다신교의 특성 같아요.  영화 '쿼바디스'에도 명대사가 나오지요.  여주인공이 자신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서 로마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하자, 남자 주인공이 그게 무슨 문제냐며 말하지요.  "까짓거 로마에 예수의 신전도 하나 지읍시다 !  로마에서 모시는 신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예수 하나 더 들어간다고 티도 안날게요 !")



어쩌면 종교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돈 문제입니다.  (제가 추잡한 중년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제게는 이념이나 종교 문제보다는 역시 돈 문제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네요.)  어찌 보면 프랑스인들과 거래했던 이집트인들은 모두 일단 프랑스인들을 환영했습니다.  계란이나 빵, 몰래 만든 포도주 등의 생필품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값을 후하게 쳐주었거든요.  처음에 프랑스인들은 유럽에서 거래되던 가격으로 이런 물품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이집트 상인들의 수익률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또, 프랑스인들은 현지인들의 노동력을 동원할 일이 생기면, 기존의 마멜룩과는 달리 임금을 꼬박꼬박 계산해서 지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돈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요 ?  프랑스 본국에서 ?  그 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보여주는 몇몇 사례를 보시지요.



(돈이란 무엇인가 ?  돈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  이걸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가 ?)



바로 이전에 이집트를 지배하던 마멜룩 베이(bey)들은 나폴레옹군이 카이로에 입성하기 전에 이미 모두 시리아 혹은 상 이집트(Upper Egypt)로 탈출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나 그 와이프들 중 일부는 각자의 궁궐같은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군은 이들을 체포하고 그 집을 빼앗았을까요 ?  아닙니다.  물론 일부 집들은 장군님들을 위해 징발했지만, 다른 집들에 대해서는 그 집을 지키는 와이프들에게 이렇게 통보가 갔습니다.  "특별히 봐줘서 그 집에 계속 살게 해주겠다.  대신 벌금 몇천 프랑을 내놓거라."

또, 8월초,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던 나일 강변의 도시 만수라(Mansura)를 진압한 프랑스 장군 두구아(Dugua)는 주민들에게 이렇게 통보했습니다.  "너희들의 마을을 불살라 버리라는 훈령이 있었다.  그러나 투르크 은화 4천 키스(kis)를 벌금으로 내면 용서해주겠다."

또 다른 예도 하나 있습니다.  9월 12일 베르디에(Jean-Antoine Verdier) 장군이 손밧(Sonbat)이라는 베두인 마을 하나를 들이쳐 불지른 뒤, 나폴레옹에게 보낸 보고는 이렇습니다.  "이들의 소굴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셨지요.  잘 되었습니다.  이제 그 마을은 사라졌습니다.  이 날 프랑스 공화국의 손실은 제25 반편 대대 소속의 척탄병 1명 뿐이었는데, 무릎에 가벼운 부상을 입은 정도입니다.  우리의 이날 소득은 엄청난 양떼와 크고 작은 낙타 59마리입니다.  이들을 끌고 귀환 중입니다."

이 세가지 말고도 많은 경우에, 프랑스 점령군은 기회가 날 때마다 벌금 징수와 재물 약탈에 열을 올렸습니다.  의외로 토지나 부동산 몰수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는 당시 프랑스 점령군의 약탈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원래 정말 제대로 된 정복자라는 것은 점령지의 부동산이나 생산 수단의 확보에 열을 올려야 하는 것인데, 정작 이슬람 공화국을 건설하러 왔다는 프랑스군은 정작 당장 현금 약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요.  당시 프랑스군은 심각한 경화(specie)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병사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어느 프랑스군 대위가 본국으로 보낸 편지 (물론 도중에 영국 해군에 요격되어 영국군의 손에 들어갔지만)를 보면, 벌써 4달 째 봉급을 못받고 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이미 헛된 공약으로 치부되었던 '귀국시 6 아르팡의 땅을 주겠다'는 이야기보다 더욱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밀린 급료가 병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돈을 찾아 다녔습니다.  또, 본국의 총재 정부도 문제였습니다.   부정부패와 탐욕의 대명사인 파리 총재정부에게는, '이집트에 비옥한 토지 천만평을 확보했습니다'라는 편지 한장보다는, 당장 금화 궤짝 1개가 더 반가운 존재라는 것을 나폴레옹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군은 툭하면 이집트 상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이나 벌금을 물렸고, 이는 그대로 이집트 민중의 부담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등록권을 확인한다면서 프랑스인들이 모스크 사원 소유의 재산들에 대한 장부를 들추기 시작하자,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카이로의 대표적 모스크인 알 아자르 모스크.  어떤 통치자이든 종교 단체를, 특히 그 교단의 재물에 손을 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지요.)



이런 종교 및 경제 문제 말고도,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만한 문화적인 요소들도 프랑스인들과 이집트인들 사이의 불화를 초래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약 3만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의 추산 인구인 6백만명의 0.5% 수준입니다.  인종과 종교, 언어, 복장이 완전히 다른 성인 남자가 전체 인구의 0.5%나, 그것도 알렉산드리아와 로제타, 카이로를 연결하는 이집트의 주요 도시 지역에만 한꺼번에 흘러들어왔다는 것은 대단한 문화적 충격이었지요. 

술을 마시고 돼지를 먹으며, 하루에 다섯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지도 않고, 그 여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얼굴도 가리지 않으며, 응아를 하고 난 뒤 X꼬를 물로 닦지도 않고 종이로 쓱 문지르고 끝내는 더러운 프랑크족은, 이집트인들이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상종못할 족속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근대화된 이집트 공화국을 만든다는 명목 하에, 이집트인들에게 삼색 현장을 강제로 착용하게 한다든가, 전염병 예방을 한답시고 매일 두번씩 거리를 청소하게 하고 집안 내부의 위생 상태를 검열한다든가 하는 조치들은 이집트인들의 일상 생활과 예절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여자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무슬림 여자들을 건드리려는 행위가 자꾸 벌어졌고, 무엇보다 무슬림 여자들이 자유분방한 프랑스 여자들을 따라하려는 경향이 나타나자 사태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요.)



마침내 1798년 10월 21일, 이교도에 대한 저항이 무장 봉기로 이어집니다.  이 무장 봉기는 나폴레옹이 신생 이집트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으로 여겼던 중산층이자 지식인층이었던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우월한 문명과 사상으로 낙후된 이집트를 개조해보겠다는 나폴레옹의 오만한 계획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분노에 가득찬 설교를 통해 흥분한 민중들은 아침 6시부터 곤봉과 농기구 같은 조잡한 무기로 무장하고 프랑스인들의 주거지를 덮쳤습니다.  




(1798년 10월 21일 카이로 대폭동. 물론 프랑스 화가들은 무적의 프랑스군이 카이로의 민간인들에게 맥없이 학살 당하는 모습 따위는 그리지는 않았지요.)



가장 먼저 습격당한 곳은 외다리 카파렐리 장군의 숙소였습니다.  다행히 장군은 출타 중이었지만, 함께 거주하던 장교들과 학자들, 하인들 중 상당수가 졸지에 급습을 받고 살해되었습니다.  또 로나토(Lonato)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열혈 자코뱅이었던 뒤푸이(Dominique Martin Dupuy) 장군도 이집트 폭도들의 손에 속절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쉴코프스키(Joseph Sulkowski) 대위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군인으로서, 아르콜레 (Arcole) 다리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지키다가 부상을 당한, 나폴레옹의 최측근 참모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르콜레의 용자 참조)  그의 시체는 성난 폭도들의 손에 의해 훼손되어 거리의 개떼들에게 먹이로 던져졌다고 합니다.   이날 프랑스인들은 병사들과 학자들, 하인들까지 다 합해 약 300명의 사망자와 200명 정도의 부상자를 냅니다.  카이로를 점령할 때 치렀던 정규전인 피라미드 전투 (외계인은 사각형으로 싸운다 - 피라미드 전투 참조) 때 냈던 사망자인 28명의 10배가 넘는 수자였습니다.  미국도 이라크군이나 아프가니스탄군과의 정규전 때보다는, 점령 이후 순찰 활동에서 훨씬 더 많은 수의 사상자를 냈지요.




(뒤푸이 장군이 이집트 현지에서 남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슬람교에 관심이 있는 듯이 이집트인들을 속이고 있다.  물론 보나파르트나 우리 모두 이 종교가 쫓겨난 비오 6세의 종교처럼 허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자료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나폴레옹도 이 친구의 자질에 대해 무척 칭찬을 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쉴코프스키는 베두인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이었습니다.)



정작 프랑스 지휘본부가 있던 성채 자체에는 그다지 심한 공세가 가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의 철저한 사전 준비 덕분으로서, 카이로 시내 성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그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을 모두 쫓아내고 민가들을 허물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내의 미군 안전 지역인 '그린 존(Green Zone)'같은 것을 구현했던 것이지요.  실은 이런 안하무인격의 일방적인 조치때문에 폭동이 일어난 것이니, 꼭 잘한 일이라고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무리 머리수가 많다고 해도, 몽둥이와 쇠스랑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0.69 인치 구경의 샤를비유(Charleville) 머스켓 소총으로 무장한, 게다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침착한, 하지만 잔혹한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하기사 파리 시내의 폭동에도 포도탄을 쏘아 진압한 경력의 나폴레옹에게, 카이로 폭동 진압 정도야 식은 죽먹기였겠지요.  밤새도록 이어진 공방전(...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점령전)에 밀려 알 아자르(Al Azahr) 사원으로 집결한 폭도들은 알라신의 가호를 빌며 이곳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대포 앞에서는 알라신의 가호도 별로 소용이 없었지요.  알 아자르 사원의 대문짝은 프랑스군의 포격에 떨어져 나갔고, 프랑스군은 불경스럽게도 말을 타고 모스크 안으로 진입하여 그 안에 모여 있던 폭도들을 학살했습니다.  물론 사람 뿐만 아니라 온갖 집기와 자료도 다 파괴해버렸지요.  게다가 신성한 알 아자르 모스크 내부에서 일부러 용변을 보아 대소변으로 사원 자체를 더렵혔습니다. 




("꿇어, 이 색희들아"  알 아자르 사원의 나폴레옹.  Henri Leopold Levy의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카이로 폭동의 결말은 이집트의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완전한 기습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300 대 5,000의 사망자 비율을 낸대다가, 그 이후에도 주동자로 지목된 이집트인들은 즉각 목이 잘려 그 시체가 나일 강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그 전에는 다들 달기 싫어했던 프랑스 혁명의 삼색 현장을 너도나도 달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런다고 프랑스군이 보복적으로 부과한 더 무거운 세금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여전히 이집트를 영구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민중, 특히 이집트 중산층과의 화해가 꼭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프랑스의 지배에 협조할 것을 계속 요구했고, 율법학자들도 알라신보다는 프랑스군의 대포가 더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지라, 당분간은 쥐죽은 듯 지내기로 했습니다.




(아따 내가 좋게 말로 할 때 들어라잉 ?  자비로운(?) 정복자에게 무릎꿇은 폭도들...)



이렇게 1798년 10월의 카이로 폭동은, 서구 세력이 이슬람 문명권을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슬람의 군대는 무찌르기 쉬울지 몰라도, 이슬람 민중을 지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은 21세기의 미군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지요.





(이라크나 아프간은 Hotel California 같은 곳이라서,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려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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