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몇번 밝힌 바와 같이,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물론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냥 육군 병장 제대했다고만 말하지요. 저는 90년대 초반에 군복무를 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요즘 군대에는 구타가 없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꼭 카투사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군대에서 저는 구타라는 것을 당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식사 후, 훈련병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혼잡한 수돗가에서 식판을 닦고 있는데, 왠 기간병 하나가 군화발로 제 '엉덩이를 걷어차며' 빨리 움직이라고 했던 것이 유일한 구타라면 구타였습니다. 대신 논산 훈련소에서, 그리고 카투사 훈련소에서도 얼차려는 여러가지 것을 많이 당했어요.
(이건 물론 제 사진이 아닙니다.)
요즘 군대에서는 정말 구타가 근절되었나요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최근에 군에서 제대하신 분들은 댓글 증언 해주시와요.) 최소한 의경, 전경 부대에서는 아직도 구타 등 부대원끼리의 폭력이 여전히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게 비단 군대나 경찰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중고등학교 때부터 선후배 간의 폭력에 익숙해진 청년들이, 군대에서 하지 말란다고 금새 구타의 습성을 버리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심지어 대학에서도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얼차려나 구타 등을 하는 경우가 아직도 종종 뉴스에 보도될 정도인데, 군대나 경찰 같은 폐쇄된 남성 사회가 과연 부대원끼리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약간 의심스럽습니다.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제가 자꾸 책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댓글로 제가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이게 책 광고글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책 광고는 맞습니다만, 그랗다고 제가 출판업에 종사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소개하는 책이나 출판사와 금전적인 관계 전혀 없습니다.) "연사 한 잔 하실까요?" 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맥주, 와인, 증류주, 커피, 차, 그리고 콜라가 인류사에 중요한 6가지 음료라고 합니다.)
이 책은 맥주, 와인, 커피, 차 등의 주요 음료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펼쳐 보여주었는데,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번역이 약간 껄끄럽게 된 부분이 몇몇 눈에 띈 것은 에러...) 그 중에서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즉,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지중해 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맥주를 마시는 비지중해 문명권 사람들에 대한 우월함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고요. 그래서 로마군 백부장이 계급의 상징으로 들고 다니던 것이 바로 포도나무로 만든 막대기였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로마군 백부장이 자신들의 문명의 상징으로 와인을 뽑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에 대한 우월감으로 별다른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포도나무 막대기를 들고 다녔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막대기는 부하 병사들을 구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보면 딱 구타용으로 적절하게 생겼거든요.
(Vinewood staff 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물건이 아니라, 정말 포도나무 덩쿨 가지를 대충 다듬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길이를 보면, 그 용도가 딱 그 용도 같지 않습니까 ?)
로마 시대 이전, 그리스 시대의 지휘관들도 그런 막대기를 필요할 때마다 사용했습니다. 기원전 40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쿠낙사(Cunaxa) 전투가 키루스 왕자의 패배로 이어진 뒤, 페르시아 깊숙한 내지에서 고립된 그리스 용병들은 클레아르쿠스(Clearchus)라는 스파르타 출신의 늙은 용병 대장의 지휘 하에 살 길을 찾습니다. 그 동네는 문명의 중심지답게 이런저런 관개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곳이어서, 그리스 용병들은 길을 가다 수로를 건널 임시 다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클레아르쿠스는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일을 게을리 하는 병사가 눈에 띄면 막대기로 가차없이 두들겨 팼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건 약간 뜻 밖입니다. 그리스 시대의 병사들은 다른 시대의 병사들과는 신분이 약간 달라서, 개개인이 당당한 정치적 발언권이 있는 '시민'들이었거든요. 특히 이 용병단의 병사들은 돈 좀 만져보려고 스스로 모여든 베테랑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장교에게 (사실 당시에는 장교라고 계급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개 패듯 구타를 당한다고는, 최소한 저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우리를 졸로 보지마... 우린 졸이 아니야)
이 당시 그리스 군대의 내부 질서가 항상 상명하복은 아니었습니다. 방금 제가 언급했 듯이, 개개인 모두가 언제든 민회에서 '저 장군을 사형시키라'고 탄핵안을 내놓을 수 있는, 상당한 정치력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장군들은 병사들의 뜻을 항상 존중해야 했습니다. 이 '구타 장군' 클레아르쿠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그리스 용병들은 자신들이 싸우게 될 대상이 페르시아의 대왕 아르타크세륵세스인 줄은 모르고 모병에 응한 것이었거든요. 쿠낙사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 사실을 눈치챈 병사들이 진군을 거부하자, 클레아르쿠스는 억지로 병사들을 출발시키려 했는데, 병사들이 항의의 표시로 그에게 돌을 던지는 바람에 그는 거의 돌에 맞아죽을 뻔 했었습니다. 그는 절친한 병사들을 개인적으로 불러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한 뒤에야 진군을 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군에게 돌을 던질 정도의 병사들이 왜 나중에는 클레아르쿠스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꼼짝않고 맞았을까요 ? 완력으로 이 50대의 늙은 클레아르쿠스를 당해내지 못해서였을까요 ? 물론 아닙니다. 그건 그 구타가 '합리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용맹스러운 시민들이라고 하면 흔히 Spartiates를 가리켰습니다. 실제로 레오니다스를 따라 싸우다 죽은 병사들 중에는 헬로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아무도 그들을 스파르타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요. 영화 300에서도 헬로트 따위는 출연조차 못했습니다.)
가령 구타의 원인이 되었던, 도랑을 건널 임시 다리를 만드는 작업에, 그는 30대 이하의 병사들만을 할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그는 필요시 언제든 창과 막대기를 버리고 진흙탕 속에 뛰어들어 병사들과 막일을 함께 했습니다. 지휘관의 이런 열정을 본 병사들은, 30대를 훌쩍 넘긴 노병들조차도 자신들의 나태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작업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일을 게을리하는 병사가 두들겨 맞는다면 주변의 동료들도 '그놈은 맞아도 싸다'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구타는 어디까지나 장교, 지휘관들의 몫이었고, 병사들 상호간에는 구타나 얼차려가 있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참 당연한 것이, 다 같이 민회에서 1표씩을 행사하고, 전장에서는 방패 1개와 창 1자루를 책임지는 동등한 동료들인데, 그들끼리 뭐가 잘났다고 서열을 정해 놓고 때리고 맞고 얼차려 선다는 것이 오히려 더 웃기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나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정치체계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입니다. 진짜 민주주의라면 겨우 5년마다가 아니라 언제든 국가 권력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지요.)
나폴레옹 시대의 군대에서는 어땠을까요 ?
영국군 같은 경우는 육군이나 해군이나 무자비한 채찍질로 악명이 높았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장교나 하사관들이 일반 사병들에게, 가할 수 있는 체벌이었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가령 고참이 신참 병사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구타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이 다 그렇듯이, 있을 수 없다는 일도 종종 발생했을 것 같긴 하네요.)
장교나 하사관이라고 마음에 들지 않는 병사를 즉석에서 두들겨 팰 수는 없었습니다. 가령 전투 중이든 검열 중이든 뭔가 잘못을 저지른 병사가 눈에 띄면, 장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병사의 이름을 적어두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중대장이든 함장이든 지휘관에게 정식으로 보고하고, 정식으로 명령을 받아, 정식으로 채찍질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start that man !' 이라는 명령이 수시로 날아들었습니다. 즉, 게으름을 피우는 수병은 보조 갑판장(bosun's mate)이 수시로 휘두르는 매듭지은 밧줄에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글자 그대로 1~2대 정도였습니다.
(19세기 초 영국 해군의 bosun's mate의 모습. 저 손에 밧줄은 왜 잡고 있을까요 ? 거의 로마 백부장의 포도나무 막대기와 비슷한 포즈군요.)
특히 영국 해군에서는 매주 일요일이 소위 '경을 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미사가 끝난 뒤, 일주일 동안 잘못을 저지른 병사들에 대한 약식 '재판'이 있고 그 형벌이 즉석에서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해당 수병의 잘못을 고발하는 역을 맡은 장교가 있었고, 그 수병을 (형식적으로라도) 변호해주는 장교도 있었습니다. 정식 재판과는 달리, 판결은 함장의 그날 기분에 따라 유죄냐 무죄냐, 꾸지람으로 끝나느냐 피투성이 채찍질로 끝나느냐가 결정되었습니다. 채찍질은 cat-o-nine-tail이라는, 아홉 가닥의 가는 밧줄로 된 채찍으로 가해졌는데, 평소에 이 구승편은 붉은 색 자루에 담아 두었다가 일요일에 일이 생기면 꺼내 들었습니다. 이로부터 let the cat out of the bag (비밀을 밝히다)라든가, do not have room to swing the cat (할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공간이 좁다) 라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맛 좀 볼텨 ?)
그래도 해군의 경우는, 군법 재판에 의한 채찍질이 아니라면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의 영국 해군 복무 규정에 따르면 함장이 수병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의 채찍질 수는 불과 12대에 불과했습니다 ! 그 이상은 정식 군법 회의를 거친 후에야 형벌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친 바다 사나이들을 이 정도로 겁먹게 할 수는 없었는지, 대개의 경우 이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 채찍질이 가해졌습니다. 그 정당화는 이랬습니다. 가령 수병이 술에 취한 죄를 지었다면, 그렇게 술에 취한 것이 곧 건방짐(insolence)으로 이어질 것이고, 또 당연히 임무를 게을리 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3가지 죄를 한꺼번에 지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12 X 3 = 36대를 때리곤 했답니다. 이 채찍질은 보조 갑판장(bosun's mate)들이 수행했습니다.
(윽 시발 아야 시발 어익후 C발)
문제는 육군이었습니다. 육군 규정에는 지휘관이 내릴 수 있는 채찍질의 최대 수치는 무려 1,200대였습니다. 숫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닙니다. 120대가 아니라 1,200대 맞습니다. 이 정도면 죽으라는 이야기지요. 실제로 이렇게 채찍질을 받다가 쇼크로 죽어버리게 되면, 그 시체에다 마저 1200대를 다 때린 뒤에야 풀어주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채찍질에는 군의관이 동석해서, 혹시 벌을 받는 병사가 죽을 지경이 되면 일단 채찍질을 멈추고 치료를 한 뒤, 어느 정도 나아서 채찍질을 맞아도 될 정도가 되면 나머지 채찍질을 마저 채워 맞았습니다.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이 정도 채찍질이면 때리는 사람도 지치기 때문에, 여러 명이 25씩 번갈아가며 때렸습니다. 육군에서는 채찍질 담당이 다소 의외로 drummer, 즉 고수였습니다. 의외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를 돌보는 의무를 가진 사람이 바로 이 고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 말로 병주고 약주고 하는 직업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
실제로 1,000대 이상의 채찍질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 있었습니다. 웰링턴 휘하에서 싸운 스페인 주둔 영국군 병사들 중 50여명이 1,000대 이상의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다들 죽었을까요 ? 그야 모르지요. 하지만 가끔씩 수퍼맨이 있기는 있었다고 합니다. 제95 라이플 연대의 토마스 메이베리(Thomas Mayberry) 하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친구는 부대원들의 생필품을 사라고 맡겨진 200 파운드를 도박질을 하다 날려먹은 죄로, 700대의 채찍질에 처해 집니다. 당시 관행에 따라, 이 메이베리 하사는 군에서 불명예 제대를 하면 벌을 받지 않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하사관 계급에서 강등됨에도 불구하고, 메이베리 하사는 벌을 받겠다고 나섭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이 친구는 700대를 한꺼번에, 그것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다 받아낸 뒤, 걸어서 형장을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는 이런 채찍질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떠한 형벌이 있기는 있었을텐데, 제가 독서가 부족해서 잘 모르겠군요. 다만 명령 위반은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총살에 처해지곤 했습니다.
(혹시 우리 부대 내에 구타같은 거 있나 ? - 어익후 그럴리가요 폐하, 우린 무식한 영국놈들이 아니쟎습니까 ?)
위에서 이야기 되었던 것은 장교나 하사관이 부하들에게 내리는 정식 처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즘 군대에는 구타 없다'라고 할 때의 그 구타는 고참 병사들이 신참 병사들에게 가하는 사적인 폭력이지요. 당시에도 그런 구타가 있었을까요 ?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네요. 그러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당시의 계급 구조 때문입니다. 당시 일반 병사들의 계급은 우리나라 군대처럼 이병-일병-상병-병장 이런 식으로 '연공 서열'에 따른 승진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계급은 Private (일병) - Corporal (상병) - Sergeant (하사관) 식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구조였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복무 기간이 길다고 승진하는 경우는 없고, 뭔가 공로를 세우거나 장교들의 눈에 들었을 때만, 그것도 그 계급에 해당 하는 자리에 공석이 생겼을 때만 승진이 되었기 때문에, 십여년을 복무한 고참이라도 그냥 일병 계급으로 있는 경우도 수두룩 했습니다. 자기가 1년 일찍 들어왔다고 신참을 마구 때리다가, 그 신참이 뭔가 일을 잘해서 상병으로 승진이라도 덜컥 해버리면, 정말 난감하지 않았겠습니까 ?
(찰스 다윈이 탔던 비글호의 미드쉽맨 숙소(midshipman's berth), 항상 이렇게 즐거운 분위기였을까요 ?)
하지만 승진 구조가 연공 서열식이라면 어땠을까요 ?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졌겠지요. 이렇게 동료 간의 폭력에 가장 취약한 계급은, 의외로 해군의 midshipman, 즉 사관 후보생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10대 초반에서 20대 초반까지, 간혹 20대 후반까지의 나이대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고참 미드쉽맨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미드쉽맨을 학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해군의 전통에 따라, 이들은 midshipmen's berth 라는 그들만의 밀폐된 좁은 숙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왕고참은 어린 애들을 왕처럼 부려 먹고 갈취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선후배 관계는, 결국 그대로 이어져 고참이 먼저 중위 시험을 치르고 정식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현역에서도 그 서열이 지켜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꼼짝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C.S. Forester의 나폴레옹 시대의 해양 소설 'Midshipman Hornblower'의 첫편이 바로 이 미드쉽맨으로서 당하는 신참의 비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소설에서는 주인공 혼블로워가 고참에게 엉덩이를 단검집으로 두들겨 맞고, 세탁물을 빼앗기는 등 시달림을 당하다, 이를 못견디고 자살을 해버릴까 고민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결국은 이대로 죽을 바에야 하는 심정으로, 꼬투리를 잡아 고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이어지지요.
(솔직히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책이 이 Midshipman Hornblower 입니다.)
저도 아들이 있는 몸으로서, 부디 우리 군대나 경찰에서, 구타라는 악습이 정말 완전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PS1. 미군에도 구타가 있을까요 ? 있습니다. 흔히 한국군에서 애들을 가장 겁을 주며 윽박지르는 곳이 사격장인데, 그때 하는 말이 '미군도 사격장에서는 구타가 허용된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정말 허용되더군요. 제가 복무한 부대에서, 모 사격장으로 M-16 사격을 나갔는데, 개념없는 미군 sergeant 하나가 (아마도 람보 흉내를 꼭 내보고 싶었는지) 자동에다 걸고 사격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통제를 맡고 있던 다른 sergeant가 같은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다리를 냅다 군화발로 걷어차더군요. 얻어맞은 친구는 계면쩍은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던데요 ?
PS2. 저 19세기 초 영국군에 복무했던 수퍼맨 메이베리 하사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 메이베리는 일병으로 떨어진 뒤, 1812년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의 바다호스(Badajoz) 요새 공략전에 참전합니다. 여기서 그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싸워, 최소한 7명의 적병을 해치웁니다. 이미 여러 부위에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맹렬히 싸우는 그의 활약에 감탄한 중대장이, 다시 하사관으로 올려 줄테니 제발 후방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권하는데도 그를 거부하고 프랑스군이 밀집 방어를 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마침내 전사해버립니다. 좀 씁쓸한 결과인가요 ? 이런 걸 보면 정말 앵글로 색슨은 전투민족 같습니다...
(이 처절했던 바다호즈 요새 공략전은 Bernard Cornwell의 Sharpe's Company 편에서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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