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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그리고 두 미니 국가의 엇갈린 운명

by nasica-old 2010.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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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같은 직장인이 한달에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은 사실 제한되어 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애가 잠이 들고나면 슬그머니 컴퓨터 게임을 시작하는 게임광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 출판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컴퓨터 게임을 불법화하는 것이 좋은 효과가 있을 듯 합니다.)  게다가 회사라는 곳이 별로 대단한 일을 하는 곳이 아니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진을 빼놓는 그런 효과를 냅니니다.  밤에 집에 와서도 뭔가 복잡한 책을 읽으면서 두뇌를 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한달에 책 2~3권 읽기도 힘겹습니다.  그래서 (저도 블로그치고는 글이 긴 편입니다만) 길고 두꺼운 책보다는, 짧고 재미있는 책이 더 손에 잡힙니다.  최근에 그런 책을 발견했습니다.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물의 작가는 1915년 아일랜드 태생인데, 어릴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기자 생활을 한 레너드 위벌리(Leonard Wibberley)라는 사람입니다.  1983년에 이미 사망한 분이지요.





이 소설의 자세한 스토리 라인을 여기서 풀어놓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만, 간단히 배경을 설명하면, 백년전쟁 당시 용병 생활을 하던 한 영국인 기사와 그 수하인 영국인 장궁병(long bow men) 수십명이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 지대의 한 공국(duchy)을 점거하여 독립 선언을 한 이래로, 인구 수천명의 약소국으로 존재해온 그랜드 펜윅이라는 가상의 나라가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비록 포도주와 양털이 주요 산업이고 군대는 아직도 장궁을 쓰는 근세 이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1950년대에는 포도주 무역 문제로 한때 미국을 침공하여 정식으로 미국의 정식 항복을 받아낸 역사가 있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국가입니다.




(원래 이 소설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라는 신문에 연재로 실리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엉뚱한 내용을 담은 유쾌한 소설은 이 글이 씌여진 시대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가령 '뉴욕 침공기'에서는, 경제가 파탄이 난 그랜드 펜윅이, 미국에 일부러 패배하여 항복한 뒤 패전 국가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받아낼 목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묘사됩니다.  당시 서독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풍자한 것이지요.

 

이 소설은 1950년대 당시 꽤 인기를 끌었던 모양으로, 영화도 만들어지고 TV 시리즈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피터 셀러즈라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 혼자서 총리대신도 하고, 병사도 하고, 심지어 여왕 역할도 했습니다.)



(이들은 미국을 침공하기 위해서 일단 프랑스까지 고속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제가 놀란 부분은 원래 언급한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 시장 침탈기' 편입니다.  이 소설은 1981년에 씌여진 것이라, 당시의 오일 쇼크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미국 고위층이 석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체 에너지에 대해 회의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회의에서 논의되는 부분이 상당히 놀라왔습니다.

 

 

 

(국내에서는 뜨인돌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분명히 1981년에 출간된 소설인데도, 2010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여러가지 대체 에너지에 대한 가능성과 장단점에 대해서 현재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이야기되고 있더군요.  석탄은 매장량은 풍부하지만 이산화탄소와 오염 물질이 많이 나오는데다, 생산 및 공급 비용이 많이 들고, 바이오 연료를 대량 생산하게 되면 제 3세계에 식량 위기가 올 것이라는 등 최근 신문 방송에서 본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난 30년 동안 대체 에너지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최근 들어 새로 개발된 기술처럼 포장되었지만 사실 이미 수십년 전부터 그 한계가 인식되어 왔던 바이오 연료...)



애석하게도, 이 소설은 뭐 엄청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어쨋거나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풍자 소설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이런 미니 국가라는 것도 참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더군요.


유럽에는 소위 '미니 국가'라는 독립 국가들이 몇개 존재합니다.  유명한 것들이 이 산 마리노, 리히텐슈타인, 안도라, 몰타 등등입니다.  실은 예전에 유럽에는 이런 미니 공국들, 그러니까 kingdom이 아닌, princedome이나 duchy 같은 것들이 꽤 많았는데, 이런 저런 전쟁통에 대부분 다 덩치 큰 왕국들에게 흡수 합병되었지요.  특히 중부 유럽에 있던 소국가들은 대개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시에 다 흡수되어 버렸습니다. 




(제국이 시작되고, '황태자의 첫사랑'같은 낭만은 이제 끝...)



(그러나 정작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영화의 배경은 독일 제국 탄생 이후 19세기 말이라는 아이러니...)



나폴레옹 전쟁 때 없어진 미니 국가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구사(Ragusa) 공화국입니다.  현재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시를 중심으로 한 독립국이었던 라구사 공화국은, 오토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도 위태위태한 독립을 유지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그야말로 코딱지만했던 라구사 공화국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습니다.




(라구사 공화국은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아드리아 해의 요지에 위치했습니다.  일단 돈 벌기엔 좋을지 몰라도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좋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네요.)



애초에 프랑스 혁명정부와,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은 유럽의 미니 공화국들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프랑스 대혁명은 공화국 수립을 기본 목표로 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두고 프랑스와 러시아-오스트리아가 벌이던 각축전 속에서, 1806년 러시아 함대가 두브로브니크 항구를 봉쇄하고 1달 동안 포격을 가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 동안 시내에 떨어진 포탄만도 3천발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우리에게 항복하면 러시아군도 무찔러주고, 우리는 그냥 군대의 자유 통행권만 가지겠다'고 제안을 하며 근처에 대기합니다.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는 아드리아해의 일리리아 지방까지 진출해있었거든요.  그래서 러시아도 이 라구사 공화국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니, 사실 라구사 공화국을 프랑스가 구해준다기 보다는, 프랑스가 라구사 공화국에 재앙을 가져온 셈이지요.





(지금도 유명한 관광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 시의 모습.  저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던 라구사 공화국은 결국 프랑스군에게 항복합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함대는 철수할 수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프랑스군은 약속을 어기고, 항구를 봉쇄한 뒤, 두브로브니크 시에 압력을 가해 시내를 점거합니다.  이 날,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성벽의 깃대와 공화국 문장(coat of arms)을 모두 검게 칠해버렸다고 합니다.  참고로, 라구사 공화국의 모토는 라틴어로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 즉 '자유는 황금보다 더 소중하다' 였습니다.


프랑스는 라구사 공화국을 당시 프랑스의 속국이던 '이탈리아 왕국'으로 흡수했다가, 1808년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인 마르몽(Marmont)은 이를 다시 프랑스 직할 영토인 일리리아 지방으로 편입하여, 완전히 프랑스 영토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르몽은 이때 라구사 공작((Duc de Raguse)이 되지요.  하지만 1814년, 나폴레옹이 패퇴할 때, 마르몽은 나폴레옹을 배신하여 연합국 측에 붙어, 부르봉 왕가의 복귀에 협조합니다.  그로 인해 프랑스어로 ragusade라는 단어는 반역, 배신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라구사 공화국으로서는 정말 억울하게도 그 이름이 안 좋은 단어와 얽히게 된 것이지요.




(라구사 공작 마르몽)



1815년 나폴레옹 패망 이후, 라구사 대표는 비엔나 회의에서 라구사 공화국의 독립을 요구하려 했으나, '어르신들 노는 물에 꼬꼬마가 왠 말이냐'라며 회의 참석은 커녕 문전 박대를 당했고, 결국 달마티아 공국, 그러니까 결국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영구히 접수당해 버리고, 역사에 영원히 묻혀져 버립니다.


그에 비해 훨씬 운이 좋았던 미니 국가도 있습니다.  산 마리노(San Marino)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탈리아 내의 아페닌(Apennine) 산맥에 있는 이 60 제곱 킬로미터 넓이의 미니 국가는, 전설에 따르면 기원 후 301년 만들어진, 현존하는 국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라고 합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성 마리누스(Marinus)라는 석공이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교회를 짓고 도시를 건설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국가는, 저 위에서 언급된 소설 속의 미니 국가 그랜드 펜윅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일단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지형도 험하고, 땅도 좁고, 아무 자원도 없어서, 어느 누구도 점령하고픈 욕구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독립 유지의 근간이었거든요.  1631년에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도 독립을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두메산골이라고는 해도, 경치는 정말 좋군요.)


산마리노 공화국 최대 위기는 역시 나폴레옹의 1797년 이탈리아 침공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이런 소규모 공화국 정도는 신경도 안쓰고 없애 버릴 수도 있었으나 (뭐 총을 쏠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이 유서 깊은 공화국의 자유 정신을 존중한 나폴레옹에 의해, 그 독립이 존중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사실은 당시 공화국 섭정 중 한명이던 안토니오 오노프리(Antonio onofri)라는 사람이 나폴레옹을 방문하여 적절한 아부와 함께 잘 구슬린 덕택에 (나폴레옹은 특히 1797년에는 허영심에 들뜬 젊은 촌뜨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노프리가 나폴레옹에게 뭐라고 아부를 했는지 몰라도,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던 나폴레옹은 오히려 산마리노 공화국의 영토를 넓혀주겠다고까지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산 마리노 공화국 정부는 현명하게도, 그랬다가 나중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는 주변 국가의 도전에 휘말려 독립을 위협받을까 두려워하여, 이 제안을 사양합니다.  욕심이 없어야 장수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 것이지요.




(산마리노 지도를 보면, 여기에 뭐 영토를 몇배 더 늘려줘봐야 여전히 지도에서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아,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 노란색 부분이 산마리노가 아닙니다...)



또 한번의 위기가 산 마리노를 찾아온 것은 19세기 중후반의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었습니다.  이때 산마리노 사람들은 정말 현명한 판단을 다시 내립니다.  즉, 통일 운동하던 애국지사라는 사람들이 피난오면 잘 숨겨주고 먹여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쥬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고 싶다는 산마리노 주민들의 청원을 승낙합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 장군)



산마리노는 제1,2차 세계대전을 모두 중립 상태로 무사히 보냅니다.  유일하게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1944년 이탈리아 항복 이후 독일군이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발생합니다.  정작 독일군은 이런 외진 촌구석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이미 독일군이 산마리노를 점령하여 탄약을 비축해놓았다고 오판한 영국 공군이 산마리노에게 영국제 폭탄의 맛을 보여줍니다.  이 사고로 6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1944년, 치열한 전쟁 속 철통같은(?) 산마리노의 국경 경비...)


 

현재 산마리노는 이탈리아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국가 GDP의 50%가 관광 수입에서 나오고, 와인과 치즈가 주요 산업입니다.  형식적인 군대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실제적인 국방은 이탈리아가 알아서 해주고 있고, EU 회원국도 아니면서 유로화는 쓰고 있습니다.  저 위 소설 속에서 경제 파탄의 위기에 몰린 그랜드 펜윅 사람들이 궁리하던 것처럼, 국가 재정에 돈이 필요하면 한정판 기념 우표를 발행하여 돈을 벌어들이기도 합니다.





(나라가 예쁜 것도 있지만, 사실 다른 산업이 거의 없어서 GDP의 50%가 관광수입인 모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만주벌판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등의 넋두리를 종종 듣습니다만, 이런 미니 국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덩치가 큰 나라라고 그 국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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