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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로마 병사들과 나폴레옹 병사들이 즐겨마시던 음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

by nasica-old 2009.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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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을 한줄 요약하면 군국주의 왕국의 왕이 평화로운 왕국을 침공하지만 평화 왕국은 공주의 지도 하에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대응했고, 결국 침공군도 무기를 버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최근 웹에 떠돌던 모 단체의 전쟁은 군대가 일으키는 것이므로 군대만 없애면 전쟁도 없어진다는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이야기입니다.  동화는 사실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화에서 군국주의 왕국의 왕이 아침에 일어나서 먹는 군국주의식의 질박한 아침식사가 묘사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순무와 식초를 탄 물입니다.  순무까지는 좋다고 치지요.  전에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배급 식량 (http://blog.daum.net/nasica/6862357 ) 편에서 묘사한 것처럼, 원래 무는 군대와 숙명적인 관계를 가진 채소니까요.  그러나 저는 왜 그냥 물을 마시지 않고 식초를 타서 마실까 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식초, 즉 vinegar에 vin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아실 수 있듯이, 원래 유럽에서 식초는 쉰 포도주로 만드는 것이지요.)

 


왜 정말 물에 식초를 타서 마실까요 ?  옛날에 어떤 신문 칼럼에서 유럽은 수질이 좋지 않아 모짜르트도 여행할 때 물에 식초를 타서 마셨다라는 글을 슬쩍 본 기억이 납니다.  식초를 물에 타면 수질이 좋아지나요 ?  웹을 열심히 뒤져보았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는 사실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유럽은 정말 물 속에 석회질이 많아서, 깨끗한 시냇물도 뿌옇고 수도물에도 석회질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 덕분에 (또 수도물 값이 비싸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설거지 문화도 꽤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흐르는 수도물에 그릇을 세제로 닦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싱크대에 물을 받아서 세제를 풀고, 거기서 그릇을 닦은 다음 마른 행주로 접시의 물기를 닦아내면 설거지 끝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하면 설거지가 깨끗이 안될 것 같은데, 오히려 유럽 애들은 우리 식으로 젖은 접시를 그냥 건조대에 올려놓는 것을 무척이나 불성실한 것으로 받아들인답니다.  물에 석회질이 많다보니 물방울이 접시에서 마르게 되면 석회 얼룩이 남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릇이나 남비에 달라붙는 석회를 없애는 데는 식초가 최고라고 하네요. 

 

그러나 모짜르트가 물에 식초를 타 마신 이유는 꼭 석회석 때문이라기 보다는, 맛과 위생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식초의 산이 박테리아 증식을 약간 억제시켜주는 효과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식초의 신 맛이 아무래도 석회질이 많은 씁쓸한 물 맛을 좀 낫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식초를 물에 타마시는 전통은 사실 꽤 오래된 것입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보면 로마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대() 카토(Cato)의 음료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카토는 무척이나 검소하고 질박한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군중에서는 식초를 탄 물을 마시고, 몹시 피곤할 때는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고 합니다.  저처럼 술을 잘 못하는 사람은 왜 피곤한데 더 피곤하게시리 술을 마실까라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만, 사실 이 구절의 진짜 의미는 정말 피곤할 때만 비싼 포도주를 마셨고, 평소에는 싼값에 구할 수 있는 시어 버린 포도주, 즉 와인 식초를 물로 묽게 해서 마실 정도로 검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검소한 것과 여성 편력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신 정력왕+난봉꾼인 마르쿠스 카토)

 


원래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지중해 지방은 포도주를 요즘 커피나 녹차처럼 매우 일상적인 음료로서 마셔댔거든요. 물론 포도주를 그대로 마시지는 않았고, 보통 물 반 포도주 반으로 묽게 해서 마셨습니다.  포도주를 100% 그대로 마시는 것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행위또는 매우 사치스러운 행위로 인식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어느 왕은 스키타이인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습관에 따라 물로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헤로도투스에 의해 전해집니다.

 

카토가 마신 와인 식초를 탄 물은 카토만 마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로마에서는 일반 병사들이나 서민들이 흔히 마시는 음료였고, 이름도 있었습니다.  바로 포스카(posca)입니다.  이 포스카라는 음료는 신 포도주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허브를 넣어서 향을 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 음료를 맛 보셨습니다.  다만 드신 상황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태에서였으니까요.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에서 예수님이 갈증에 고통스러워하자, 로마 병정들이 몰약을 탄 신 포도주를 스폰지에 적셔 입술에 대주었다라고 성경에 씌여 있지요.  다만 예수님은 그 맛을 보시고는 고개를 돌려 드시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고보면 저 로마 병사 착한 사람이라는...)



저는 예전에 그 구절을 읽으면서 악독한 로마 병정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괴롭히려고 물은 주지 않고 몹쓸 약까지 탄 쉬어터진 포도주를 마시게 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고 자기들이 마시던 포스카를 나름대로는 좋은 의도로예수님에게 제공한 것이더군요.  다만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보통의 포도주를 주로 드셨기 때문에 그런 질낮은 포스카는 입에 맞지 않으셨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방할 때 세례 요한은 들판에서 메뚜기를 먹고 사는데 예수란 자는 떡과 포도주를 배불리 먹는다고 비난했었지요.

 

이렇게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습관은 중세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십자군 연대기를 보면 프랑스 왕이 부하 기사에게 너는 왜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고 그냥 마시느냐?’ 고 묻자, 그 기사가 의사가 내 간은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를 마셔도 될 정도로 튼튼하다고 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중세까지도, 포도주에는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때쯤 되면 슬슬 그냥 100% 포도주를 마시는 사치스럽고 퇴폐적인관습이 슬슬 생기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나폴레옹은 치킨 마렝고의 전설과는 달리, 실제로는 미식가가 아니라서 음식이나 식사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답지 않게 그냥 15분 정도면 뚝딱 한 사발 먹고 일어났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포도주는 좋은 것을 무척이나 즐겼는데, 주로 샹베르탱 포도주를 좋아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황제까지 되가지고 포도주에 꼭 물이나 타마셔야겠냐 ?)


 

하지만 그건 프랑스의 황제 이야기고, 시골 농가 출신의 하급 병사들도 샹베르탱 포도주를 식사 때마다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와인 열풍이 불면서 와인이라는 것이 뭔가 대단히 고상한 취미처럼 되어 버렸지만, 사실 와인이라는 것은 포도를 농부들이 (제대로 씻지도 않은) 발로 밟아 으깨 만든, 그냥 술이거든요.  물론 나폴레옹이 즐기던 고급 포도주도 따로 있었겠지만, 독일군이건 프랑스군이건 병사들이 손에 넣을 수 있던 포도주는 우리나라 막걸리 수준의 막술이었습니다.  막술이건 뭐건 술이면 다 좋긴 했는데, 문제는 보존이 제대로 안된 싸구려 와인은 쉽게 시어터져서 식초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로마군의 포스카 재료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부하 병사들이 이런저런 마을에서 (돈도 안내고)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포도주의 품질은 이런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돈을 안내고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시면 사전에서 plunder라는 단어를 찾아보세요.)

 


, 포스카 재료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포스카를 만들어야지요.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플루타르크 같은 것은 읽지 않았기 때문에 포스카가 뭔지도 몰랐지만, 시대에 상관없이 병사들은 다 똑같았습니다.  , 나폴레옹의 병사들도 그런 포도주로 나름대로의 음료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영어로는 mulled wine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식 이름은 모르겠습니다만, 와인으로 그런 음료(실은 처음에는 약이라고 만들었는데)를 만든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포크라스(Ypocras, Hypocras)라는 음료도 이와 비슷한 음료입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포도주에 (물론 질이 안 좋은 포도주지요) 설탕과 이런저런 향료(계피, 바닐라, 허브)를 집어넣고 약한 불로 데우는 것입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포도주의 알코올이 다 날아가버리지 않도록 섭씨 70도 이상으로는 끓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알코올 빠진 음료를 무슨 맛으로 마시겠습니까 ?   하지만 당장 먹을 건빵 한 조각도 제대로 못 구하던 병사들이 계피나 바닐라 같은 향료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개는 그냥 포도주에 설탕 정도만을 넣었습니다.

 

사실은 설탕은 커녕 신 포도주조차도 날이면 날마다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군이 매일 홍차를 끓여 마시듯 프랑스군이 날마다 설탕을 넣은 포도주를 끓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운수가 좋아서 설탕과 포도주를 구하면, 특히 쌀쌀한 날씨라면 반드시 그런 mulled wine을 끓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1806년 프러시아의 예나(Jena) 전투 직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근처에서 노획한 많은 양의 (질낮은) 포도주와 설탕으로 포도주를 끓여 마셨습니다.




(예나 전투는 10월에 벌어졌기 때문에 꽤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몇 년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 근처에서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희생된 프랑스 병사들의 집단 매장지가 발굴되었습니다. 치과 의사들이 거기서 발굴된에서 유골의 치아를 검사해보니, 일부 병사들의 치아는 당시 평균 이상으로 충치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자주 설탕을 (하다 못해 사탕무 조각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모양이지요 ? 

 

이렇게 설탕을 넣은 mulled wine은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고, 유럽에서는 중세시대부터 만들어 마셨던 음료입니다.  고대 로마의 병사들이 마시던 포스카와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설탕을 넣었느냐는 점이겠지요.  중세에는 설탕이 꿀보다 더 귀했기 때문에, 귀족들이 마시는 mulled wine에는 설탕을, 서민들이 마시는 것에는 꿀을 넣었다고 하네요.  지금도 북유럽 쪽에서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즐겨 마시는 음료라고 합니다.




(북유럽이나 독일에서 마시는 멀드 와인인 Glogg, 또는 Gluhw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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