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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의 치수 (治水) 이야기

by nasica-old 200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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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축구선수 이영표가 인터뷰한 내용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원래 이영표는 강원도 사람인데, 초딩때 안양으로 이사를 왔었지요.  이영표가 안양에서 크게 놀란 점은 바로 채소였답니다.  사람들이 시장에서 돈을 내고 채소를 사먹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영표는 '채소는 밭에서 뽑아먹으면 되는 건데 이 사람들은 그걸 돈을 내고 사먹네 !!' 라고 놀랐답니다.




(강원도 촌X 진짜 대성했지요... 어이구 부러워라...)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 어떤 선생님이 '외국에서는 식당에서 물도 사서 마신다. 우리나라도 몇십년 지나면 그렇게 물을 사마실 날이 올지도 모른다'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불과 10년만에, 그러니까 제가 대학다닐 때 우리나라에서도 생수 시장이 형성되었지요.


나폴레옹 시대는 어땠을까요 ?  당시에도 사람들이 물을 사다 마셨을까요 ?  도시에는 수도가 있었을까요 ?  수도가 없었다면 도시민들은 어떻게 물을 구했을까요 ?


전세계의 대도시치고 근처에 큰 강이 없는 도시가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살기 위해서는 비단 식수로서뿐만 아니라, 위생이나 건축, 공업 등에 대량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서울도 그렇고, 뉴욕도 그렇고, 런던이나 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온 센느 강 사진이 아닐런지... 저도 정말 더 나이먹기 전에 한번 가봐야 하는데...)



하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이 다스리던 빠리에서, 센느강의 물을 식수로 쓸 용자는 없었습니다.  런던의 템즈강은 물론이고, 센느강도 온갖 생활 오물과 분뇨, 그리고 도살장, 가죽 공장 등에서 흘러나오는 오수로 오염된 상태였거든요.  수차로 이런 강물이 빠리 시내에 공급되기는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당 청소 등에나 쓸 수 있는 물이었습니다.  더 나빴던 것은, 가끔씩 홍수가 나서 센느강이 범람했다는 것입니다.  그 X물이 아름다운 빠리 시내로 흘러든다고 생각해보십시요.  실제로 1801~1802년에는 최악의 범람이 일어나, 아름다운 생 오노레(Saint Honore) 가의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빠리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빠리에는 하수 처리 시설이 변변치 않았으므로, 대로 중앙에는 덮개도 없는 하수구가 파여있었고, 비포장 도로가 많아 온 길바닥이 진흙과 분뇨투성이였다고 합니다. 




(현대의 생 오노레 가의 모습)



빠리 시민들은 시내 몇군데에 있는 샘 또는 우물에서 식수를 공급받았습니다.  언듯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요 ?  수십만명의 빠리 시민들이 불과 몇개의 샘이나 우물에서 물을 받아마시다니요 ?  사실 이 문제는 12~13세기부터 아무도 해결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빠리 시의 인구는 나폴레옹보다 약 100년 전인 루이 14세때 약 40만이었는데, 1817년 경이 되면 약 70만이 넘게 됩니다.  100년 사이에 거의 2배로 성장을 한 셈인데요, 인구가 2배가 되면 당연히 물 소비량은 그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당연히 빠리 시내에서 식수의 가격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았습니다.  우리가 요즘 가정에서 흔히 사마시는 2리터짜리 6개들이 생수 한팩, 그러니까 약 12리터의 식수에 대해, 당시 빠리 시민들은 약 2수(sous)의 비용을 내야 했습니다.  2수라고 하니까 감이 안잡히시지요 ?  당시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봉급이 많았을까 ?  ( http://blog.daum.net/nasica/6862363 )편을 참조하시기 바라고요, 여기서는 간단히 이렇게 비교를 해보지요.


X다수 또는 X비앙 같은 고급 제품 말고, 중저가 생수 2리터짜리 6개 한팩의 가격이 대략 3500원이라고 보시지요.  그러면 생수 1리터의 가격이 대략 291원 정도되는 건데요, 요즘 일반적인 일당이 8만원이라고 보면, 하루 일당으로 약 274리터의 생수를 사실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당시 빠리의 일반 노동자들 하루 임금은 약 1~2 프랑이었습니다.  그냥 평균 내서 1.5프랑, 즉 30수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당시 빠리 노동자는 하루 임금으로 약 180리터의 물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보다 약 1.5배 정도 더 비싼 돈을 내고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수질검사도 안되고, 편리한 페트병에 담겨 있지도 않고, 좀 냄새도 나는 의심스러운 물을 말이지요.




(1789년 바스티유를 습격한 시민들의 몸에서는, 또 수비대 병사들의 몸에서는 어떤 냄새가 났을까요 ?)



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 빠리 시민들의 위생 상태는 가히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일단 당시 사람들은 목욕이라는 것은 정말 연례 행사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지요.  깨끗한 물이 부족했으니까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용변 후 '뒷물' 정도로 위생을 처리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역대 어떤 프랑스 왕도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펼칩니다.  사실 나폴레옹이 발주를 낸 많은 빠리 개선 공사 중에서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혜택을 많이 주었다고 합니다.  즉, 약 100km 이상 떨어진 우르크(l'Ourcq) 강에서부터 운하를 파서, 그 물을 빠리 시내에 식수로 공급했던 것입니다.  이 공사는 1802년부터 계획되어 1804년 실제 삽을 떴고, 1808년 12월 2일 아우스테를리츠 전승 기념일에 그 완공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사실은 공사가 덜 완공되어 있었고, 그 후로도 공사는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수로 공사는 빠리지앵들에게 큰 혜택을 주어, 비로소 물을 풍부하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운하는 뱃길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MB와 나폴레옹은 독재스러운 정치 스타일도 그렇고, 운하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데요 ?)




(20세기초 우르크 운하의 모습)



이렇게 신선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시민들이 얼마나 좋아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제 매일, 또는 매주 하게 되었느냐 ?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비평가였던 프티 라델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풍부한 물은 처음에는 사용을 조장할 것이고, 그러다가 로마의 목욕탕처럼 오용될 것이다.  자기 집에서 물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동양적 사치가 발전되면 결국 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것이다."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몰라도 므슈 라델은 운하 개통 이후로도 목욕을 매일 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이지요 ?




(Emmanuel Oberhausen 작 '로마의 목욕탕'  어우, 제가 보기엔 좋기만 한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거죠 ?)



그나저나 이런 대공사에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요 ?  초기 예측으로는 약 6백만 프랑이 들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려 3천8백만 프랑의 돈이 소요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와인에 특별 소비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려 했으나, 결국 민간 자금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고, 그 댓가로 99년간 선박 통행세 징수권을 민간업자들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일단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복고 왕정도 나폴레옹과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민간업자들에게 운하의 완성과 유지 보수를 맡겼습니다.


요즘도 빠리가 이 운하를 식수원으로 이용하냐고요 ?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선박들이 다니는, 노출된 물을 마시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  현재도 빠리 시의 비(非)음용수물 공급량 절반 정도를 이 운하가 담당하기는 하지만, 식수로 쓰기에는 수질이 너무 나빠졌다고 합니다.  이 운하는 지금은 관광선이 운항하는, 관광 용으로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우르크 운하, Meaux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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