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시대, 전사자들의 장례식

by nasica-old 2009. 8. 16.
반응형



(브래드 피트, 아니 아킬레스의 화장식)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전쟁 영웅들은 흔히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의 엄숙한 장례식이 그런 옛날 이야기의 절정에 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루스의 장례식이지요.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이 친구는 전사가 아니라 암살이긴 하지만)의 경우도 그렇고요.  삼국지의 관우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혼상제라고, 장례식이 모든 문명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시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전쟁에서 승패의 판가름은 어느 쪽이 전사자들의 수습을 위해 휴전을 요청하느냐였습니다.  그런 요청을 받는 측이 전투 현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요.  아에고스포타미 해전으로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냈던 스파르타의 명장 리산드로스는 어떤 도시를 공격하다가 성벽 바로 아래서 전사했는데, 전황은 스파르타군에게 무척 유리했지만, 그의 시체가 바로 성벽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왕은 어쩔 수 없이 적의 승리를 인정하고 휴전을 요청하여 그의 시체를 수습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적의 시체를 훼손하는 것이 적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자 잔혹 행위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수습한 시체를 화장하여 뼈만 남긴 뒤, 그 뼈를 (우리처럼 부수어 가루로 만들지 않고) 재 속에서 주워모아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섞은 항아리에 담은 뒤 묻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무척 돈도 많이 들고 복잡한 과정이었지요.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포위된 아테네에 역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는, 화장용 장작을 구하지 못한 가족들은 다른 가족들이 진행 중인 화장식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불 속에 자기 가족의 시신을 던져 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답니다.


나폴레옹 전쟁 때의 전사자/병사자들의 숫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았는데요, 과연 이때의 전사자들의 시체 처리는 어땠을까요 ?  또, 장교와 병사들간의 차이는 어땠을까요 ?


기나긴 나폴레옹 전쟁 중에 전사한 수많은 병사들과 장군들 중에서, 그 장례식이 문학 작품으로 승화되어 19세기 영미 양국의 교과서에 실린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1809년 스페인의 코루나(Coruna) 전투에서 전사한 존 무어 (John Moore) 경이 그 주인공입니다.




(잘 생긴 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군은 전공보다는 병사들을 아꼈던 인간적인 면모로 유명했습니다.)



1808년 겨울 당시 스페인을 침공하던 나폴레옹군에 맞서 스페인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을 이끌고 상륙했던 육군 중장 무어 경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 나폴레옹이 스페인 전역을 제패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나폴레옹군의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해야 했던 무어 경은 스페인 북부 해안의 코루나 시로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을 치게 되는데, 그 뒤를 프랑스 육군 원수 술트(Soult)가 이끄는 프랑스 부대가 바짝 뒤쫓습니다. 


코루나 시에 도착한 무어 경은, 당혹스럽게도 16,000명의 영국 원정군을 철수시킬 영국 수송선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프랑스군 병력이 도착해서 시 외곽을 둘러싸게 되지요.  프랑스군에게는 영국군의 철수를 방해하기에 충분한 11문의 중포가 있었습니다.  이건 완전히 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코루나 철수 작전의 긴박한 전황...)



무어 경은 프랑스군이 항구를 포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지 못하도록 시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영국 함대가 도착하여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는 사이 함대가 도착했고, 철수가 가능해졌습니다만, 그 전투 과정 중에 무어 경은 대포알에 왼쪽 어깨를 직격당하여 처참한 부상을 입습니다.  그는 영국군의 안전한 철수가 가능하도록 프랑스군의 공격을 물리친 것을 확인하고나서 숨을 거둡니다. 


자, 이제 아침이면 (어쩌면 프랑스군의 포격 하에) 배를 타고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국 원정군 최고 사령관인 존 무어 경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사실 별로 로맨틱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급한 대로 시 외곽 성벽 아래에 대충 묻은 뒤 배를 타고 떠나 버렸거든요.  창졸간에 관을 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군용 망또에다 시신을 둘둘 말아서 묻었다고 합니다.  엄숙한 장례식 행사나 하다 못해 조총(弔銃) 발사도 없었습니다.





(존 무어 경의 죽음은 나름대로 당대 예술가들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암장하는 것 같지요 ?)



이렇게 초라한 장례식일 수록, 근사한 언어로 미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의 위력입니다.  이 존 무어 경의 야전 매장에 대해 1817년 찰스 울프(Charles Wolfe)라는 아일랜드 학생이 쓴 시가 있습니다.



NOT a drum was heard, not a funeral note,  북소리도 없었고, 조사(弔辭) 한마디도 없었네

As his corse to the rampart we hurried;  우리는 그의 시신을 성곽 쪽으로 급히 운구했지

Not a soldier discharged his farewell shot  병사의 조총(弔銃) 한 방도 없었네

O'er the grave where our hero we buried.  우리의 영웅을 묻은 그 무덤 위로 말이지

We buried him darkly at dead of night,  우리는 칠흑같은 밤에 그를 묻었지

    ...중략 (제가 읽어보았는데, 지루합니다)...

We carved not a line, and we raised not a stone,  비문 한줄 새기지 않았고, 비석조차 세우지 않았네

But we left him alone with his glory.  하지만 우리는 그의 영광과 함께 그를 거기에 묻었네



제가 볼 때는 뭐 그렇게 훌륭한 시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이 시는 당대, 그러니까 19세기 중후반까지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영문학 교과서(그러니까 국어 교과서)에 꼭 실리는 유명한 싯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남북전쟁 때의 병사들 무덤에 유식한 동료들이 널빤지로 임시 비목을 세울 때 이 싯귀의 일부분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유명한 영국 귀족 장군도 그렇게 대충 묻었는데, 비록 관같은 것은 없더라도 너같은 졸병을 이렇게나마 묻어주는 것만 해도 참 다행아니냐"라는 감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존 무어 경의 무덤은, 이 시에 나오는 것보다는 더 호사스럽게 장식되었습니다.  영국군 철수 직후 코루나를 점령한 프랑스 육군 원수 술트의 명령에 의해 근사한 기념물이 만들어졌거든요.  나중에 영국군이 다시 스페인을 장악한 이후, 여기에는 좀더 많은 기념물이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코루나 시의 존 무어 경의 무덤.  이 정도면 훌륭하지 뭘 더 바랍니까 ?)



자, 이렇게 최고 사령관조차도 (비록 프랑스군 포격 하에서 철수 중이라는 상황이긴 했지만) 관도 장례식도 없이 대충 묻고 마는 현실 속에서, 일반 졸병들의 장례식이나 매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개의 병사들은 적군과 아군 정도만 구별한 뒤, 큰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단체로 매장했습니다.  이런 매장이 꼭 동료 병사들에 의해서만 된 것은 아닙니다.  적군의 시체든 아군의 시체든 시체라는 것은 보기에도 흉하고 냄새도 나는데다가 위생적인 측면에서도 최악이었으므로,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도 모아서 단체로 매장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이런 단체 매장이 요즘까지도 종종 발견되곤 합니다.  이런 무덤들 중 가장 큰 것은 2002년에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Vilnius) 근처에서 발견된 프랑스군의 무덤입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시신은 무려 3269구나 되었습니다.  하나의 구덩이에 던져진 것이 분명했던 이 시신들을 조사해본 결과, 이들은 전사가 아니라 굶주림과 병, 특히 이에 의해 전염되는 티푸스와 참호열로 희생된 병사들이었습니다.   나이는 20~30세 정도였고, 당시 청년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던 발육부전의 정도가 매우 낮아서, 정예 자원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또, 일부 병사들에게서는 충치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러시아에 오기 전에는 설탕을 많이 섭취할 수 있었던, 즉 보급 상태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들을 묻은 것이 동료 프랑스군이었는지,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러시아군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육군은 사정이 대충 이랬는데, 해군은 어땠을까요 ?




(무슨 만화인지는 모르겠지만 burial at sea로 찾으니 이게 나오더군요.)



해군은 원래부터 수장(水葬)으로 유명합니다.  해전이 끝난 다음에는 엄숙한 의식에 따라, 목사님의 설교와 함께 해먹에 싸여 발에는 포탄 하나씩 묶어서 바다로 풍덩...하는 모습이 나름대로 멋있다고 느끼셨을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사실 그렇게 바다에 던져 넣으면 무덤도 없고, 또 사실 물고기 밥이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수장이란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좁은 배 안에서 시체들을 오래 보관할 여건이나 장소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행동일 뿐입니다.




(자, 윌리, 아니 넬슨을 찾아BoA요)



사실 수장이 명예로운 것이라면, 왜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을 브랜디 통 속에 절이는 무리수를 두어가며 영국까지 가져 왔겠습니까 ?  전설에 따르면 이렇게 넬슨 제독의 시신이 든 브랜디 통에서 수병들이 조금씩 브랜디를 훔쳐 마시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넬슨의 시신을 담은 브랜디에는 장뇌와 몰약을 섞은데다가, 그 통은 주돛대 밑에 놓여져 전담 보초가 지키고 있었거든요.  결국 넬슨의 시체는 지브랄타에서 역시 브랜디를 채운 납관에 모셔져 영국에 온 뒤, 나일 해전에서 침몰한,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갈 때 탔던 프랑스군 전함 로리앙(L'Orient)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넣어져 웅장한 장례식을 치른 뒤, 근사한 석관묘에 안장됩니다.




(어우, 이건 좀 오버 아닌가요 ?  바다의 신 넵튠에 의해 신이 되어 승천하는 넬슨...-.-)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넬슨의 이야기고, 일반 수병은 물론 장교들, 심지어 함장까지도 바다 위에서 전사, 또는 병사하면 그냥 수장을 시켰습니다.  수장을 할 때 그 시신은 해먹으로 감싼 뒤 바느질로 묶었는데, 마지막 바느질은 시체의 코를 꿰어서 묶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혹시나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수장시키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그렇게 해먹에라도 싸여서 목사님의 기도라도 한마디 듣고 수장되면 다행이고, 전투 와중에 적의 대포알에 두동강이 난 경우, 만약 그 시체가 대포 장전에 걸리적거리기라도 한다면 그냥 뱃전 너머로 던져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물고기밥이 되나, 저렇게 물고기밥이 되나 마찬가지쟎습니까 ?



(수장되면 Davy Jones의 locker로 가게 된다고들 하지요 ?  카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그 데이비 존스입니다.  원래 데이비 존스는 심연을 지배하는 악마라고들 합니다.)



(또는 현대적인 Davy Jones의 라커는 이렇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이야 땅에 묻히든 물고기밥이 되든 그게 그거이겠습니다만, 가장 골치아픈 경우가 바로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부상자들이었습니다.  즉, 당시 의료기술로는 더 이상 어찌해볼 수가 없는 중상자들은, 그냥 안락사를 시킬 수도 없고 (기독교 국가니까요), 가뜩이나 부족한 병상을 차지하고 있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부상병들은 대개 야전 병원 한쪽 구석이나, 혹은 (대개 수도원이 이런 용도로 징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임시 군 병원의 지하실, 즉 death room으로 옮겨져서 거기서 죽을 때까지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아무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었으므로, (의료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하사관같은 사람이 한명 배치되어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토닥토닥 말도 받아주고 위로도 해주고 하다가 최종 사망하면 꺼내어 묻곤 했습니다. 




(Death room에 대해 자세히 묘사된 Sharpe's Sword)



이런 일을 했던 사람의 실제 기록이 코스텔로(Costello)라는 영국군 라이플 소총병의 회고록에 나옵니다.  코스텔로는 1812년 스페인 살라망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그가 실려간 야전 병원에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ey)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하사관이 병원 담당으로 있어다고 합니다.  이 코넬리 하사관은, 살 가망이 없는 영국군 중상자들이, 역시 죽음만 기다리던 프랑스군 중상자들 앞에서 좀더 남자답게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죽어가는 부상자들에게 "니들이 죽으면 수의에 싸고 관에 넣어서 잘 묻어주겠다, 뭘 더 바라냐, 그러니 이 프랑스놈들 앞에서 끝까지 남자답게 죽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매우 몰인정한 언사로 들리는데, 당시 사람들 생각은 달랐는지, 이 하사관은 병사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당시 다른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들처럼 술고래였던 코넬리는 아직 살라망카 병원에 있을 때, 알코올 중독으로 자기 자신이 죽어버렸는데, 코스텔로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아마 웰링턴 공작의 장례식때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코넬리의 장례식에 대해 코스텔로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운집한 수많은 병사들 사이로 코넬리의 관을 들고 가던 병사들 중 복화술을 할 줄 아는 친구 하나가 코넬리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나 좀 꺼내줘 이 친구들아, 숨 막혀 죽겠어 !"라고 소리를 냈던 것입니다.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총검으로 관 뚜껑을 따보니, (여기서 설마 코넬리의 시신이 관 뚜껑에 붙어있기를 기대하신 분들은 없겠지요...) 여전히 코넬리는 죽어있었고, 어리둥절한 병사들에게 그 복화술사 병사가 자신의 장난을 털어놓았답니다.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해가 잘 안가는 이야기지만, 당시 현장의 수많은 병사들은 크게 웃으며 재치있는 조크였다고 재미있게 여겼다고 합니다. 




(BBC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Sharpe's Sword)



(P.S.  저는 이 이야기를 코스텔로의 회고록에서 본 것이 아니라, Bernard Cornwell의 역사 소설 'Sharpe's Sword' 끝 부분에 달린 historical note 부분에서 보았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