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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의 여동생과 파리 영국 대사관저에 얽힌 이야기

by nasica-old 2009.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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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누가 뭐래도 '지중해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사고 방식에, 모든 일의 중심은 가족 단위어야 했습니다.  이는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가령 코르시카에서, 원래 '부오나파르떼' 집안은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과수원이나 밀밭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식품같은 것들을 돈 주고 살 일이 없었고, 푸줏간같은 곳에는 나중에 물물 교환 등으로 정산할 외상 장부가 있었을 뿐, 누구에게 돈을 주고 뭘 산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하고도 아작시오 시에 있는 호텔이랍니다.)



이런 코르시카 섬에서, 한 집안의 지위는 농토나 목장의 소유 같은 재산의 많고적음보다도, 여차하면 분쟁에 휘말린 친척을 위해 (필요하다면 총이나 쇠스랑을 들고) 모일 수 있는 '사촌'들의 숫자가 몇이나 되느냐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그만큼 코르시카인들에게 혈연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폴레옹은 권세를 잡은 뒤, 당연히 가족들을 중용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뤼시앵같은 동생은 500인 의회 의장을 맡을 정도로 능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대개의 형제들은 나폴레옹 덕분에 그 능력에 가당치 않은 요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남자 형제들 뿐만 아니라 여동생들도 눈부신 지위와 엄청난 부를, 잘난 둘째 오빠 덕에 얻게 되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은 나폴레옹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실망과 배신만을 안겨주었습니다.  형 조제프는 나폴리 왕과 스페인 왕 자리를 안겨주었으나, 조제프 자신은 그런 왕 자리를 떨떠름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결국 스페인 왕 자리도 말아먹었습니다.  그나마 능력있던 뤼시앵은 나폴레옹과 사이가 틀어진 뒤 미국으로 가다 공교롭게도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영국에서 반 포로 생활을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과 더더욱 오해가 깊어졌습니다.  형 덕분에 네덜란드의 왕 노릇을 하면서도 감히 황제인 형과 왕대왕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던 동생 루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이 노릇만 했던 베스트팔리아 왕 막내 동생 제롬도 나폴레옹에게 분노와 탄식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뮈라와 결혼했던 카롤린은 앞장서서 남편에게 나폴레옹을 배반하라고 부추길 정도였습니다.




(뤼시앵... 어쩐지 나폴레옹 전기를 보면 이 친구 이야기가 슬며시 빠진다 싶더니,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었었군요.)



나폴레옹과 그 형제자매들과의 불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때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을 때입니다.  나폴레옹이 냄새나고 비좁은 엘바섬에서 초라한 유배 생활을 할 당시, 글자 그대로 형제 자매 중 아무도 나폴레옹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딱 한명만 빼고요.  바로 나폴레옹이 가장 예뻐했던 누이 폴린이었습니다.




(예쁜가요 ?  어우, 제 스타일은 아닌데요 ?  거기다저 see-through 패션은...)



코르시카 섬에서는 이탈리아 식으로 폴레트(Marie Paulette)였던 그녀는, 13살 때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의 권력자 파올리(Paoli)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야반도주할 때 함께 프랑스 땅을 처음 밟으면서 프랑스식 폴린(Pauline)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 폴린은 나폴레옹의 누이들 중 가장 미모였습니다.  그런데, 얼굴값을 한다고, 이 남자 저 남자와 많은 염문을 뿌립니다.  워낙 많은 남자들이 집적거렸으므로, 체통을 생각한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의 부하인 샤를 르클레르(Charles Leclerc)와 서둘러 17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시켰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둘이 19금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현장을 나폴레옹이 덮친 후, 민망했던 나폴레옹이 어쩔 수 없이 결혼시켰다고도 합니다.




(나폴레옹의 매제가 된 르클레르)



이렇게 결혼한 뒤, 르클레르는 하얀 황금 설탕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카리브해의 아이티 섬으로 원정대를 이끌고 갑니다.  '검은 자코뱅'이라고 불렸던 투생 루베르뛰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였지요.  젊고 아름다운 폴린까지 데려갔던 이 원정은, 나폴레옹이 미리 알고 있었는지 궁금한데, 사실상 죽음의 원정이었습니다.  황열병 때문에, 프랑스 원정군 대부분이 몰살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희생자들 중에는 폴린의 남편 르클레르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황열병에 대해서는 설탕과 카리브해 http://blog.daum.net/nasica/6862366 참조) 


졸지에 22세의 젊고 아름다운 과부가 되어 돌아온 폴린은 얼마 뒤,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부유한 가문 보르게스 가의 카밀로와 결혼합니다.  처음에는 애정이 넘쳤던 이 결혼도, 뒤에 가서는 폴린의 잦은 스캔달로 인해 시들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지요.


나폴레옹이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폴레옹은 여러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프랑스 남부 지역은 예전부터 카톨릭 왕당파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나폴레옹에 대한 민심이 그리 좋지 많은 않았던데다가, 왕당파 사람들이 적당한 기회에 이 골치거리를 암살해버리려고 계획을 꾸몄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굴욕스럽게도 오스트리아 장교복을 입고 변장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도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은 나폴레옹의 처지를 본 척 만 척 했습니다.  오직 폴린만 빼고요. 


폴린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가는 길에도 만나서 오빠의 불운에 대해 함께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현금으로 바꾼 뒤, 엘바 섬으로 찾아가 오빠와 함께 지내며 오빠를 재정적으로 도왔습니다.  (원래 협약에 따르면 부르봉 왕가가 나폴레옹에게 상당 금액의 연금을 지급하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한푼도 지급되지 않아서, 나폴레옹은 근위대 병사들에게 급료도 제대로 못 줄 지경이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있는 동안 나폴레옹을 찾은 사람은 폴린과 어머니, 그리고 폴란드의 연인 마리 발레프스카 뿐이었습니다.  잔인한 영국 및 프랑스 귀족들은 그마저도 시샘하여, 폴린과 나폴레옹에 대해 근친 상간이니 뭐니 하는 지저분한 소문을 열심히 퍼뜨렸다고 합니다.


이때 폴린이 처분한 재산 중에는 생 오노레 가의 아름다운 저택도 있었습니다.  이 저택은 원래 18세기 초에 루이 15세의 가정 교사였던 샤로(Charost) 백작 폴-프랑스와 드 베뛴(Paul-François de Béthun)이라는 사람이 지은 것이었는데, 1803년 미망인이 되어 아이티에서 돌아온 폴린이 샤로 백작 부인으로부터 사들인 것이었습니다.  11년간 폴린은 이 집에 많은 공을 들여 증축과 개축을 거듭했습니다.  1814년, 폴린이 전 재산을 처분할 때, 이 집은 영국의 강철 공작 웰링턴이 국왕 조지 3세를 위해 사들였습니다.  특히, 당시 승전국의 지휘관으로서 거의 공짜로 빼앗을 수도 있었던 것을, 웰링턴은 제대로 값을 다 주고 사들였기 때문에 파리 시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고 합니다.




(1812~1814년 사이에 스페인의 대가 고야가 그려준 웰링턴의 모습.  역시 사실적으로 그려놓은 모습이 다른 초상화들에 비해 못생긴 얼굴로 나왔군요.)




(성공한 부동산 투자의 대표적 사례, 생 오노레 가의 영국 대사관저입니다)



이 저택은 이때부터 프랑스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으로 사용됩니다.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관 홈페이지를 보면 이 빌딩이 최초의 해외 주재 영국 대사관 건물이라고 하네요.  현재도 이 건물은 영국 대사가 거주하는 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사관저는 단순히 대사 및 그의 가족이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많은 리셉션과 회의, 행사가 열리는 중요한 외교 공간입니다.  저는 아직 파리에 가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혹시 파리를 방문하실 일이 있으시면, 꼭 이 영국 대사관저에 들러서, 나폴레옹의 어여쁜 여동생과 그 건물과의 사연에 대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대사관저가 아니라 영국 대사관 같은데... 젠장, 가봤어야 알죠)



아, 아름다운 폴린은 결국 어찌 되었느냐고요 ?  워털루 전투 이후, 폴린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탈리아로 갑니다.  여기서 그녀는 한때 나폴레옹의 포로 신세였던 교황 피우스 7세의 보호 아래, 나름 유복하게 살다가, 1825년, 아직 젊은 45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도, 언니 엘리자도 위암으로 죽었지요.  그래서 아직도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독살설보다는 나폴레옹이 위암으로 죽었다는 것에 더 무게를 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본인도, 자신이 위암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자신이 끔찍히도 사랑했던 유일한 아들 로마왕에게도 건강 상의 경고를 해주기 위해, 자신의 사체를 부검하여 사인을 밝혀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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