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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by nasica-old 2009.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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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저를 포함한 전세계 사람들은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 새로 (물론 재선도 있지만) 권좌에 오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봅니다.  바로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지요.  저는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소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는 곳에서, 일국의 수장이 취임하는데 그 행사에 개신교의 종교색이 너무나도 짙어서입니다.  미국에는 개신교도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나 카톨릭,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텐데, 저래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미국은 원래 종교의 자유를 찾아나선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나라니까 더욱 종교의 자유와 정교 분리가 강조되어야 할 것 같은데, 강력한 개신교가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약간 아이러니컬하기도 합니다. 




(이거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이래도 되는 거임 ?)



원래 국가 권력이라는 것의 시초가 종교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보니, 비교적 근세까지도 종교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종교가 뭐 꼭 정치와 결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래 불교를 제외한 다른 주요 종교들,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 유교 등은 모두 정치색이 짙습니다.  그러다보니 종교단체가 사회 문제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 종교가 국가의 공식 종교, 즉 국교가 되어버리면 좀 곤란한 점들이 나타납니다.  그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또는 아예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프랑스의 위그노 박해입니다. (위그노에 대한 박해에 대해서는 왜 위그노는 프랑스를 떠났을까 http://blog.daum.net/nasica/6862364 참조)  영국에서는 카톨릭 교도에 대해 재산을 가질 수도 없고, 군 장교나 대학 교수, 변호사 같은 중산층 계급을 가질 수도 없도록 하는 등 많은 차별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 차별은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였던 아일랜드에 대해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차별들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아주 조금씩 철폐되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그냥 개인이 속세에서 누릴 수 있는 이익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짜 종교가 아니겠지요.)  그러다보니, 국가가 특정 종교만을 우대하고 특정 종교를 박해한다면, 그건 일종의 신분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제대로 된 사회 생활에서 몰아내게 됩니다.  이는 곧 그 사회의 퇴화로 이어집니다.  다양한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거든요.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에서 구술한 회고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평생 진정으로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브리엔 사관학교에서 소년 시절을 보낼 때, 학교에서의 미사 시간에 카토나 케사르 같은 고대 로마의 영웅들이 하나님이나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지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훌륭한 위인들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불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  나는 그때 이후로 종교를 갖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성적 사고 방식에 익숙하고 자신감에 가득찬 나폴레옹다운 생각이지요.  사실 이렇게 나폴레옹은 진정한 기독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후세에 '위인전에 나오지만 지옥에 갔을 대표적 인물'로서 알렉산드로스나 케사르와 함께 자주 묘사됩니다.  셋 다 전쟁을 좋아해서 많은 인명을 살상시켰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거든요.




(세인트헬레나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는 나폴레옹.  패션 감각이... 어우...)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대표적인 카톨릭 국가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카톨릭에 대해서, 그리고 또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과 카톨릭과의 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1801년의 정교 협약(Concordat)입니다.  그러나 이 정교 협약을 이해하려면 그 복잡한 배경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1790년의 '성직 헌법' (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삼부회(Estates-General)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하신다면, 당시 혁명 정부였던 국민공회의 카톨릭에 대한 악감정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분명히 당시 카톨릭 교회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의 한 축이었고, 혁명 세력에게 있어서 카톨릭은, 적어도 카톨릭 교회를 구성하는 고위 성직자들은 분명히 타도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카톨릭 교회는 당시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15%를 차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프랑스 전체 GDP의 10%를 십일조의 이름으로 꼬박꼬박 받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재벌 중의 재벌이었지요.  국민공회는 십일조를 폐지하고 교회의 자산을 몰수한데 이어 (이 몰수 자산으로 비운의 아시냐 지폐를 찍어냈지요.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http://blog.daum.net/nasica/6862340 참조), 성직자들에게도 일종의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1790년의 성직 헌법입니다.




(가만 보면 완전 공산당... 당시 호칭도 므슈, 마드뫄젤, 마담 같은 거 다 없어지고 시토아앵, 즉 시민이라고 통일되었습니다.  성직자들에게 이렇게 말했겠지요.  빨리 공화국 헌법에 충성의 서약을 하라우 동무 !)



프랑스 국민이 프랑스 헌법에 대해 충성 서약하라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일까 싶습니다만, 당시 카톨릭 성직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로지 혁명정부에 충성하라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혁명정부에는 무신론자들과 개신교들의 세력도 득실거렸습니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김수환 추기경께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프랑스의 주교 160명 중 이 서약을 했던 것은 불과 7명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상당히 서민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혁명에 의해 피해를 입을 것이 별로 없었던 마을 단위의 평범한 성직자들조차도 절반 정도는 이 서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국민공회는 카톨릭에 대해 박해를 시작했고, 이 서약을 하지 않은 성직자들은 아예 미사를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평생토록 믿어온 종교를 혁명이 났다고 하루 아침에 번복할 수는 없었던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그런 불법 사제들이 주관하는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이 과정 중에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일단 마을의 존경받던 성직자들이 하루 아침에 범법자가 되어 숨어지낸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당장 관혼상제와 같은 중요 가정 행사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결혼을 교회 밖에서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단숨에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혼식이 '10년 성전'이라고 이름을 바꾼 예전 교회에서 대충 간단히 치루어진 것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떨떠름한 반응이었습니다.  더 안좋은 것은 이혼도 아주 간단해졌다는 것입니다.  후세의 사람을 위해 더 안좋았던 사실은 아름답고 유서깊은 많은 교회들이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7세기 경에 창시되었던 아름다운 중세 교회 생제르맹 록세루아(St. Germain I'Auxerrois)는 처음에는 '감사의 성전'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여물 저장소로 쓰이는 곤욕을 치룹니다.  노트르담 대성당도 심하게 훼손되었고요.  이 외에도, 교황청에서 만들어 배포한 달력인 그레고리력을 폐지하고 뷔르메르라든가 테르미도르 같은 계절이나 농사의 특성을 딴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어쓰는 등, 카톨릭적인 모든 것과의 단절을 선언하다시피 합니다.  이때 매 7일마다 돌아오는 일요일이나, 성탄절, 부활절같은 축제조차 없앨 정도였습니다.




(St. Germain I'Auxerrois, 여물창고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 싶지요 ?)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1798년 이탈리아 원정 때 로마를 침공하여 교황 피우스 7세를 포로로 잡고 온갖 예술품과 귀중품을 약탈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앞서 소개했듯이 카톨릭 같은 것은 믿지 않았고, 그의 휘하에 있는 이탈리아 원정군 중에는 무신론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1798년 이집트 원정길에 잠깐 들러 정복한 말타섬에서, 압수한 말타 기사단의 기독교 성물들을 그 자리에서 녹여 금괴로 만들어 가져갈 정도로, 나폴레옹은 기독교에 대해 별로 경외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이집트인들에게 '이슬람의 적인 교황을 패배시킨 자기야 말로 진정한 이슬람의 수호자'라고 뻥을 칠 정도였습니다.


그런 나폴레옹이었지만, 자신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된 이후에는 카톨릭과 황급히 화해를 할 방도를 모색합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801년의 유명한 정교(政敎) 협약 (Concordat)입니다. 




(1801년의 Concordat.  뭐 미화라는 것이 미술의 기본 기능이긴 하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친 듯)



나폴레옹과 로마 교황 피우스 7세 (Pius VII) 사이에 맺어진 이 조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프랑스에서 카톨릭이 대다수의 종교라는 것을 인정해줄테니, 대신 프랑스의 카톨릭 교회는 프랑스 정부의 통제를 받도록 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되새겨 볼 만한 여러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있습니다만, 이건 사실상 나폴레옹이 피우스 7세를 압박하여 얻어낸 일방적 승리의 조약에 가까왔습니다.  가령 이제 프랑스 내의 사제들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는, 사실상의 공무원이 되었다는 점이나, 카톨릭이 공식 국교가 아닌 그냥 '대다수의 종교'로 선포되었다는 점, 그리고 프랑스 정부가 주교들을 선임할 권리를 얻었다는 점들이 그렇습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도, 프랑스 내의 카톨릭 사제들은 프랑스 국왕의 관리를 받았기 때문에 중세 시대와 같이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권세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기는 했습니다. 


어쨌거나, 로마 교황청으로서도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대다수의 사제들이 범법자로서 제대로 미사도 집행하지 못하고 숨어지내야 하는 상황을 종결지은 점이나, 프랑스라는 유럽 최강국이 공공연한 반카톨릭 국가로 변질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내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영원불멸의 존재인 하나님의 일을 하는 피우스 7세가 이 협약에 대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임하려 했던 것에 비해, 오히려 총칼을 손에 쥔 나폴레옹은 무척 서둘러 이 협약을 마무리지으려 했습니다.




(교황 피우스 7세.  하나님 아버지, 왜 저를 낳으시고 나폴레옹 저 개자식을 또 만드셨나이까 ?)



왜 절대 우위의 위치에 있었던 나폴레옹은 교황청과 이런 협상을 벌였을까요 ?  갑자기 독실한 신자가 되었던 것일까요 ?  세인트 헬레나에서의 회고록에도 나왔듯이, 그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단지, 나폴레옹은 자신의 국가 운영에 카톨릭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이건 두가지 점에서 그랬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지중해 출신 인간답게, 모든 국가 활동의 기본 단위가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불멸의 업적 '나폴레옹 법전'에도 잘 표현되어 있는 기본 정신입니다.  카톨릭의 교리가 맞건 틀린건 그건 나폴레옹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단지 나폴레옹은 사회 질서를 가장 효율적으로 유지시켜주는 도구로서 카톨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 나오는 아텔니라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기업체의 말단 서기인 이 남자는, 정작 본인은 기독교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은 모두 교회에 보냅니다.  왜 그러냐는 질문을 받자, 아텔니는 '멋있으니까'라는 대답을 하지요.  좀더 정확하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름답다면 그게 진실된 것이든 아니든 난 상관하지 않네."


나폴레옹의 심정이 딱 이 모양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정교 협약을 서둘렀던 것은 두번째 이유가 더 급했을 것입니다.  바로 방데(Vendee) 지방의 반란과 올빼미당(Chouans)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방데 지방은 르와르(Loir) 강 하구에 위치한, 프랑스 서부 해안 지방입니다.  이 곳은 전통적으로 빈부의 차가 심하지 않아서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 거의 없었고, 예전에 위그노의 본거지였던 탓에 그 반동으로 더 열렬한 카톨릭 신앙심을 가진 지방이었습니다.  (흑인들이 많은 미국 남부가 더 인종차별이 심한 것을 생각하면 되실 듯...)  혁명 정부가 카톨릭 사제들을 핍박하고 카톨릭 전통을 말살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던 방데 지방 사람들은, 특히 주르당(Jourdan) 법에 의해 본격적으로 징집이 시작되자 (징집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절 젊은이들이 앞니를 뽑아야 했던 이유  http://blog.daum.net/nasica/6862352 참조) 1793년 마침내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혁명 정부 초기 빈약한 무장과 훈련에다 군율마저 없어 방데 지방 사람들의 경멸과 분노의 대상이었던 공화국 군대는 이 방데 지방 농민병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부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합세하여 왕정과 카톨릭 신앙을 수호하자고 선동하면서 반란은 절정에 달합니다.




(방데 지방의 피비린내 나는 반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대량 학살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혁명 정부는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진압 조치를 취합니다.  진압 작전에서 '여자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진압군 지휘관에게, 혁명 정부의 공안 위원회는 '최후의 1인까지 박멸하라'는 무시무시한 지령을 내립니다.  진압군은 공안 위원회의 지령 그대로, 정말 인종 청소에 가까운 대량 학살을 자행합니다.  특히 웨스터만 (Westermann)이라는 장군이 공안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 편지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여자이건 아이들이건 모조리 베어죽이고 항복하러 오는 반란병들을 보는 족족 쏘아죽여 방데 지방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씌여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편지의 주인공인 웨스터만 역시 귀환하자마자 정쟁에 휘말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방데 지방의 반란은 이처럼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진압되지만, 1793년 발발 이후 1796년 경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집니다.  특히 이 지방은 나폴레옹이 1815년 백일천하를 연출할 때도 루이 18세에게 충성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브레타뉴 지방의 올빼미당 병사)



나폴레옹에게 더 큰 문제거리는 바로 올빼미당(Chouans)이었습니다.  이 슈앙이라는 이름의 반란 집단은 주로 브레타뉴, 멩, 노르망디 등 프랑스 북서부를 근거로 했지만 특정 지역을 점령하거나 하지는 않고 그야말로 게릴라 활동으로 혁명 정부에 반항했습니다.  방데 지방 반란과 함께 1793년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1804년까지,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직후까지도 일부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습니다.  슈앙파들은 그 지도자 중의 한명인 장 슈안(Jean Chouan)의 이름을 따서 슈앙이라고 불리웠다고도 하고, 주로 야간에 올빼미(Chouan) 소리의 휘파람을 불어 서로에게 신호를 했기 때문에 올빼미당이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만, 한마디로 말하면 카톨릭 왕당파였습니다.  이들의 반란 이유는 방데 지방의 농민 반란과 비슷했습니다.  제대로된 왕정과,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카톨릭 교회를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의 반란은 어느 정도 정당했던 것이, 혁명 이래로 오히려 지방 농민들의 빈곤이 더 심해지고, 세금은 3배로 뛰는 등, 늘 그렇듯이 혁명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흘러가지는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겨우 21세의 나이에 방데 지방 왕당파 카톨릭 군의 수장으로 선출된 앙리 드 베르지에, 로슈자클렝 백작)




(21살 짜리 애송이를 군 지휘관으로 삼으면 어떻게 된다 ?  그랭빌 공략전에서 온갖 삽질을 하다 다 말아먹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가 결국 22세의 나이로 전설이 된 로슈자끌렝 백작...)



이 올빼미당의 존재가 특히 나폴레옹에게 껄끄러웠던 것은, 무장 봉기로는 더 이상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카두달 같은 올빼미당의 지도자는 1800년 12월 생 니케즈(Saint-Nicais) 가에서 화약을 실은 마차를 폭발시켜 나폴레옹의 암살을 꾀했기 때문입니다.  카두달은 이 사건 이후 영국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몰래 귀국하여 다시 나폴레옹 암살을 노렸지만, 결국 체포되어 1804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카두달이 형장에서 남겼다는 다음 말은 당시 왕당파의 복잡한 심정을 잘 대변해줍니다.


"우리는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프랑스에 왕을 다시 세우려고 하다가, 결국 황제를 세웠다."


그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분열된 프랑스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상당수가 원했던 것, 바로 전통적인 종교를 되돌려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서둘러 로마 교황청과 화해를 했던 것이고, 또 교황을 멸시하고 모욕하면서도 자신의 대관식에 교황 피우스 7세를 참석시켜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냈던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에게 있어서는 거룩한 카톨릭도 한낱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제가 왕당파와 카톨릭 이야기를 읽으면서 씁쓸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왜 종교 집단은 거의 언제나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일까요 ?  이슬람을 '그릇된 종교(false religion)'이라고 일컬으며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잡는다는 명분하에 이라크를 침공한 십자군 기사 조지 부시도 그렇고, 그 부시 대통령에게 들리도록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외치는 개신교 목사님도 그렇고... 제가 다니는 우리 동네 작은 교회의 목사님조차도 (저는 이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진짜 참된 믿음을 위해 노력하는 분입니다) 요즘에는 TV에는 파업이나 데모 뉴스가 안나와서 좋다고 하실 정도니까... 글쎄요,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말씀 듣기가 좀 거북했습니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원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요즘은 가진자들과 권세있는 자들의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왜곡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건 (하긴 제 블로그의 글이 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므로 제가 잘못 오해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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