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소설 중에 버나드 콘월 작 "Sharpe" 시리즈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Sharpe는 원래 사병 출신인데, 우연히 웰링턴 공작의 목숨을 구해준 공로로 장교로 임관됩니다. 이때, 웰링턴이 감사의 표시로 샤프 소위에게 망원경을 선물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잊지 말게, 샤프 소위. 장교에게 있어서는 칼보다는 망원경이 더 중요하다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맥아더 장군도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하셨지요. 전투에서 패배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요. 나폴레옹 시대나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적의 위치와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으니, 지금처럼 무조건 먼저 쏘는 쪽이 이기게 되어있는 현대전에서는 더욱 정찰과 탐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과 그의 적들은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망원경을 사용했습니다. 당시에는 레이더가 없었으니까, 뭐 어쩔 수 없었겠지요. 육군이야 상대적으로 망원경의 중요성이 좀 덜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해군에 있어서 좋은 망원경의 의미는 대단했습니다. 사방이 탁 트인 광활한 바다에서야말로, 명품 망원경과 싸구려 망원경의 성능 차이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곳이니까요.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전에 DC inside 2차대전 갤러리에 윤민혁좌가 올린 글을 보면,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의 높은 브릿지에서 망원경으로 보면 대략 30~50km 정도의 거리까지 관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숫자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제 기억력 탓이지 윤민혁좌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거리입니다. 아마 대개의 경우 날씨 탓에 그 정도의 거리까지는 보이지 않을 것 같네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함들은 마스트 꼭대기의 망루라고 해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함들만큼 높지는 않을테니까, 그 정도의 거리까지는 관측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망원경 기술 때문에라도, 아마 15 ~ 20 km 정도가 한계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차피 당시의 느린 범선에 1~2km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진 함포를 장착한 상황이면, 그 정도의 탐지거리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망원경 기술도, 의외로 대단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요즘 군용기나 군함에 장착하는 전자광학추적장치(Electro-Optical Targeting Sensor)입니다.
보통 저런 EOTS 장치에는 세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즉 주간용 카메라, 야간용 열영상 카메라, 그리고 레이저 거리 측정기입니다. 놀랍게도, 19세기 초반 영국 해군에도 그런 장비가 있었습니다.
일단 주간용 망원경이야 특별할 것이 없고요, 야간용 망원경(Night Glass)이라는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적외선 장비는 아니었지요. 사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단지 대물용 렌즈의 지름이 주간용보다 매우 큰 망원경이었습니다.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으니 확대 비율을 희생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빛을 더 많이 모아서 희미하게라도 영상을 보기 위한 물건이었지요. 작은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와, 큰 렌즈가 달린 DSRL 카메라를 가진 분들은 렌즈가 큰 망원경이 더 많은 빛을 모아주기 때문에, 야간에도 조금이나마 더 밝은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자, 거기까지는 그렇다치고요, 거리 측정기는 어떨까요 ? 원근 망원경 (Come-up Glass)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의 기능은 사실 거리 측정기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저 멀리 수평선에 거의 점으로 보이는 선박이, 우리 쪽에서 멀어져 가는 것인지 접근하는 것인지 판단해주는 망원경이었습니다. 원근 망원경은, 망원경 렌즈가 중앙에서 두개로 나뉘어져 있어서, 영상이 두개가 보였습니다. 이 겹쳐보이는 두개의 영상이, 상대방 선박의 진행에 따라 점점 더 겹쳐 보이면 우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고, 점점 더 벌어져 보이면 우리 쪽에서 멀어져 보이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 이 망원경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구글을 열심히 뒤져 보았으나, 텍스트 설명만 있고 그림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요. 여러분들도 상상만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당시 해군용 망원경은 모두 단안경이었습니다. 즉, 한쪽 눈으로만 보는 물건이었지요. 확대 비율이 큰 고해상도의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망원경을 한쪽 눈으로 보는 것이 정석일까요, 양쪽 눈을 다 뜨고 보는 것이 정석일까요 ?
정답은 양쪽 눈을 다 뜨고 보는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망원경으로 저 너머의 물체를 집중해서 보면 시야가 당연히 좁아질 수 밖에 없쟎습니까 ? 특히 여러 척의 군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감시하거나 멀리 해안가의 상황을 감시할 때는 집중하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쪽 눈으로는 단안경으로 확대된 영상을 보면서도, 다른 쪽 눈은 전체 광경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건 상당히 숙련된 사람만 할 수 있는 재주라서, 이제 막 해군 생활을 시작한 초급 장교들은 한쪽 눈을 감고 망원경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늘을 나는 피터팬을 찾으려면 두 눈을 모두 뜨고 봐야 한다네 친구들)
저격병의 경우는 어떨까요 ? 모두 훈련소에서는 '두 눈을 모두 뜨고' 조준하라고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실제로는 전체 프로페셔널 저격병의 10% 정도만이 '두 눈을 모두 뜨고' 조준한다고 하네요. 역시 두 눈을 모두 뜨고 망원경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이 친구도 90%의 저격병 중 하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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