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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포로 대신 인형을 가져온 이유

by nasica-old 2008.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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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언제부터 영국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나폴레옹은 영국을 무척이나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정작 나폴레옹은 영국군에게 패배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영국군에게 패한 것은 워털루에서 였는데, 사실 워털루에서는 웰링턴의 영국군에게 패했다기 보다는, 웰링턴에게 발목잡힌 끝에 결국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에게 패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본인을 위시하여 많은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 패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영국에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발자크의 소설 '시골 의사'에서도 나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의 야심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꺾었던 것은 영국,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영국 해군만 아니었다면, 정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찍고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은 후,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쳐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  정말 그랬다면 정말 대영제국은 끝장이었고, 나폴레옹은 제2의 알렉산더가 되었겠지요.  그런 전공은 못세웠어도, 그래도 나폴레옹은 여전히 알렉산더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있긴 합니다.  또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만 말아먹지 않았어도, 노르만 정복 이래 최초로 영국이 외국군에게 점령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영어를 배우느라  낑낑거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나폴레옹은 영국이 그렇게 미웠는지, 당시로서는 당연한 전쟁 규칙이었던 포로 교환을 영국과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버립니다.  그 덕택에 프랑스의 베르덩과, 영국 각 항구의 헐크선에서는 많은 전쟁 포로들이 지루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인생의 꽃다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때 당시 포로 생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 생활 ( http://blog.daum.net/nasica/6068559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 전혀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카르텔(cartel)이라는 단어 들어보셨지요 ?  기업 연합을 가리키는 이 말의 원래 뜻은, 전쟁 시의 포로 교환, 또는 그 포로 교환에 사용된 선박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포로 교환을 안하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사실 양국 사이에는 카르텔 선이 왕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버와 칼레 사이에는 심심치 않게 양국의 카르텔 선이 왕복했습니다.  이때 카르텔 선의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양국 사이에 협상의 여지는 있었으므로, 외교관들이 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전황이 불투명해진 1812년 이후로는, 프랑스 외교관들이 영국에 망명 중이었던 프랑스 부르봉 왕가 사람들을 비밀리에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이, 학문적인 교류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영국 왕립 학회나 프랑스 학사원 간에 저명한 학자들이 안전 통행증을 교부받아 서로를 방문하여 강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물리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과학자인 험프리 데이비 경도 이런 카르텔 선을 타고 파리를 방문하여 강연을 했었습니다.

 

 

 

 

외교나 학문 교류는 사실 일반인들과는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양국 민간인들도 카르텔 선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신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은 물론이고 TV나 라디오도 없었으므로, 양국 간에 믿을 만한 소식통은 사실 신문이었는데, 상대국의 신문을 받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이 카르텔 선의 왕복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는, 약간 불명예스럽게도 언론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으므로 과연 그 신문 기사가 얼마나 정확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적국의 신문은 많은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오는 카르텔 선에는 그런 것들 외에, 아주 재미있는 것이 꼭 실려 있었습니다.  바로 인형이었습니다.  왠 인형이냐고요 ?  누가 뭐래도 17세기 이래 유럽의 문화를 선도한 것은 바로 파리였고, 유럽 상류층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혁명이든 사상이든 패션이든 무엇이든 따라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고, 특히 패션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고, 그림은 옷의 내외부를 상세히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을 그대로 본떠 만든 인형을 런던에서 구해갔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카르텔 선 외에도, 양국 사이에는 수많은 밀수선들이 들락거렸습니다.  사람의 돈에 대한 욕심은 국가간의 명예, 목숨의 위험, 민족 갈등 따위를 모두 뛰어넘는 그 특별한 포스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당시 밀수선들이 다루었던 품목이야 뭐 헤아릴 수 없었겠습니다만, 영국 측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역시 프랑스 특산품인 브랜디와 샴페인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의 술주정뱅이 기질 뭐 어디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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