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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왜 영국과 스페인은 사이가 안 좋았을까 ?

by nasica-old 200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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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주 재미있게 읽은 나폴레옹 전쟁 소설 중에 Sharpe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샤프라는 주인공은, 드물게도 영국 해군이 아니라 영국 육군 소속의 사병 출신 장교입니다.  이 샤프 시리즈에 등장하는 적군은 (당연히) 프랑스군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정작 프랑스군에 대해서는 증오의 감정을 그리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항상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합니다.  주인공이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스페인군입니다.

 

다음 인용구를 한번 읽어 보시지요.

 

 

 

 

Sharpe's Eagle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9년 스페인 탈라베라) ----------

"저게 뭐야 ?"

3/4 마일 전방에서 프랑스군 용기병들이 기병총을 쏘아 대고 있었다. 샤프에게는 그들이 무엇에다 대고 쏘는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총에서 나오는 연기와 희미한 총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기병이요."

"나도 그건 알아." 호건 소령이 말했다. "뭐에다 대고 쏘냐는 거지 ?"


"글쎄, 뱀일까요 ?"  포르티나 강을 따라 걸어올라오면서, 샤프는 작고 검은 뱀들이 강 옆 짙은 수풀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뱀을 그냥 피해 걸었지만, 저 평원에도 뱀이 있을 수도 있고, 용기병들은 그냥 연습삼아 뱀을 표적으로 사격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때는 저녁이었고 기병총에서 나오는 섬광은 땅거미 속에서 밝게 반짝였다.  샤프 대위는 전쟁도 종종 예쁘게 보인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이," 하퍼 중사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쟤들이 우리의 용감한 연합군을 깨웠는데요.  꼭 개미집을 건드린 것 같아요."

방벽 아래에서, 스페인군 보병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닥불 주변에서 일어나 호간 소령이 구축한 통나무로 된 방호벽에 머스켓 소총을 올려놓으며 줄지어 섰다. 장교들은 방호벽 위에 올라서서 칼을 뽑아들고 저 멀리 있는 용기병들을 가리켰다.

호간 소령은 웃었다. "연합군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프랑스군 용기병들은,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과녁에 계속 총질을 해대고 있었다. 샤프는 그것이 그저 장난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스페인군에 난리법석을 일으켰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페인군 보병들은 한명도 남김없이 모두 방호벽 뒤에 모여 모닥불을 뒤로 한채 총구를 텅빈 벌판으로 향했다.  장교들은 뭔가 명령을 소리쳤고, 수백정의 소총이 장전되기 시작했다.  샤프는 깜짝 놀랐다.

"저것들이 대체 뭐하자는 거야 ?" 수많은 밀대가 수많은 총구 속으로 총알을 밀어넣으며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교들이 칼을 높이 들어올리는 것도 보였다. "보라고," 호간이 중얼거렸다. "한두가지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르쟎아 ?"

아무 명령도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총성이 한방 울리면서, 총알 하나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들판으로 날았다. 그러더니 샤프 대위가 여태까지 본 것 중 최대의 일제 사격이 뒤따랐다. 수천정의 머스켓 소총이 불꽃과 연기를 뿜으면서, 총성과 스페인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화염과 납총알이 텅빈 들판을 휩쓸었다.  프랑스 용기병들은 흠칫 놀라서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지만, 발사된 총알들은 용기병들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1/3도 날지 못하고 떨어졌다. 용기병들은 그냥 말 위에 앉아 머스켓 소총의 화약연기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프는 한순간 스페인군이 무고한 들판을 상대로 거둔 자신들의 승리에 환호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함성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공포의 비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스페인군은 자기 자신들의 1만정이 일으킨 일제 사격 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스페인군은 존재하지 않는 위험을 피해 거미새끼처럼 흩어졌다. 수천명이 올리브나무 사이로 쏟아져 나와 머스켓 소총을 내팽게치고 모닥불을 짓밟으며 요란법석을 떨며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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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묘사된 모습만 보면 스페인 군은 완전히... 오합지졸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위에서 인용된 사건은 (소설 속에서처럼 적나라하지는 않았겠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안에나 더러운 빨래는 있는 법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없다고, 당시 영국군의 행태 중에도 동네 창피한 사건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사실 작가는 바로 그 다음날 실제 일어난 탈라베라 전투에서 스페인군도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묘사를 굉장히 인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나중에 Sharpe's Honour 편에서도, 실제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용감하게 무찔렀던 사실은 쏙 빼놓고, 마치 전제 전투를 웰링턴의 영국군이 혼자서 다 싸운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Sharpe 시리즈의 작가 Cornwell은 스페인과는 마치 원수라도 진 것처럼 이 소설 시리즈 내내 스페인 씹기에 열을 올립니다. 

 

이것이 Cornwell이라는 작가가 스페인 여행에서 여자 친구를 스페인 남자에게 빼앗겼기 때문일까요 ?  글쎄요, 더욱 웃긴 것은 또다른 나폴레옹 전쟁 소설인 C.S.Forester 작 Hornblower 시리즈에서도 스페인군에 대한 조롱과 비난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대체 영국 작가들은 왜 이렇게들 스페인을 싫어할까요 ?

 

사실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사이가 좋은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바다 건너 미국하고야 서로 죽고 못사는 관계이지만,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은 나라는 사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정도입니다.  그나마 네덜란드와는 올리버 크롬웰 이후 경쟁국이 되는 바람에 역사적으로 사이가 크게 틀어졌지요.

 

포르투갈과 영국, 정확하게는 잉글랜드 사이의 조약은 1373년에 최초로 서명되었고, 1386년 윈저 조약으로 최종 확정되었는데, 이것은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된 우호조약이라고 하네요.  포르투갈은 어쩌다 영국과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요 ? 

 

이야기는 제2차 십자군 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던 영국군이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내분에 개입해서 포르투갈 왕가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하네요.  나폴레옹 전쟁 즈음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은 정치 경제적으로 대영국 의존도가 심해집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류층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친 것에 비해, 유독 포르투갈의 귀족층 자녀들은 영어부터 배울 정도였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영국으로 포르투갈 특산품인 포트 와인 (Port wine, Porto)을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포트 와인의 탄생 자체가 영국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즉, 영국까지 먼 뱃길로 수출할 때 포도주가 상하지 않도록 알코올 성분을 높이기 위해 포도주에다 비숙성 브랜디(포도 증류주)를 첨가했는데, 이것이 술고래인 영국인들의 기호에 딱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포도주가 주로 수출되던 Oporto 항구의 이름을 따서 Porto, 또는 포트 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네요.  당시 제대로 된 영국식 식사는 로스트 비프 등의 식사를 하고, 파이나 푸딩 등의 디저트를 먹은 후, 포트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 거의 정례처럼 굳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설마 그런 포도주 때문에 양국의 우정이 그토록 깊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양국의 우정이 그토록 깊어진 것은 바로 스페인 때문이었습니다.

 

위 소설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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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간 소령과 하퍼 하사는 비록 영국군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출신은 아일랜드입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가 사이 안좋은 건 다들 아시지요 ?)

 

"스페인 사람들은 잉글랜드인을 안 좋아하네." 호간 소령이 말했다.


"잉글랜드 사람을 안 좋아한다고요 ?" 하퍼 하사는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결국 스페인 사람들은 나쁜 놈들은 아니군요, 그냥 좀 조심성이 있을 뿐이고요.  하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잉글랜드를 좋아한다는 말씀인가요 ?"


"포르투갈 사람들은 말이지," 호간 소령이 말했다. "스페인 사람들을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옆동네에 덩치 큰  나쁜 이웃이 살면, 자기를 도와줄 다른 덩치 큰 친구를 찾게되는 법이지."


"그럼 아일랜드의 친구는 누굽니까, 소령님 ?"


"신 뿐이시라네, 하사."  호간 소령이 말했다. "오직 신 뿐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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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에서 인용된 소설 속 호간 소령의 말과 같습니다.  덩치 큰 스페인이 자꾸 조그맣고 힘없는 포르투갈을 집적거렸기 때문에, 누군가 스페인과 맞서 싸워줄 힘있는 친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중 포르투갈은 프랑스같은 강대국을 놔두고 왜 하필 영국과 연합했을까요 ?  그건 스페인과 사사건건 부딪혔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영국과 스페인은 제해권과 해외 식민지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특히 스페인은 열렬한 카톨릭 국가였던 반면, 영국은 얼치기 신교 국가라는 점도 양국의 훈훈한 관계(?)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16세기 당시부터, 당시 남미 대륙까지 뻗어있던 스페인 제국을 괴롭힌 것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풀어놓은 영국 해적들이었고, 그 중 대표되는 인물이 바로 드레이크였습니다.  드레이크는 원래 용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글자 그대로 엘 드라코 (El Draco) 라고 부르며 증오했고, (서양인들은 용을 악마의 화신으로 생각하지요) 그 증오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 이후 더욱 짙어졌습니다.  당시 영국 해적들을 바라보던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은, 16세기 조선과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에 대한 증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여보게,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영국에 가면 Sir로 불리고, 소말리아에 가면 해적으로 불린다는 게 사실인가 ?) 

 

이후 영국과 스페인의 갈등은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를 탈취, 혹은 스페인의 세력 파괴를 위해 애쓰는 영국 해군의 활약 때문에 더더욱 심해집니다.  그래서 당연히 스페인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에 맞서 프랑스 편을 들었고,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놓인 이후로도,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전혀 좋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망명 정부가 손바닥만한 카디즈(Cadiz) 요새 항구에 갖혀 지내는 동안에도 스페인 정부는 영국 해군이 자신의 중남미 식민지에 손을 댈까봐 전전긍긍했고 실제로 영국 해군에 대해 매우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Hornblower 시리즈 중 "Happy Return" 편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Forester의 Happy Return은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답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정말 나폴레옹만을 적으로 삼았고, 어디까지나 선의로서 스페인을 도우려 했던 것일까요 ?  물론 아닙니다.  스페인은 뭐니뭐니해도 전통적 강국이었고, 방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으니만큼 언제든 다시 유럽의 초강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이 그로기 상태가 되었을 때, 두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나폴레옹과 맞서 싸우는 척 하면서) 스페인에게 강펀치를 날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스페인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상실에 상당히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의 스토리인

 Hornblower 시리즈 중 "Hornblower in the West Indies" 편이나, 혹은 Sharpe 시리즈 중 "Sharpe's Devil" 편에 잘 나와있습니다.  실제로 칠레 독립 전쟁의 경우 비록 정규군은 아니지만 많은 영국인들이 칠레 독립군 편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코크레인 경의 소설같은 삶 http://blog.daum.net/nasica/6862329 참조) 왜 영국인들이 대서양 건너 신대륙에서 괜히 자유라는 명분을 위해 싸웠겠습니까 ?  그리고 왜 영국 정부는 스페인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런 영국 민간인들의 해외 군사 활동을 단속하지 않았겠습니까 ? 

 

설마 여러분은 중남미 각국이 아무 외부 지원없이 강력한 스페인 제국의 사슬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믿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소련군을 무찌른 것은 미국이 도왔기 때문이고, 베트남이 미군을 무찌른 것은 소련과 중국이 보급을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스페인이 중남미의 식민지를 상실한 것은, 미국의 먼로주의 선언과, 또 그를 실제로 집행해주었던 영국 해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장악하고 있는 한,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상실은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했지요.  특히 영국은 남미 지역이 하나의 거대한 잠재적 강대국으로 통일되지 못하도록 이런저런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합중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가만 보면 영국 애들 정말 무섭습니다.

 

결국 영국 작가들이 스페인군을 열심히 씹어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꼭 스페인 사람들이 정말 경멸받아 마땅한 족속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틴 러스 (Martin Russ)라는 작가가 쓴 Breakout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1950년 한국 전쟁에서, 중공군 공격에 의해 위기에 몰린 미해병대의 장진호 전투 이야기입니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감탄한 것이, 책 내내 나오는 것이 중공군에 대한 증오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개가 "땅개 미육군"에 대한 경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 "와, 정말 미해병대(또는 미해군)는 미육군과 사이가 안좋구나!" 하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오죽하면, 중상을 입고 일본의 미군 병원으로 실려간 해병대워이 "혹시 땅개 메딕(육군 소속 메딕)에게 맡겨지면 어쩌나"하고 걱정할 정도였겠습니까 ?

 

영국군과 스페인군은 나폴레옹 전쟁 후반 이후 계속 연합군이었습니다만, 아마 미해병대와 미육군 사이의 관계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미육군도, 미해병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 바보 머저리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스페인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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