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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 생활

by nasica-old 2008.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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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포로가 (당연히) 많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제네바 협정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자칭 신사라고 하는 인간들이 장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낭만주의 같은 것이 살아있었습니다.

 

장교가 항복을 할때는, 항복의 표시로서 자신의 검을 뽑아서 상대방 장교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면, 항복을 받아들이는 장교는,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하여 그 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허락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다만 권총같은 화기는 몰수했습니다.

 

항복한 장교에 대한 대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항복한 지휘관은 대개 자신을 포로로 잡은 적부대의 장교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100년 전쟁때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가 된 필립왕이 그날 저녁 흑태자에게 정중한 식사 시중을 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항복한 장교에게 언제나 손님 대접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곧 항복한 장교는 적국 후방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프랑스는 포로들을 베르덩 시에 거대한 포로 수용소를 지어놓고 거기에 감금했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영토가 좁았던 영국은, 항구에 헐크(hulk)라고 하여, 낡은 화물선이나 군함을 해상 교도소로 개조하여, 이곳에 프랑스군 포로들을 수용했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포로 대접이 영~ 시원찮았던 셈이지요.  영국군들도 이런 곳에 수용되는 프랑스 포로들에 대해 많이 동정했다고 합니다.

 

물론 장교들과 사병들은 분리 수용되었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장교는 신사로서 사회 지배층으로 간주되었지만, 사병들은 글자 그대로 쫄병 취급을 받아 대접이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포로들이 열악한 급식과 불결한 주거 환경으로 병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나찌의 유태인 수용소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고요,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고 합니다.  당시 포로들의 사망률은 55명당 1명으로서, 영국 해군의 사망률인 30명당 1명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장교들에게는 편지는 물론이고, 본국에서 봉급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무보직 장교에게 주어지는 half-pay지요.)  감옥 생활하는 주제에 봉급으로 뭘 하느냐고요 ? 그걸 이해하려면 당시 포로가 된 장교의 생활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The Surgeon's Mate by Patrick O'Brian  (배경: 프랑스, 1813년) ----------------------

 

루소는 파브르 박사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스티븐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 식사는 물론 시켜 먹겠네.  문제는 어디에 주문하느냐 하는 건데, 이 신사분은 말이지," 스티븐은 오브리 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갓 낳은 달걀에, 죽과 쌀 미음(rice-water)을 아주 신선하게 드셔야 하거든.  그리고 난 커피가 뜨거워야 하네."

 

"문제 없습니다."  루소가 대답했다.  "여기서 100 야드도 안 떨어진 곳을 알거든요.  마담 뷰 르이듀는 하루 중 언제라도 요리를 만들고, 또 고급 와인도 제공한답니다."

 

"그렇다면 그 미망인에게 주문하도록 하지.  이 신사분들에게는 신선한 우유와 보통의 부드러운 빵을, 내게는 커피와 크롸상을 준비해주게.  특히 커피는 강하게 끓여주게."

 

루소는 이 주문 내용은 듣지도 않고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고객분들은 봐쟁이나 룰 식당 같은 곳에 주문하기를 바라곤 합지요.  어떤 고객들은 돈을 그냥 창 밖으로 던져 버리더라고요.  제가 뭐 제 사적인 의견을 고객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취향이라는 건 다 다르쟎습니까... (중략)"

 

"그럼 마담 르이듀 네로 주문을 보내지." 스티븐이 말했다.

 

루소는 그대로 자기 말을 계속 했다.  "제가 뭐 황제의 식탁같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신사분들을 속이지 않아요.  그저 정직한 중산층 요리일 뿐이라구요.  하지만 그 씨베 드 라뼁(Civet de lapin: 레드 와인으로 만든 토끼 스튜, 역주)의 맛은 정말 !... (중략)"

 

"자, 그럼 마담 르이듀 네로 주문을 보내겠네." 스티븐이 말했다.  "우유, 부드러운 빵, 커피, 그리고 크롸상일세.  그리고 특히 커피는 강하게 끓여달라고 부탁해주게."

 

커피가 왔고, 맛을 보니 주문대로 진했다.  뜨겁고, 진했고, 아주 놀랍도록 향기로왔다.  크롸상은 기름졌으나, 너무 기름지지도 않았다.  아주 정말 멋진 아침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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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 위의 대화는 어디서 이루어진 대화였을까요 ?  이 글의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포로로 잡힌 영국 해군 장교들과 프랑스 간수 사이의 대화입니다.  전쟁 포로가 파리 시내의 식당에서 요리를 시켜 먹는다 ?  그럼 돈은 누가 냈을까요 ?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먹을 사람이 내야지요.  따라서 똑같은 포로라고 해도, 돈이 있는 장교와 돈이 없는 장교는 생활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Surgeon's Mate' 편에서도, 간수가 처음에는 교도소 식사(prison ration)를 하시겠냐, 외부에 시켜드시겠냐고 묻습니다.  포로로 잡힌 일행 중 야기엘로 대위는 돈이 없었던 관계로, '난 교도소 식사를 먹어보겠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스티븐이 대신 밥값을 내주지요.   

 

당시 장교들이 불편하고 지루한 포로생활을 면하는 데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1. 가석방 (parole)

 

당시는 아직 18세기의 잔재가 진하게 남아있는, 즉 낭만이라는 것이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포로가 된 장교들에게는, 가석방 문서에 서명하라는 제안이 주어졌습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자기가 포로가 된 것을 인정하고, 탈출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이 문서에 서명하면, 그 장교는 감금되지도 않고, 감시도 붙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롭게 사는 거지요.  그러자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  예, 돈이 필요하지요.  돈이 없으면 감금생활이나 가석방 생활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  당시 분위기는 유전(有錢)품위 무전(無錢)망신이었습니다. 


대신 그 문서에 서명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혹은 포로 교환이 이루어져 석방될 때까지는 몹시 지루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전쟁이 근 20년 가까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히 서명할 문제는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이런 가석방 제도는 귀족 장교들이 편하게 포로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 포로 교환

 

당시에는 적군끼리도 정기적으로 연락장교들이 만나서 포로들의 편지도 교환하고 양쪽 군 지휘관끼리의 공식 문서도 주고 받았습니다.  이때 교환되는 문서 중의 하나가, 양쪽이 서로 붙잡고 있는 포로들의 명단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서로 교환할 만한 장교의 이름을 발견하면 '맞바꾸자'라는 제안이 오고 갔습니다.  물론 상응할 만한 계급끼리 교환이 이루어졌지요.  그렇다고 이런 교환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고, 특정인물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거나 또는 악질적인 전범인 경우에는 이런 교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1803년 짧은 휴전 뒤에 다시 전쟁이 시작된 이래, 영국에 대해 철천지 원수같은 앙심을 품고 있어서, 영국과는 포로 교환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이런저런 피치못할 사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붙잡더라도, 제대로 포로를 후방으로 후송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상대방 장교에게 일종의 '가불' 포로 교환이 제공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포로 교환 조건에 따라 먼저 풀어주는 거지요.  대신 가석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식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 전쟁에서 적국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상대방이 신사라는 것을 믿고, 상대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장교들 이야기입니다.  졸병들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건 사실 포로가 되기 전, 아군 장교들에게서도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까 뭐 별로 다를 바도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대탈주'처럼, 포로로 있다가 탈출하여 영웅 대접을 받은 경우가 있었을까요 ?  예,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Colquhoun Grant라는 영국군 장교였습니다. 

 

 

(이 양반이 바로 Colquhoun Grant)

 

이 친구는 EO(Exploring Officer)라고 해서, 정찰 장교였습니다.  EO라는 일을 하는 장교는, 요즘으로 따지면 고공 정찰기의 역할을 했습니다.  즉, 적의 후방 지역을 말을 타고 혼자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단, 적의 후방이라고 해도, 반드시 군복 정복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붙잡혔을 때 스파이로서 교수형을 당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군복을 입고도 적의 후방에서 체포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빠른 말이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현대전에서도 정찰기가 적 후방에서 살아남으려면 엄청난 속도로 고공 비행을 해야 하지요 ?  이런 EO들은, 건초를 먹여서 키우지 않고 곡물을 먹여서 키운 말만 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곡물을 먹여서 키운 말이 스태미너가 훨씬 좋았나 봅니다.  대개의 기병대원들이 타는 말은 아무래도 값이 싼 풀을 먹었는데, 이런 말들은 곡물을 먹고 자란 말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랜트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했는데, 탁월한 기민함과 과감성으로 프랑스군 점령 지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프랑스군의 움직임 파악이나 스페인 빨치산과의 연락 등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그랜트가 유명해진 사건은, 그랜트의 말이 결국 실수를 하여 프랑스군에 체포되었던 건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랜트는 뭐 그렇게 나쁜 대우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간에 영국군 군복을 입은 장교였으므로, 그랜트는 포로가 된 장교로서 괜찮은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랜트는 프랑스로 압송된 이후, 파리에서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영국군 군복을 입은 채로, 파리 시내를 몇 주동안 태연히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호텔에도 투숙하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요.  그의 군복이 영국군 전통의 붉은 코트인 것을 보고 의심스러워 하는 프랑스인들에게는, "저는 미국군 장교입니다" 라고 뻥을 치고 돌아다녔는데, 이게 아주 잘 먹혔다고 합니다.  1812년 발발한 미국과 영국간의 전쟁 때문에, 당시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 관계였거든요. 

 

결국 항구도시인 낭트까지 흘러들어온 그랜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인 선장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전쟁 상태였지만, 같은 앵글로 색슨족인데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로 인해, 당시에도 개인들 간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Colquhoun Grant에 대해서는 책도 있다고 합니다.  Jock Haswell이라는 사람이 1969년에 'The First Respectable Spy' 라는 제목으로 이 사람에 대한 책을 썼다는데, 글쎄요, 전 안 읽었습니다.  Sharpe 시리즈의 작가인 Bernard Cornwell은 읽은 모양입니다.  샤프의 성격이나 모험 중 상당 부분은 이 그랜트의 이야기로부터 따 온 것이라고 합니다.

 

끝을 맺기 전에, 저 위에 인용된 소설에서 언급된  rice-water에 대해 찾아본 바를 말씀드립니다.  이건 그냥 쌀 죽입니다.  우리나라 죽과 비슷하네요.  다만 간을 참기름과 간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유와 설탕을 넣는 것이 다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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