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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시대의 공성전

by nasica-old 2008.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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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하면 저는 먼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성채가 떠오릅니다.  저 위 사진에 보이는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도 오스트리아인가 독일인가에 서있는 멋진 성을 본 떠서 지은 것이라고 하지요 ?  중세 유럽의 성이 소규모 군사 요새인 것에 비해, 동양의 성은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군사 요새라기 보다는 궁전이 있는 형식이지요.  그래서 적어도 겉보기에는, 또 관광 자원으로서의 측면에서는 동양의 성보다는 중세 유럽의 성이 더 좋아 보입니다.

 

이런 중세 유럽의 성은 대포의 등장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만, 대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나폴레옹 시대에도 요새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 요새들은 대포가 없던 중세의 요새나 성곽에 비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포 시대의 요새는 주로 프랑스의 위대한 공병 장교였던 보방(Vauban)에 의해 이미 17세기에 완성되었습니다.

 

 
보방식으로 만든 요새와 기존 성채와의 가장 큰 차이는 성벽이 낮아졌고 대신 두꺼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벽이 높아봐야, 대포의 포격에 더 취약할 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꺼워진 이유는, 대포의 공격에 더 잘 견디고, 또 성루에 포대를 얹어서 적의 포병대에 반격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두번째의 특징은, 이건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인데, 성벽 앞에 glacis라고 하는, 일종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제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glacis는 성벽보다 약간 낮은 높이로 쌓았고, glacis와 성벽 사이에는 깊은 해자가 있었습니다.  이 glacis의 역할은 대포알을 튕겨냄으로써, 포격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glacis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대포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당시 대포에 대한 것은 "나폴레옹 시대의 포병 ( http://blog.daum.net/nasica/4973554 )" 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glacis에 대해서 좀더 이해가 쉬울 것 같네요.

 

 



당시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2가지였습니다. 

 

1. breach (성벽에 구멍 뚫기)

 

 

(이 사진은 그림이 예뼈서 여기에 무단 전재하기는 했지만, 사실 공성전용 포병대는 아니고 그냥 야전포네요.)


먼저, 요새 주변의 만만한 곳에, 공성포(siege gun)를 설치할 참호를 팝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요새의 어떤 지역으로 쳐들어가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로 공병 장교가 요새 주변을 며칠간 관찰한 끝에 공격군 사령관과 함께 신중히 결정했습니다.


공성포는 매우 무겁고, 움직이기도 어렵고, 제대로된 발사를 하기 위해서는 땅도 정말 많이 파고 다지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위치를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미니어처가 좀더 공성포다워 보이는군요.)


그러므로, 우습게도, 당연히, 요새 수비병력도 '얘들이 어느쪽으로 쳐들어오려는 거구나'하는 것을 눈치까고 그쪽의 수비 태세를 더욱 철저히 하게 됩니다.


아뭏든, 공성포가 설치되면, 곧 포격을 시작하여 성벽에 구멍을 냅니다. 성벽에 구멍이 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어서, 하룻만에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1주일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glacis가 설치된 성벽은 정말 골치거리여서, 아주 조준을 정확하게 해야만 glacis 너머로 나지막히 보이는 성벽을 때릴 수 있었습니다.  조준이 조금만 낮아도, 포탄은 glacis를 때리고 튕겨올라 성벽은 건드리지 못하고 수비병력의 머리를 넘어 요새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뭏든 기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결국 구멍은 뚫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벽에서 무너진 돌들은 성벽 앞에 무너져내려, 공격진이 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렇게되면, 역시 전의 공병 장교가 다시 망원경으로 주의깊게 살펴본 뒤 한마디 합니다.


"It's practical."  여기서의 practical이라는 단어는 실용적이라는 뜻이 아니고, 저 뚫린 구멍(breach)을 통한 공격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공격진은 이제 돌격할 준비를 합니다.  당연히 요새 수비병은, 어느쪽으로 공격진이 들어올지 확실해진 만큼, 무너진 성벽 뒤에 갖가지 방어 준비를 해놓습니다. 포도탄과 캐니스터탄을 잔뜩 쟁여둔 대포를 여러문 조준해두기도 하고, 무너진 성벽 안쪽에 제2, 제3의 목책같은 것을 만들어두기도 하고, 병력을 집중해두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가다가 지뢰를 뭍어놓았다가 공격진이 몰려올때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구멍안으로 제일 먼저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100%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구멍안으로 제일 먼저 뛰어들어갔을까요 ? 

 

 


이 구멍안으로 제일 먼저 뛰어드는 결사대를 forlorn hope라고 불렀습니다. '덧없는 희망' 정도의 뜻인데, 그야말로 덧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100% 자원병이었습니다.  약 70~80명 정도로 이루어진 결사대는 대개 승진을 간절하게 원하는 병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원래 영국군의 장교직은 purchase system이라고 해서, 매관매직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즉, 돈만 주면 장교직을 살 수 있었고, 돈이 없으면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승진은 하고 싶고, 돈은 없는 사람들이 이런 결사대에 자원했습니다.  영국군 수뇌부도,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공짜로 장교직을 얻는 것은 원치않았습니다.  장교에게 줄 지휘권이나 부대 숫자에는 한계가 있는데, 장교만 넘쳐나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나 forlorn hope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이 죽었으니까, 장교직을 주지 않아도 되었거든요.  그리고 forlorn hope에 들어간다고 다 장교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하사관 이상의 계급이어야 했고, 읽고 쓸 줄 알아야 했습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그저 명예나, 금전적 보상, 지루함에서의 탈출 등을 바라고 불나방처럼 날아들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중부 인도의 마이소르 지방의 수도인 셰링가파탐에 쳐들어갔던 영국군도 breach를 만들고 그 안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때 그레이엄이라는 하사관이 forlorn hope에 지원하여, 가장 먼저 무너진 성루에 올라 깃발을 꽂고 "그레이엄 중위 !"라고 외친 사례는 꽤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바로 다음 순간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참고로, 이 공격에서는 사상자가 깜짝 놀랄만큼 적어서, 이 breach에서 전사한 사람은 이 그레이엄 '중위'를 포함하여 딱 2명이었다고 합니다.

 

 


Forlorn hope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요새로 따지면 '나 공수특전단 또는 해병대 나왔어' 정도의 긍지를 가질 수 있었고, 또 동료들도 존중해주었습니다.  Forlorn hope에서 살아나오면 소매에 녹색의 마크를 달아주었다고 합니다.

 

 

 

2.  두번째 방법은 사다리 공격(escalade)이 있습니다.


사다리 공격은, 매우 단순 무식해보이지만, 사실 매우 효율적인 공격 방법이었습니다. 포격으로 성벽에 구멍을 뚫는 것에 비해 가장 큰 장점은 수비병력에게 요새의 어느 부분을 공격할지 전혀 경고를 주지 않고 신속하게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공격진이 요새에 도착해서 땅을 파고, 공성포를 끌어오고, 며칠동안 포격을 해대는 지루함도 필요없었습니다. 따라서, 요새 수비병이 준비 태세를 갖추기 전에 신속히 점령을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breach 공격이 실패로 끝난 요새가 사다리 공격으로 점령된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예상할 수도 있는 일인데, 성벽에 구멍이 뚫리고 그쪽으로 공격진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그쪽으로 수비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성동격서 식으로, 엉뚱한 곳에 사다리를 놓고 쳐들어가서 허를 찌르면 쉽게 요새가 함락되곤 했습니다.  특히 야간에 사다리 공격을 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웰링턴 장군은 인도 주둔시에, 아메드누거, 가윌구르 요새 공격에서 사다리 공격으로 성공을 연이어 거두었습니다. 웰링턴 공은 스페인 전쟁에서도 시우다드 로드리고, 바다호스 등에서 breach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주저하지 않고 사다리 공격을 택했습니다. 웰링턴의 급한 성격에 사다리 공격이 잘 어울렸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도 당연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먼저, 성벽의 높이를 정확히 재어야 했고, 거기에 따라 넉넉한 길이의 사다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1812년, 스페인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수비하는 바다호스 요새를 웰링턴 공이 공략할 때, 30피트 길이의 사다리를 만들라고 명령이 내려졌었습니다.  12개가 만들어졌는데, 일부는 길이가 32피트였고 일부는 28피트였습니다. 사다리로 기어올라가서, 꼭대기에 도달했는데 길이가 60cm 짧아서 더 올라갈 수가 없다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  이런 사다리 하나를 나르는데 6명의 병사가 필요했는데, 당연히 이들은 적 사격의 주요 목표가 되었고, 이렇게 땅에 떨어진 사다리를 다시 주워 올리고 하는 동안 공격은 지연되었습니다.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위에서는 총알, 돌이 쏟아지고, 꼭대기에 도달하면 총검과 칼이 찔러대고, 간혹가다가 적병이 아예 사다리를 밀어떨어뜨리려 하고... 이런 경험은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드를 타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Badajoz 요새의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영국군) 


당연히, 사다리를 올라가는데는 두손이 다 필요했으므로, 총은 어깨에 둘러매어야 했고, 칼은 칼집에 꽂아두거나 손목에 가죽끈으로 늘어뜨려 묶어두어야 했습니다.  가능한한 많은 숫자의 병사가 한꺼번에 사다리에 매달려야 더 안정성이 있어서 더 유리했습니다. 이렇게 공격해들어오는 공격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수비군은 흉벽 너머로 몸을 내밀어 조준을 해야 했으므로, 이때 밑에서 쏘아대는 머스켓 총탄에 수비군이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단 공격진의 병사가 성벽 꼭대기에 발을 딛는 순간, 공격은 성공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수비하는 사람의 심리에, 일단 성벽 위에 적병이 발을 디디면 '이젠 끝이다'라는 공포감이 꽤 심했나 봅니다.


 


웰링턴 공작이 젊은 시절, 아직 웰슬리 장군이었을 때, 인도의 마라타 연합 공격 작전에서, 아메드누거라는 성을 사다리 공격으로 순식간에 점령했었습니다.  이때 순식간이라는 것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고, 사실은 나름대로 우스운 일이 많았답니다. 처음 시도한 사다리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성벽 너머까지 영국군이 기어올라갔는데, 뜨아하게도, 그 성벽에는 수비병이 발을 디디는 사격대(firestep)가 없었습니다 !  뛰어내리자니 높이가 20피트(6m)나 되는 바람에, 병사들이 뛰어내리려고 하질 않아서, 부득이 다시 기어내려가서 다른 곳에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쉽게 성이 떨어진 셈이지요.  그때 당시 아메드누거 공략에 협조했던 어떤 인도 소왕국 군인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영국인들은 정말 놀라운 병사들이다. 아침에 도착해서, 성을 한번 둘러보더니, 사다리를 올라놓고 올라가서 성을 정복하고는,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이때 웰링턴 공 (그때는 아직 그냥 웰슬리 장군이었는데) 눈 앞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이 콜린 캠벨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위였습니다.  이 젊은 중위는 스코틀랜드 전통의 검인 클레이모어(claymore)를 손에 들고 사다리를 기어올라갔으나 두번이나 적의 공격에 부상을 입고 떨어졌습니다.  세번째는 클레이모어를 등에 짊어지고 두손으로 사다리를 올라가서, 결국 영국군 중에 최초로 성벽을 넘어 성을 점령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웰링턴 공은 즉각 이 중위를 대위로 승진시키고 자기 막료로 삼습니다. 

 

 


캠벨은 웰링턴을 따라 아사예 전투 및 코펜하겐 침공에도 참전했고, 스페인 전쟁은 물론 워털루에도 웰링턴의 막료로 참전합니다.  나중에 그는 중장까지 승진해서, 노바 스코티아의 총독 및 실론섬의 총독을 역임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실론섬에 재직 중일 때, 웰링턴 공이 캠벨에게 쓴 편지가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우린 둘 다 늙어가고 있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메드누거 성벽 아래서 자네를 처음 보던 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걸세."


캠벨은 실론섬에서 귀국한지 1주일만에, 71세의 나이로 죽었고, 성 제임스 성당에 묻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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