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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음식 이야기

고기 써는 남자 - meat carving에 얽힌 역사 이야기

by nasica-old 201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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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점심에 저희 동네 소비 조합인 '자연드림'에서 사온 1만5천원짜리 족발을 먹었습니다.  뼈다귀와 함께 덩어리 고기로 진공 포장된 것이다보니,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와이프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제가 썰어서 전기 오븐으로 잠깐 덥혀서 먹기로 했어요.  나름 잘 썰었다고 자부합니다.  저희 집 애도 먹기 좋게 일부러 잘게 썰었어요.





(자연드림이라는 생활 협동조합에서 산 것입니다.  1만5천원인데, 세식구가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먹고도 조금 남았습니다.  맛도 괜찮더군요.  광고비 안 받았습니다.  주신다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써는 동안에, 이렇게 고기를 써는 것은 나름 손아귀 힘이 필요한 일이라서 여자가 하기에는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읽던 Hornblower니 Aubrey & Maturin이니 하는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모험 소설들에 자주 나오는 식사 장면들이 생각나더군요.  그런 귀족들이나 고위 장교들의 식탁에서는 메인 요리는 요즘처럼 미리 적절한 크기로 썰어서 각자의 접시에 올려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큼직한 고기 덩어리 통째로 큰 접시에 담겨 서빙됩니다.  이걸 식탁 위에서 썰어서 나누어 줘야 하는데, 이는 식탁에 앉은 신사들과 장교들 뒤에 서있는 급사들의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식탁에 앉은 손님들 중에 한 명이 썰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고기를 써는 역할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 식탁을 마련한 주인이 손님들 중 적절한, 즉 계급이나 신분이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사람에게 정중히 부탁을 한 대상에게 돌아갔습니다.  





사실 뼈까지 붙어있는 큼직한 고기 덩어리, 또는 커다란 새 통구이를 적당한 크기로 써는 일은 의외로 힘들고 또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서 귀찮고 짜증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기 써는 역할을 부탁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명예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식사자리를 마련한 주인이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표시였거든요.  왜 고기 써는 역할이 명예스러운 일이 되었을까요 ?




(귀족 소년이 시동으로 일하며 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쌓는 모습입니다.  주군의 식사 시중도 무척 중요한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




이는 주로 중세 기사들의 수련 과정과 상관이 있다고 합니다.  하급 귀족 계급의 소년들은 어려서부터 더 높은 귀족 집안에 들어가 거기서 일종의 시동(page)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또 고위 귀족 계급의 소년들은 왕가에 들어가서 그런 시동 역할을 했지요.  이는 정규 학교가 없던 시절, 시동 생활을 하면서 귀족 또는 왕족들의 생활 예절을 익히고 교양을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모시던 귀족을 따라 전투에도 나가고, 그러다 공을 세우면 기사로 서임을 받았지요.  그렇게 귀족의 식탁에서 고기를 써는 것은 그런 예비 기사들의 몫이었고, 또 기사가 된 이후에도 모시던 귀족과 식사를 할 때는 자신이 고기를 썰었습니다.  따라서 자작이 백작을 위해 고기를 썰고, 공작이 왕을 위해 고기를 써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위명이 자자한 에드워드 흑태자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흔히 흑태자(Black Prince)로 불리는 영국 왕세자 에드워드(Edward)와 프랑스의 선량왕 장(Jean le Bon)의 이야기입니다.  백년전쟁 중인 1356년 9월에 벌어진 프와티에(Poitiers) 전투에서 영국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 왕인 장 2세가 포로로 잡혀오자, 흑태자 에드워드는 매우 공손히 장 2세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면서 식사 때가 되자, 에드워드는 식탁에서 고기를 써는 등 시중만 들었고, '내게는 이런 위대한 왕과 한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라며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것을 사양했다고 합니다.


실은 유럽 중세 시대보다 훨씬 더 예전인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비슷한 전통이 있었나 봅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 전역의 패권을 두고 싸우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낸 것은 BC 405년 아에고스포타미(Aegospotami) 해전이었습니다.  헬레스폰트 해협 인근에서 벌어진 이 결정적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희대의 지장이던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Lýsandros)였는데, 이 양반은 자신보다 더 젊은 스파르타의 왕자 아게실라우스(Agesilaos)를 지지하여 왕으로 만들어 준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를 평정한 스파르타는 리산드로스가 전략을 짜고, 아게실라우스가 총사령관을 맡아 그리스인들의 염원이던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소아시아 곳곳을 지나갈 때마다, 리산드로스의 명성과 인맥이 대단하여 현지 실권자들이 모두 리산드로스를 떠받드는 것이 아게실라우스 왕의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찾아와 뭔가 청탁을 하면 그는 매우 차가운 태도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부탁은 내 식탁에서 고기를 써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고기를 써는 사람은 리산드로스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왕의 식탁에서 고기를 써는 것은 그 시절에도 높은 신분의 인물이 했었나 봅니다.





(아게실라우스도 나름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간식과 패스트리 http://blog.daum.net/nasica/6862341 편을 참조하세요.)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지면서 식탁에서 고기를 써는 것은 나름 명예로운 일이 되었는데, 실제로도 고기를 잘 써는 것은 귀족들과 신사들에게 있어 꼭 익혀야 할 중요한 기술이 되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당시 서민 층에서는 이렇게 커다란 고기덩어리를 먹을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오직 귀족 및 신사 계급 출신들만 제대로 고기를 썰 줄 알았습니다.  항상 쇠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경우엔 뼈가 붙은 커다란 양다리 구이를 썰어야 할 경우도 있었고, 어떤 경우엔 커다란 백조구이를, 또 어떤 경우엔 커다란 다랑어를 썰어야 했는데, 이런 다양한 고기와 생선을 잘 자르는 것은 그런 호화로운 식탁에 자주 앉아본 사람이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식탁이 아니라 부엌에서 1인분씩 잘라서 접시에 담아 서빙을 하기 시작한 것 언제부터였는지는 구글링을 해도 나오지 않더군요.  프랑스 요리에서 요즘처럼 식탁에 앉은 손님들에게 코스별로 한 가지씩 요리가 순서대로 나오는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로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사 방법을 프랑스에 도입시킨 것은 1808년부터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를 지냈던 알렉산드르 쿠라킨 대공(Prince Alexander Kurakin)이었습니다.  제4차 대불 동맹 전쟁을 끝낸 1807년 틸지트(Tilsit) 조약에도 참여했던 러시아의 외교통이었던 이 분은 파리 대사로 있는 동안 '다이아몬드 프린스'로 불릴 정도의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 잡았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까지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만, 그가 프랑스에 남긴 가장 큰 것은 프랑스 사교계에 러시아식 서빙(Service à la russe) 방식을 전파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에서든 영국에서든 요리는 수프-전채-메인 요리-치즈 뭐 이런 식으로 한 가지씩 나온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식탁에 으리으리하게 차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날이 추워서 그랬는지 그렇게 서빙되면 일부 요리는 식은 채로 먹어야 했기 때문에, 한 가지씩 요리가 나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쿠라킨 대공이 전해준 러시아식 서빙이 훨씬 더 우아한 식탁과 더 따뜻한 음식을 가능하게 해줬기 때문에, 이 방식은 프랑스에 금새 자리 잡았고, 이어서 영국 등으로도 퍼져 나갔습니다.  



(쿠라킨 대공입니다.)



러시아에서 전해진 프랑스 요리 관련해서는 비스트로(Bistro)라는 간이 음식점이 또 유명하지요.  이는 나폴레옹이 패퇴하여 1814년 파리가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즉, 러시아 코사크 장교들이 파리 번화가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요구하며 러시아어로 빨리 빨리를 뜻하는 “быстро! быстро!”를 외쳤는데 (실제 발음은 뷔스트라 bwistra에 가깝다고 합니다) 파리 시민들이 이를 듣고 뭔가 빨리 음식을 내놓을 수 있는 간이 식당을 비스트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bistro라는 이름의 식당이 파리에 생겨난 것은 60~70년 후인 19세기 말이라고 하니까, 이도 그냥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도시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아마도 실제로는 와인 가게의 조수를 뜻하는 bistraud 혹은 증류주를 넣은 커피인 bistrouille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19세기 말 비스트로 식당의 모습입니다.)





(어쨌거나 bistro에 얽힌 재미난 전설은 좋은 관광거리이지요.  사진은 파리 테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에 있는 어느 식당에 걸린 표지인데, 바로 이곳에서 bistro라는 단어가 코사크인들에 의해 처음 외쳐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식탁에 통구이한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썰지 않고 그대로 들여오는 것은 자신이 잡아온 사냥감을 식구들에게 조금씩 분배하는 원시인 가장처럼 먹을 것을 분배해주며 으시대는 습성이 남아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쩌면 서구 식탁에서 그런 유치한 으시댐이 없어진 것이 저 러시아식 서빙이 도입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러시아식 서빙에서도, 메인 코스인 고기 요리는 절대 1인용 접시에 미리 담겨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접시에 담아 식탁 중앙에 놓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더군요.  만약 1인분씩 고기를 썰어서 가져온다면, 마치 손님에게 '이게 1인분 정량이니까 이것만 먹고 더 달라는 소리 하지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여 요리한 건 엄마인데, 정작 생색은 아빠가 내네요 ?)



요즘도 이렇게 통구이한 고기를 식탁으로 가져와 손님들 앞에서 써는 것이 전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가정에서 추수감사절 칠면조 요리를 썰 때입니다.  물론 저는 직접 그런 추수감사절 식사에 참석한 적은 없고, 그냥 영화에서 봤습니다.  원래 그렇게 칠면조를 식탁에서 써는 것은 그 집안의 가장이 하는 것이 전통이라는데, 그런 커다란 새를 써는 것도 분명히 힘들고 나름 기술이 필요한 일입니다.  궁금해서 구글링을 해보니, 실제로는 많은 미국인 가정에서도 칠면조를 그냥 부엌에서 썰어가지고 내오는 경우가 대부분인 모양입니다.  어떤 주부 네티즌은 '칠면조를 썰어 나눠주는 것이 먹을 것을 벌어오는 가장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권리 어쩌고 하던데 그게 무슨 G랄인지 모르겠더라, 보니까 제대로 썰지도 못해 쩔쩔 매더만, 그 이후로는 그냥 내가 부엌에서 썰어가지고 내온다' 라고 통렬하게 써 놨더군요.  저도 회사에서 동료들과 점심 뭐 먹을지 이야기를 할 때, 괜히 실없이 '남자라면 부대찌게지' 혹은 '남자라면 햄버거지' 등을 말하고는 하는데,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요즘은 굉장히 유치한 개념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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