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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앙졸라와 함께 바리케이드로 !

by nasica-old 201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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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영화를 보고 힐링을 받아 예전에 읽다가 만 레미제라블을 완역판으로 최근에야 다 읽었습니다.   읽으면서도 계속 드는 느낌이, 정말 빅토르 위고는 글자 그대로 '대문호'로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냥 지식이 많다 줄거리가 재미있다 구성 참 잘 짰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와 종교,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그것도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을 본질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말 감탄했습니다. 




(여러분도 꼭 읽어보세요.  다만 빅토르 위고가 잠깐씩 줄거리에서 벗어나 횡설수설 하는 부분만 잘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레미제라블이라는 대작을 한두개 단어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영화 레미제라블의 포스터에서는 그것을 4개 단어로 요약해놓았지요.  바로 투쟁, 꿈, 희망, 사랑 (Fight, Dream, Hope, Love) 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발행된 OST CD의 속표지에는 이 단어들을 한글화하면서, 맨 앞에 나온 투쟁을 은근슬쩍 용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http://v.daum.net/link/38443197?&CT=ER_POP 참조) 설마 정부가 이런 하찮은 일에까지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고, 배급사에서 알아서 납작 엎드린 것일까요 ?  하긴 배급사 사장님도 당연히 사회의 상류층이실테니 배급사 사장님께서 '투쟁'이라는 빨갱이 냄새나는 단어를 불편히 여기셔서 스스로 바꾸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사랑과 용서로 모든 것이 해결될 거야' 라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레미제라블에서 투쟁을 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왜 굳이 투쟁을 용서로 바꿔치기 했을까요 ?  우리 사회는 21세기에도 아직 빨갱이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



저는 레미제라블의 가사들을 나름 열심히 찾아보고 들어보고 했는데, 가장 흔하게 들린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바리케이드라는 단어였습니다.  바리케이드는 레미제라블에서 억눌린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존재이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정치 투쟁적인 이야기보다는 바리케이드 자체에 대해서만 (흥미위주로) 살펴보시겠습니다.

 

 

(TO THE BARRICADE !!!)



일단 바리케이드라는 단어는 영어로나 불어로나 모두 barricade 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통을 뜻하는 barrique (영어로는 barrel) 입니다.  통이 바리케이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것은 1588년 5월 12일, 프랑스 역사에서는 바리케이드의 날 (Journée des barricades)이라고 불리는 사건 때부터였습니다.  이 사건은 카톨릭과 신교(위그노) 간의 종교 내란이 한창이던 당시, 완고한 카톨릭 세력인 파리 시민들이 카톨릭 동맹의 수장인 앙리 기즈 공작 (Henri, duc de Guise)의 지휘 하에 일으킨 봉기 사건입니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 3세는 위그노 세력에 대해 다소 뜨듯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불만과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제압하고자 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책략이 결합하여 이런 결과를 낳았지요. 




(1588년 파리 바리케이드를 주도했던 기즈 공작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아르마다'라는 스페인 무적함대 관련 역사책에서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저도 죽기 전에 그런 책 한번 써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주 파리 스페인 대사였던 멘도사(Bernardino de Mendoza)의 기술적 조언이 파리 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멘도사는 당시 합스부르크의 영토였던 네덜란드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에서 1560년 경부터 무려 15년 이상을 싸웠던 고참 전술가였습니다.  그는 이때 네덜란드 주민들이 도심 지역에서 스페인 군에게 저항할 때 사용하던 방법을 파리 시민들에게 전수했습니다.  즉, 큰 술통에 흙과 자갈을 넣으면 훌륭한 방어물이 되는데, 이걸 원하는 곳으로 옮기고자 할 때는 옆으로 눕혀서 굴리면 매우 편하고, 장애물을 설치하고자 하면 그저 통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스페인군에게 항복하는 네덜란드의 브레다 시의 모습입니다.  저기서 항복하는 네덜란드 양반은 '아르마다'에도 주요 등장 인물로 나왔던 나소의 저스틴입니다.)


이 전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후 시민들이 정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도심 내부에 설치하는 장애물은 모두 (통이건 뭐건) 바리케이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큰 통보다는 그냥 삼베 같은 것으로 자루를 만들고 거기에 흙을 퍼담아 쌓아올리는 샌드백이 더 좋은 바리케이드 재료입니다.  하지만 샌드백은 굴릴 수가 없는데다, 파리같은 도심 한 가운데서 흙을 구하기도 어려우니 좋은 대안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1588년의 봉기 때에도, 이미 파리 시내에서는 흙과 모래를 대량으로 구하기가 어려워, 국왕군의 의심을 무릅쓰고라도 미리 군데군데 흙과 모래를 많이 쌓아놓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빈통이라고 거저 생기는 거 아닙니다.  이놈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 돈이에요 돈 )



레미제라블 속에서는 바리케이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큰 통은 바리케이드 재료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큰 통은 비싼 물건입니다.  1588년 봉기야 기즈 공작같은 거물들이 미리 철저히 준비를 했으니 미리 큰 통과 흙 등을 구해놓을 수 있었던 것이고, 1832년 6월 봉기 같은 경우는 노동 계층이 일으킨 것이니 통은 커녕 샌드백을 만들 자루조차 준비를 못했습니다.  이때 바리케이드를 쌓은 재료는 영화 속처럼 가구나 마차, 수레 등도 있었지만, 특히 길을 덮은 포석을 들어내어 쌓기도 했고, 아예 몇몇 주변 건물을 때려부수고 거기서 나온 목재와 돌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사유 재산 침해 아니냐고요 ?  무장 봉기는 어차피 살인도 마구 저지르는 중대 범죄인데, 무슨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십니까... 


 

 


(저 바리케이드 장면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가구들을 거리로 내던져 주면서 활짝 웃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의 기본 무장에 대해서는 지난 편에서 설명드렸지요.  그런데 군대에서는 탄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지요.  바로 식량입니다.  그런데 대개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기와 탄약 조달에는 신경을 많이 쓰지만, 정작 식량 조달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일단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일으키는 것이 무장 봉기인데, 대규모로 식량을 비축해둘 돈과 조직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바리케이드 활동은 시민 대다수의 동조를 받지 않으면 100% 실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시민들의 동조를 받는다면 동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먹을 것을 가져다 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어차피 망하는 것이니 굶어죽으나 정부군의 총에 맞아 죽으나 그게 그거였겠지요.  게다가 이런 무장 봉기는 1주일 이상 끄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바리케이드의 무장 시민들에게 먹을 것을 전달하는 여자들)



앙졸라의 바리케이드에서도 16시간이 지나자 인근 술집인 코랭뜨(Corinth) 주점의 식량이 금새 바닥나 버리지요.  이때 독특한 구절이 본문에 나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앙졸라가 무장 시민들에게 와인 마시는 것을 금지시키고 대신 브랜디를 조금씩 나눠주는 장면입니다.  이거 읽으신 분들은 이 대목에서 좀 갸우뚱하지 않으셨는지요 ?  음식이 떨어진 것하고 와인하고는 무슨 상관이고, 또 왜 와인은 안되고 브랜디는 되는거지 하고요.




(이건 브랜디 잔입니다.  와인 잔하고는 달리 체온이 전달되도록 뭐 손바닥으로 아래부분을 감싸서 마셔야 한다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암튼 브랜디는 홀짝홀짝 약간만 마셔야지 저런 잔에 잔뜩 따라 마시면 야만인 취급 당한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일단 와인을 못 마시게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알코올은 식욕을 자극하거든요.  원래 서양 사람들은 식사 전에, 그리고 식사 중에 가볍게 와인을 한두잔 하지요.  이건 다 식사를 맛있게 하기 위한, 일종의 애피타이저입니다.   물론 서양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노인 요양원에서도 식욕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의사 처방에 따라 식사와 함께 와인을 작은 잔으로 한잔 배식한다고 합니다.  노인들 건강의 제1 요소는 잘 먹는 것이거든요.  그럼 브랜디는 왜 나눠 주냐고요 ?  이건 사실... 제대로 된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브랜디도 결국은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술이쟎습니까 ?  다만 브랜디는 와인과는 달리, 식전이나 식사 중이 아니라, 디저트까지 다 먹은 후, 치즈와 함께 가볍게 한두 모금 마시는 식후 주입니다.  그리고 브랜디나 위스키 같은 증류주는 조금 마시면 정신을 번쩍 들게하고 몸이 후끈해지는 효과가 있지요.  알프스 산 위에서 조난자들을 구조해준다는 그 세인트 버나드 개가 목에 차고 다니는 작은 술통 속에도 브랜디가 들어있습니다.  앙졸라가 브랜디는 조금씩 나눠준 것도 그것과 같은 효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저씨, 아저씨 ?  어여 일어나여,  일어나서 이거 한잔 드셔봐.  정신이 번쩍 드실거여 !)



기본적으로 바리케이드는 약자가 강자에 대한 방어물로서 만드는 물건이지요.  1830년의 7월 혁명이든, 1848년의 2월 혁명이든, 일단 아무리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온다고 해도, 시민들은 조직면에서나 무장면에서나 약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몸을 숨길 방어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말했듯이, 요새라는 방어물은 약자에게도 용기를 주는 곳이거든요.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게 되면, 주저하는 시민들에게도 뭔가 자신감을 가지고 거리로 달려나올 용기를 주는 법입니다.


민중이 바리케이드를 쌓지 않고 거리로 나오면 어떻게 되나요 ?  그 답은 1819년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나왔습니다.  재산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달라는 집회가 맨체스터에서 6~8만명 규모로 열리자, 한줌도 안되는 정부군 기병대가 출동했습니다.  처음에 주최측에서는 '무질서에 대비해서 경비를 서러 기병대가 대기 중인 모양이군' 이라고 생각했으나, 갑자기 이들이 군도를 뽑아들고 한쪽부터 도륙을 시작하자, 수만명의 군중이 머리수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수십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치는 참극을 낳았고, 이때 사건은 워털루의 영웅이자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인 웰링턴 공작을 비꼬아 '피털루(Peterloo)의 학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민주주의도 아주 평화롭게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피털루의 학살 장면입니다.)



그래서 혁명과 폭동, 봉기가 끊이지 않았던 19세기 전반부의 프랑스 파리에는 툭하면 바리케이드가 올라갔습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만 해도, 수많은 제2부 리그 폭동의 하나에 불과했는데, 빅토르 위고가 그를 배경으로 레미제라블을 썼기 때문에 불멸의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뭐 ?  이 바리케이드가 뭐 2부리그 소속이라고 ?)



바리케이드가 약자들이 강자에 대항해서 쌓는 방어물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바리케이드로 막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물론 진압군입니다.  그런데 이 진압군의 구성이 다소 복잡합니다. 

영화에서는 일부 생략된 부분입니다만, 흔히 'ABC Cafe'라고 불리는 노래에서 앙졸라가 부르는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COMBEFERRE
At Notre Dame the sections are prepared!


콩브페르 :
노트르 담 지역은 준비 완료 !


FEUILLY
At rue de Bac they're straining at the leash!


푀이 :
바끄 거리는 폭발 직전 !


COURFEYRAC
Students, workers, everyone
There's a river on the run
Like the flowing of the tide
Paris coming to our side!


쿠르페이락 :
학생들, 노동자들, 모두들
마치 밀물처럼
흐르는 강물같지
파리 전체가 우리편으로 오고 있어 !


ENJORAS
The time is near
So near it's stirring the blood in their veins!
And yet beware
Don't let the wine go to your brains!

For the army we fight is a dangerous foe
With the men and the arms that we never can match
It is easy to sit here and swat 'em like flies
But the national guard will be harder to catch.
We need a sign
To rally the people
To call them to arms
To bring them in line!




(Red & Black 바로 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앙졸라 :

때가 가까왔다
혈관 속에 피가 들끓을 정도야
하지만 신중해야해
아직 승리에 도취할 때는 아니지

우리가 싸울 군대는 위험한 적수야
그들의 병력과 무기는 우리가 상대할 수조차 없어
여기 앉아서 말로만 그들을 파리처럼 때려잡는 건 쉽지
하지만 '국민방위군'은 파리보다는 잡기 어려워
우리에겐 필요해
민중들을 모을,
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설,
그들을 규합할 신호가 !


(영화에서는 앙졸라의 초록색 가사만 나옵니다...)




(앙졸라가 Don't let the wine go to your brain ~ 하는 장면에서 그걸 들으며 술을 마시는 그랑테르의 쿨~함)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발장이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있는 바리케이드로 찾아갈 때, 길바닥에 쓰러진 정부군 병사의 옷을 벗겨 그 옷을 입고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고 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약간 다르게 나옵니다.  즉, 원래 장발장이 '국민방위군' (la Garde Nationale, National Guard) 소속인 관계로, 집에 있던 자기 군복을 입고 자기 소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찾아가는 것으로 나오지요.  대체 이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  그런데 당시 나이가 60대였고 도망자 신분이라서 주민등록번호도 없었을 장발장이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  생각해보면 마리우스나 앙졸라 등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ABC의 벗들'도 모두 20대 청년들인데 이들 중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당시 프랑스는 징집제가 아니었나요 ?


 


(잠깐, 여기서 군대 다녀온 사람 손들어봐 !)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이후, 외국과의 전쟁을 위해 1798년 징집제를 실시한 것이 근대 유럽 사회에서 최초의 징집제였습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군 입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다써서 군대를 빠지려고 했지요. (나폴레옹 시절 젊은이들이 앞니를 뽑아야 했던 이유 http://blog.daum.net/nasica/6862352 참조)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징집제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이후, 전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징집제는 철폐되었고, 다시 모병제에 의한 지원병들, 그리고 스위스 및 독일 용병들로 군대를 채웠습니다.  그래서 마리우스나 앙졸라 등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지요. 


 


(뭐야, 아저씨도 그럼 미필인거야 ?)



그런데 장발장이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속되어 있던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  이건 일종의 예비군 같은 것으로서, 평소에는 민간인 생활을 하다가, 폭동이나 내란 같은 비상 사태에 소집되어 질서를 유지시키고 지역을 방위하는 군대였습니다.  원래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때의 무질서를 제어하기 위해, 주로 중산층 시민들이 자원병으로 나서서 결성된 조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군복도 갖춘, 모르는 사람들이 겉으로 봐서는 정규군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군대였지요.  이들은 평상시 해당 지역의 방위에만 활용되었고 또 평상시 집에서 먹고 자고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총과 군복도 무기고가 아니라 각자 자기 집에 보관했고요.  왜 중산층들만 이 조직에 끼워주었냐고요 ?  원래 하층민들은 사실 지킬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산층 이상되는 양반들만 사실 지켜야 할 재산이 있으므로 스스로 총을 들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위는 레미제라블 당시 인물인 르느와르 (Philippe Lenoir, 1785-1867, 그 유명한 르느와르 아님)라는 화가의 국민방위군복을 입은 모습입니다.  아래는 1870년 당시의 국민방위군의 모습입니다.)



장발장이 국민방위군에 들어가게 된 사연도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1831년 파리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했는데, 장발장도 플뤼메(Plumet) 거리에 살고 있던 장발장도 거기에는 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원래 장발장은 이때 이미 60세가 넘었으므로 법적으로 면제될 수 있었으나, 장발장은 나이를 50대로 속이고 국민방위군의 소집에 순순히 응합니다.  국민방위군 소속이라는 것은 건실한 중산층 시민이라는 반증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 댓가로는 1년에 3~4번 소집되어 시청에서 보초를 서는 것이었으니 도망자 신분으로서 최대한 자신을 일반인으로 꾸며야 했던 장발장으로서는 남는 장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앙졸라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을 때, 장발장은 국민방위군 소집령에 응하여 그를 진압하러 가야 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테나르디에의 습격을 경찰로 오인한 장발장이 이미 플뤼메 거리의 집을 버리고 튀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소집 영장이 닿지 않았겠지요. 




(이보게 친구들, 진정하게. 영화와는 달리 사실 이거 내 군복에 내 총이라네.  훔친 것 아니라네.)



프랑스 정규군은 원래 파리 시내에는 소수만 존재했고 주력은 파리 교외에 주둔했기 때문에, 루이 필립 시대에 잦았던 폭동과 무장 봉기를 진압하는 것은 주로 이 국민방위군의 몫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 구성원들의 출신 때문에라도, 국민방위군은 서민들의 편이라기보다는 주로 중산층 시민 계급(부르조아)의 편이었습니다.  가령 1793년, 총재 정부가 선거법을 교묘히 조작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굳히려 하자, 1795년 10월 5일, 약 3만명에 달하는 파리 시내의 국민방위군은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왕당파 편으로 돌아섭니다.  이때 파리 시내에서 총재 정부를 지지하는 정규군 병력은 고작 5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6대1의 불리함을 간단히 극복하고 국민방위군을 산산조각낸 불세출의 영웅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지요.  (나폴레옹, 시민 봉기를 대포로 진압하다 http://blog.daum.net/nasica/6862457 참조)




(미친개에게는 몽둥이를 !  반란군들에게는 대포를 !   보나파르트 장군에게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나폴레옹과 국민방위군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부터 좋지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국민방위군을 해체해버렸지요.  나중에 1809년과 1814년에 잠깐 소집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면서 징집제를 폐지한 뒤에는 부족한 병력을 보완하기 위해 이 국민방위군 제도가 부활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의 정치가 점점 '절대 왕정'으로 퇴보하는 방향으로 향하자, 부르조아 시민층의 왕정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런 움직임은 샤를 10세로 하여금 국민방위군이 유사시 왕정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결국 1827년, 국민방위군은 샤를 10세가 해체시켜 버리지요.  하지만 이때, 조직만 해체했을 뿐 국민방위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류는 압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불과 3년 뒤 터져나온 1830년 7월 혁명에서, 거리로 뛰어나온 수많은 부르조아 시민들의 손에는 국민방위군 시절 사용하던 머스켓 소총이 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1830년 7월 혁명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민간인들에게 왜 이렇게 총이 많은거냐 ?")



1830년 7월 혁명 이후 세워진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립 1세는 그러니까 사실 온건한 입헌 군주제를 원했던 부르조아 시민들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앙졸라가 이끄는 'ABC의 벗들', 즉 과격 공화파가 일으킨 1832년 6월 봉기는 부르조아 시민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사건이었고, 따라서 국민방위군은 이 봉기를 적극적으로 진압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루이 필립의 정치가 점점 도시 부르조아 시민들의 이익에서 멀어지게 되자, 결국 터져나온 1848년 2월 혁명 때는 국민방위군은 혁명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19세기 초반 혁명의 시대에는 국민방위군의 민심이 프랑스의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병사들이 진압은 안하고 'Do you hear people sing' 노래를 부르면서 폭도들과 함께 행진하면 큰일 나는 거에요.)



제 지난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는 항상 모병제보다는 징집제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다만 현재의 노예같은 군대 생활은 결사 반대입니다.  징집된 군인들의 생활 환경과 급료는 미군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지금보다는 대폭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제가 진보 좌익인 척 하는 보수 우익이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반드시 국민 대다수와 이해 관계가 같아야 합니다.  스파르타나 로마가 강했던 것은 소규모 자작농이 곧 정규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사회주의적 경제체계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스파르타 시민들이 부자와 빈민으로 나뉘게 되면서, 또 로마 공화정의 군대가 마리우스나 술라, 케사르나 폼페이우스 개인을 따르는 직업 군대로 변모하면서부터 그 몰락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케사르가 군대를 직업 군인으로 채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전성기가 이루어진 것 아니냐고요 ?  글쎄요.  로마 제국보다는 로마 공화정이 더 건전하고 더 위대했을 것 같습니다.)



당장은 더 훈련이 잘되어 있고 더 전문적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모병제가 더 효율적이고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병제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 중산층과 군대의 사이를 벌어지게 합니다.  중산층 출신 자제 중에서 군대로 가는 비율은 매우, 매우 적은 것이 정상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점은 그 사회의 정치 안정성을 크게 떨어지게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일 같지는 않거든요.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은 나라에서는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통에 의한 쿠데타나 전땅크에 의한 쿠데타가 그리 오랜 옛날 이야기가 아닌 사회, 그리고 광주사태가 아직도 북괴의 공작에 의한 무장 반란 사건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벌여질 정도로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모병제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처럼 사회 지도자 계층에서 군대 제대로 마치고 온 아들 찾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은  정말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거 보면 진짜 우리나라에는 보수는 거의 없어요.  그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욕심꾸러기들을 사회 지도층으로 모시고 사는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 젊은이들이 뛰쳐나오는 것이 문제라고요 ?  아닙니다.  그들이 뛰쳐나오도록 만든 사회 지도층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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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딱 1월까지만 레미제라블 놀이 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레미제라블 포스팅입니다.  나폴레옹의 제3차 대불 동맹 전쟁은 구정 즈음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여기까지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아래 추천 눌러 주시면 감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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