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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하편)

by nasica-old 201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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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3월 30일 덴마크 해군의 강력한 방어 준비를 살펴본 영국 함대 수뇌부들이 그날밤 모여 어떻게 공격을 펼쳐 나갈지 회의를 시작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넬슨이 어떤 묘책을 내놓았냐고요 ?  넬슨은 원래 지장이라기보다는 용장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습니다.  나일강 전투에서도 프랑스 전함들과 해안선 사이로 파고 들었던 묘책은 사실 넬슨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선두함 골리앗 호의 함장이던 폴리(Thomas Foley)의 즉흥적인 대응이었습니다.  (넬슨의 불꽃놀이 - 아부키르 해전 (하편)  참조)  넬슨의 전략이야 항상 "Never mind manoeuvres, go straight at 'em."  (함대 기동 같은 건 신경쓰지 말게.  그냥 돌격 앞으로.) 였으니까요.




(넬슨의 오른쪽 눈은 1793년 코르시카 섬에서의 상륙 작전 때 모래주머니에 적의 포탄이 맞아 돌과 모래가 튈 때 다친 것입니다.  안구 자체가 뽑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어서 해적 선장처럼 검은 안대를 하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날 밤 작전 회의에서 넬슨은 정말 할 말도 많았고 진땀도 많이 흘려야 했습니다.  파커 사령관 이하 다른 장교들 모두가 이런저런 난관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꾸 공격을 늦추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넬슨은 항상 '그딴 것 신경쓰지 말고 당장 공격'이라는 입장이었지요.  가령 이런 식이었습니다.

  덴마크 해군의 방비가 생각 외로 튼실하다, 좀더 신중하게 공격 준비를 하자
   --> (넬슨) 더 기다리면 적의 방어가 더 견고해진다 당장 공격하자

  우리가 코펜하겐을 공격하는 동안 러시아 해군이나 스웨덴 해군이 배후를 기습하면 어떻게 하나, 먼저 그쪽 방면을 정찰하자
   --> (넬슨) 그러니까 그들이 합세하기 전에 먼저 덴마크부터 서둘러 쳐야 한다  당장 공격하자

  우리는 코펜하겐 앞바다의 물길도 잘 모른다, 잘못 들어가다가는 좌초 위험이 있다, 먼저 수로 안내인(pilot)부터 구하자
   --> (넬슨) 백날 기다린다고 덴마크 수로 안내인이 우리 쪽으로 투항하겠느냐 당장 공격하자

결국 이날 회의의 승리자는 넬슨이었습니다.  파커 제독은 넬슨에게 원하는 대로 전함들을 내주고 작전도 원하는 대로 혼자서 짜도록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파커는 스스로 바지저고리 노릇을 자청했고, 넬슨이 사실상 진짜 대장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요.  어떻게 보면 넬슨의 어거지스러운 고집에 파커가 지쳐서 '그래 네 멋대로 해봐라' 하고 지휘권을 내동댕이친 것처럼도 보입니다만, 나중에 드러나듯이 그건 아니었고 다만 자신은 그저 연공서열에 따라 명목상의 지휘관이 된 것 뿐이고, 이 원정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넬슨이라는 해군성의 의중을 파커가 잘 읽고 너그럽게 행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무협지에서도 문파의 실제 권력은 그 문파의 젊은 수제자가 쥐고 있고 장문인은 그저 위엄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법이지요.




(뱃전이나 보트에서 이렇게 측연라는 납덩어리 (lead)를 던져 수심을 재는 것은 정말 고단하고도 축축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공격의 총책임을 맡은 넬슨은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격군에게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거든요.  특히 코펜하겐 앞바다의 물길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은 정말 당면한 과제였고 이건 빨리 공격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 다음날인 3월 31일에 당장 공격하지는 않았고, 3월 31일 밤에 자신의 기함이었던 세인트 조지 호(HMS St. George)의 함장 하디 (Thomas Hardy)를 작은 보트에 태워 보내 코펜하겐 앞 접근 수로의 깊이를 직접 측정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수심 측정 방법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가 연봉 킹이었을까 ? 편 참조)  함장이 이렇게 물길 깊이를 직접 잰다는 것은 이 일의 중대함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틈타 덴마크 해군의 방어진 바로 지척까지 접근할 수 있었던 하디는 이날 밤새도록 영국 함대가 접근할 해로의 수심을 측정했습니다만, 바다는 넓고 노젓는 배로 하룻밤에 잴 수 있는 해역의 넓이는 제한적인지라,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중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날 수심 측정하느라 죽을 고생을 한 하디가 훗날 제독이 된 모습입니다.  하디는 젊은 사관 시절 넬슨과 함께 프리깃함 미네르바 (Minerve) 호를 타고 지중해를 항해하다, 스페인 전함 2척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원 하나가 그 와중에 바다에 떨어졌고, 젊은 하디 중위는 그를 건지려고 보트를 타고 내립니다.  그 보트를 기다리다 스페인 전함에게 미네르바 호까지 나포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미네르바 호의 함장 콕번(Cockburn)은 하디가 탄 보트를 포기하고 돛을 올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넬슨이 아무리 제독이라도 함장의 명령이 우선이라는 해군 전통을 무시하고 '이런 젠장, 하디를 잃을 수는 없어 !'라고 외치며 돛을 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정작 이렇게 되자 스페인 전함들은 저 프리깃함이 왜 저렇게 자신만만할까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리는 사이에 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넬슨도 3월 31일과 4월 1일 2일 동안 놀고 있던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외레순 해협을 통과하기도 전에 자신의 기함을 98문짜리 3층 갑판의 2급함 세인트 조지 호(HMS St. George)로부터 74문 2층 갑판의 3급함 엘레펀트(HMS Elephant)로 바꾼 상태였습니다.  아무래도 3급함에 비해 2급함은 좁은 해로에서 움직이기엔 너무 느리고 둔중했고, 무엇보다 배수량이 너무 커서 얕은 해안가에서는 좌초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2일 동안 공격 작전을 세우느라 바빴는데, 그의 작전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주 넬슨스러운 것이었지요.

1. 공격에는 참여하는 전열함은 74문 이하급 12척으로 제한한다. 

어차피 98문 짜리 2척 (HMS St. George, HMS London)은 위에서 말한 이유로 좌초의 위험성이 있었고, 또 해안가에 늘어선 덴마크 해군이 고작 전열함 11척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 많은 전열함을 끌고 들어가봐야 비좁아서 전개할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코펜하겐 항구 내에는 돛대와 삭구를 갖추고 출항 준비가 완료된 전열함 4척을 비롯하여 소형 군함들이 좀더 남아 있었으므로, 이들이 만약 기어나올 경우 이들을 막아설 예비 함대가 필요했습니다.  넬슨은 파커 제독에게 98문짜리 두척을 포함한 총 8척의 전열함을 가지고 예비대로서 이들을 견제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당시 해군에서는 74문의 3급함이 가장 적절한 표준 전함으로 인정받앗습니다.  120문짜리 1급함은 너무 크고 둔중하여 별로 쓸모가 없다고들 했지요.  이 그림은 당시 파커 제독의 기함이었던 98문짜리 2급함 HMS London이 74문짜리 프랑스 3급 전함 Scipion에게 기동성에서 제압을 당해 그만 무방비 상태의 고물을 노출시키는 바람에 종사(rake)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이건 1782년 미국 독립 전쟁때 키리브 해에서 있었던 전투의 모습이고,  왼쪽에 고물을 노출한 큰 전함이 HMS London 입니다.  물론 이건 프랑스 측에서 그려서 프랑스 박물관에 걸린 그림입니다.)



2. 잔재주는 필요없다 화력으로 제압한다.

덴마크 전열함들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남북으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당시 바람이 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었으므로, 넬슨은 함대를 한줄로 길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항진시켜 나가면서 선두함이 가장 먼저 만나는 덴마크 군함, 즉 가장 남쪽의 군함 옆에 닻을 내리고, 또 2번함이 그 다음 적함 옆에 닻을 내리고... 하는 식으로 거의 1대1로 맡아서 정적인 포격전으로 적함을 두들겨 패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좁은 해안가에서 달리 뭐 뾰족한 수가 없었고, 또 1대1 싸움이면 아무래도 어중이떠중이 군함들과 미숙련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덴마크 함대에 비해 영국 함대가 더 유리했거든요.




(덴마크 측 군함들은 총 18척이었지만 그중 7척만 전열함이었고 11척은 위 그림과 같은 슬룹이나 브릭 등의 작은 선박들이었습니다.  대포의 크기는 고사하고 그 수자만 세어봐도 영국 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3. 소형 군함을 적극 활용한다.

원래 전열함들끼리 포격전을 벌일 때는 프리깃함이나 슬룹(sloop), 브릭(brig) 같은 꼬마 군함들은 아예 참전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정상적인 전열함끼리의 포격전도 아니었고, 또 이런 작은 군함들은 좌초의 위험에 조마조마해할 필요없이 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넬슨은 이들 꼬마 군함들을 적극 활용하기로 합니다.  이들을 전열함들끼리의 포격전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었으므로, 덴마크 전열함들의 양쪽 끝단인 남북쪽 양끝에 나누어, 남쪽에서는 프리깃 데지레(HMS Desiree) 호와 브릭함들이 덴마크 전열함 선수 부분에 붙어서 종사(rake)를 해대기로 했고, 북쪽에서는 역시 프리깃 아마존(HMS Amazon) 호를 선두로 한 프리깃들이 덴마크 전열함들의 선미 부분에 붙어서 종사를 퍼붓기로 했습니다.  즉, 이론상으로는 전면에서는 전열함이, 그리고 좌우 양쪽에서는 프리깃함들이 쌈싸먹듯 3면을 포위하고 십자 포화를 퍼붓는 모양새였지요.  뿐만 아니라, 코펜하겐을 폭격하기 위해 끌고온 박격포함 (bomb ketch) 7척도 가담시켰습니다.   이들의 포는 직사포가 아니라 폭발탄(bomb)이 하늘 높이 솟았다 떨어지는 박격포였으므로, 영국 전열함 뒤에 늘어서서 영국 군함들의 돛대 위로 덴마크 전함들에게 폭발탄을 던지도록 했습니다.




(전형적인 bomb ketch의 모습입니다.  대구경 박격포의 반동을 받아내자면 박격포를 용골에 정렬하여 배치해야 했고, 그러자니 박격포의 위치에 밀려 2개의 돛대는 다소 뒤쪽으로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bomb ketch는 항행성이 아주 병맛이었다고 합니다.)



4. 남쪽을 먼저, 북쪽은 나중에

당시 풍향은 주로 남풍이었으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쉬웠으나 반대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영국 함대는 먼저 덴마크 전열의 남쪽을 집중적으로 두들기고, 북쪽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북쪽에는 트레크로너 (Trekroner) 요새가 있어서, 아무래도 남쪽보다는 방어가 더 견고한 편이었으므로 더욱 그래야 했습니다.  트레크로너 요새에는 총 68문의 대포가 있었고, 아무래도 육상에 위치한 대포가 훨씬 안정적이었으므로 이는 68문의 대포를 갖춘 전열함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요새의 위치는 저 아래 지도에서처럼 덴마크 전열함 방어선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넬슨은 굳이 불리한 위치에서 이 요새와 툭탁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요새와의 포격전은 일단 회피하고, 먼저 덴마크 전열함들부터 잠재운 뒤, 나중에 육상 부대를 상륙시켜 이 포대를 보병으로 점령할 생각이었습니다.  만약에 덴마크군의 저항이 심하여 전면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최소한 남쪽의 전열을 궤멸시켜 놓는다면, 그쪽 해안으로 박격포함들을 바짝 붙여 놓고 코펜하겐 시내에 폭탄을 쏘아넣을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남쪽에서만은 완승을 거둬야 했습니다.




(그 작전 계획의 결과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오른쪽 뒤편이 코펜하겐 시내이고, 그 앞을 한줄로 가로 막아선 덴마크 군함들, 그리고 그 앞에 역시 한줄로 늘어선 영국 전함들이 보입니다.  왼쪽 아래쪽에 무질서하게 늘어선 배들이 바로 bomb ketch 들입니다.)



이렇게 작전을 짜고, 또 하나하나의 군함마다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세세한 명령서를 작성하는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넬슨은 4월 1일밤 늦게까지, 정확하게는 전투 당일인 4월 2일 새벽 1시까지 서기들에게 둘러싸인 채 명령을 구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넬슨보다 더 불쌍한 것은, 새벽 1시 넘어 넬슨이 일을 마치고 자러 간 뒤, 그 명령서를 다시 일일이 손으로 깔끔히 베껴써서 제대로 된 명령서를 만들어야 했던 서기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행정병이 과연 좋은 보직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경험자들이 고개를 젓고 있지요....  당시의 표준 필기구인 잉크와 깃털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워드 프로세서 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서기들의 밤샘 작업 덕분에 전체 함대의 함장들은 전투 당일인 4월 2일 아침 8시까지는 모두 넬슨의 명령서를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람도 넬슨의 기대에 맟주어 적절한 남품이 불어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9시 반에 전투 함대에는 닻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원래 넬슨의 함대는 코펜하겐 및 그 앞을 가려주는 아마거(Amager) 섬 앞 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넬슨의 함대와 덴마크 방어선과의 사이에는 영국인들이 Middle Ground라고 부르던 큼지막한 모래톱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넬슨의 함대는 먼저 역풍인 남풍을 거슬러 차례로 이 모래톱의 남쪽을 돌아나온 뒤 다시 남풍을 타고 북쪽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래톱을 사이에 두고 크게 U턴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 함대는 대략 저 노란 화살표 모양으로 U턴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바람이 남남동풍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역풍을 거슬러 남진한 뒤 다시 순풍을 타고 북진해야 했지요.  문제는 저 U턴의 가운데 부분이 Middle Ground라는 얕은 모래톱이었다는 점이지요.)



먼저, 64문의 아가멤논 호 (HMS Agamemnon)는 그 전날 닻을 내린 위치가 미들 그라운드라는 모래톱에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던데다 역풍을 그다지 잘 타는 배가 아니었는지, 이 U턴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고 다시 닻을 내려버리고 맙니다.   아가멤논 호의 함장이었던 프랭코트(Robert Devereux Fancourt)는 여기서 무리해서 기동을 하다가는 남동풍에 밀려 모래톱에 좌초되어 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한척한척 덴마크 군함들 앞에 닻을 내린 영국 전함들의 우측으로 빙 돌아 자기 자리를 찾으려던 영국 전함 두척 (HMS Bellona, HMS Russell)이 결국 (다른 많은 함장들의 우려대로) 모래톱에 좌초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총 12척의 전열함 중 무려 3척이 좌초 또는 좌초 위험 때문에 전열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전체 전력의 1/4에 해당하는 수자였습니다.



(아가멤논이 U턴을 포기하고 주저앉은 모습과, 벨로나 및 러셀이 좌초해버린 모습을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



이 외에도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영국 함대의 선두는 10년전 이 코펜하겐 앞바다의 수심을 측정했던 경력이 있는 머레이(George Murray) 함장이 지휘하는 에드가 호(HMS Edgar)가 맡았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에드가 호는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함, 즉 가장 남쪽에 위치한 Prøvesteenen 호 옆에 닻을 내려야 했는데, 무려 4척의 적함과 포격을 주고 받으면서 그대로 지나쳐 5번째 적함인 Jylland 호 옆에 닻을 내렸던 것입니다. 




(당시 머레이 함장의 행동이 비난을 받거나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 그렇게 적 5번함과 상대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전투가 끝난 뒤 집계된 머레이 함장의 에드가 호의 인명 피해는 총 135명이었습니다.  전체 인원의 약 25%에 달하는 심각한 피해였습니다.  어이없게도 당시에는 휘하 수병들의 사상률이 높을 수록 그 함장이 용기있게 싸웠다는 반증으로 인정되었으므로, 머레이 함장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때문인지 영국 전열함들의 배치가 다소 뒤죽박죽이 되었고, 맨 마지막 전함이자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디파이언스 호(HMS Defiance)는 원래 의도와는 달리 트레크로너 요새 앞에서 60문짜리 Holsteen 호와 64문짜리 Indfødsretten 호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원래는 남쪽에 전력을 집중시켜 적은 수의 적을 많은 수의 아군으로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이쪽의 전함 1척이 무려 2척의 전함과 1채의 요새를 상대로 불리한 싸움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아마존 호(HMS Amazon)을 비롯한 프리깃함들도 적절한 위치를 찾아 종사(rake)를 퍼붓기 보다는 디파이언스 호와 나란히 포진하여 트레크로너 요새와 포격전을 벌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나크 호 (HMS Monarch)도 디파이언스 바로 남쪽에 닻을 내리고 Holsteen 호 및 그 남쪽의 수상 포대들과 포격전을 벌였습니다.




(트레크로너 해상 요새의 구조도입니다.)




(인어공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트레크로너 요새를 돌파해야 합니다.  크레크로너 요새를 찾아 BoA요.  인어공주 상 바로 왼쪽의 별 모양이 바로 프레드릭 왕세자가 성벽에 올라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코펜하겐 성채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이 넬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저같으면 일단 '그러게 내 뭐랬어, 너무 성급하게 들어가면 저 꼴 난댔쟎아' 라며 뒤에서 빈정거릴 함장들이나 파커 제독의 문책 때문에라도 의기소침해할 것 같습니다만, 넬슨은 확실히 좀 남다른 데가 있었나 봅니다.  그는 원래 계획 그대로 그냥 그대로 밀어 붙입니다.  자신이 탄 74문 전열함 엘리펀트 호를 적의 기함인 다네브로(Dannebrog) 호 옆에 정박시킨 넬슨은 아주 넬슨스럽고 의연하게 맹렬한 포격전에 들어갑니다.

포격전은 약 10시부터 시작되었고, 디파이언스 호가 트레크로너 요새 앞에 닻을 내린 11시 30분에 본격적인 풀 스윙에 들어갑니다.  전투 개시 이후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 경에도 양측의 포격은 전혀 누그러질 태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양측 라인의 거리는 약 200~300 미터 정도로서, 매우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쏘아붙이는 대포알들은 별로 빗나가지도 않고 참혹한 피바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타야 하는 당시 해전은 참으로 묘한 것이라서, 바로 지척 북동쪽 바다에 있던 잔여 영국 함대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코펜하겐 항구 내에 정박해 있던 잔여 덴마크 함대는 바람의 방향 때문에 이 전투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이 생지옥을 바라봐야 했던 파커 제독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특히 전투 현장이 자욱한 포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답답했는데, 상황이 넬슨에게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하기도 전에 전체 전력의 1/4이 모래톱 위에 주저 앉아 버렸고, 또 포격 시작 3시간 이후에도 이렇게 포격이 거세다는 것은 확실히 영국 함대에게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숙한 덴마크 해군은 영국 해군의 능숙한 포격에 진작 넉아웃되어 지금쯤은 항복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아 망했어요 !  좌초에요 좌초 !)



영국 해군의 기대와는 달리 덴마크 해군이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덴마크 해군의 포병들은 상당수가 대포를 제대로 쏘아본 적이 없는 자원병에 불과했으나, 바로 등 뒤에 자기 가족이 사는 집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가족들에게 대포알이 날아간다는 절박함과, 또 섭정인 프레드릭 (Frederik) 왕세자가 바로 코펜하겐 성벽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긍지로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그런 정신적인 측면 외에도, 영국군의 포격에 나가 떨어진 사상자들은 즉각 해변에서 보트로 실어오는 추가 병력으로 교체될 수 있었다는 실질적인 측면도 강했습니다.  심지어는 군함의 함장도 부상을 입자 육지에서 다른 함장을 불러와 교체시킬 정도였습니다. 




(훗날 프레드릭 4세가 되는 프레드릭 왕세자의 모습입니다.  제가 아는 덴마크 사람 거의 없긴 하지만, 왠지 정말 덴마크 사람처럼 보여요.)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강철같은 신경과는 거리가 좀 멀었던 노신사 파커 제독은 아군 함대의 피해가 극심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런던 호의 함장인 도멧(William Domett) 및 제독 보좌관 (flag captain) 오트웨이(Robert Otway) 함장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초조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한창 전투 중인데 맥빠지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제대로) 판단한 오트웨이 함장은 파커에게 '그러지 마시고 제가 보트를 타고 넬슨의 기함인 엘리펀트 호에 직접 가서 전황이 불리하다면 후퇴해도 좋다라고 구두로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사정했습니다.  파커는 그를 승낙했으나,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미처 오트웨이 함장이 엘리펀트 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투 중지'를 알리는 깃발을 기어코 올리고 맙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가던 오트웨이가 이 깃발을 보고 '에이 ㅆㅂ 저 영감탱이하고는 정말 못해먹겠네' 하고 욕을 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코펜하겐 전투에서 전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좌초된 벨로나 호와 러셀 호가 맨 오른쪽에 보입니다.)



하지만 파커 제독이 이 전투 중지 깃발을 올린 것은 나름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넬슨의 성격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고, 만약 싸울만 하다면 넬슨이 자신의 신호 깃발을 무시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깃발을 올리면서 주변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현장 상황이 괜찮다면, 넬슨은 내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싸울 거야.  반대로 상황이 안좋다면 넬슨은 내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것이 되니까, 후퇴의 불명예를 뒤집어 쓸 일은 없게 되는거지."  실제로 넬슨은 전투가 길어지자 '파커 이 양반이 애간장이 타겠군' 하면서 이런 신호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해서 이 신호가 올라오자, 부하들에게 '아군 기함 말고 적군 기함에나 신경을 쓰라'고 핀잔을 주며 애써 제독의 신호를 무시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일화가 나옵니다.  넬슨은 나일강 전투부터 함께 했던 폴리 (Thomas Foley) 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난 눈이 하나 밖에 없다네.  내겐 가끔 완전히 장님이 될 권리가 있다구."  그러면서 그는 정말 그의 보이지 않는 눈에 망원경을 대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신호가 정말 안 보이는데 !"

이 상황은 넬슨 함대의 2인자인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제독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장 불리한 상황에 있던 디파이언스 호에 타고 있었는데, 그는 넬슨처럼 파커의 신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고, 그저 '신호를 받았다' (acknowledge)는 신호 깃발만을 올렸고, 원래 올려야 하는 반복 신호 깃발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즉, '제독의 의사는 알겠는데 복종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지요. 




(당시 상황을 묘사한 다른 지도입니다.)



파커 제독과 넬슨은 이렇게 쿵짝이 잘 맞았지만, 파커 제독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넬슨이나 그레이브스는 파커 제독과 나름대로의 교감을 가지고 있는 제독이었지만, 초급 함장들은 파커 제독의 명령을 감히 거부하기가 너무 거북했던 것입니다.  특히 가장 북쪽에 위치해있어서 파커 제독의 신호가 아주 잘 보였던 아마존 호의 리우(Edward Riou) 함장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자신이 지휘하는 몇척의 프리깃함들에게 파커 제독의 퇴각 신호를 반복 게양합니다.  당시 아마존 호 함상에 있었던 육군 제48연대의 스튜어트 (William Stuart)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도 리우 함장은 '넬슨 제독이 뭐라고 생각할까' 하며 무척이나 괴로와했다고 합니다.  특히 트레크로너 요새의 치열한 포격에 노출된 상태에서 배를 돌리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선회하는 순간 고물 쪽을 그대로 노출시켜 종사(rake)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니나다를까,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하던 아마존호는 적의 종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리우 함장 자신도 적의 포격에 두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리우 함장은 이날 30대 후반의 젊은 모습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지요.)



하지만 오후 2시 즈음이 되자, 마침내 덴마크 측의 포화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화력면에서, 또 숙련도 면에서 영국 해군이 월등했던지라, 투지만으로는 더 버티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덴마크 측에서는 프리깃함들인 니보르(Nyborg) 호와 아게르슈 (? Aggershuus) 호가 결국 격침되었고, 다른 군함들도 크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덴마크 방어 함대의 총지휘관은 제독이 아니라 임시 제독 (Commodore)에 불과한 피셔 (Olfert Fischer) 함장이었는데, 피셔도 최초의 기함이었던 다네브로(Dannebrog) 호에서 홀스틴(Holsteen) 호로, 이어서 다시 트레크로너 요새로 기함을 옮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덴마크 함정들의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2시 30분까지도 덴마크 군은 간헐적으로나마 여전히 포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 순간까지는 깃발을 내려 항복한 덴마크 군함은 아직 Infødsretten (대체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호 1척 뿐이었습니다. 


넬슨 입장에서는 상황이 무척이나 난감했습니다.  대충 포격이 그쳐가고는 있었으나, 이 덴마크인들이 대체 항복을 하겠다는 것인지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것인지 명확한 표시가 없으니 상황 판단이 되질 않았습니다.  최소한 적함 1척은 항복했으니, 이제 그 군함을 나포하기 위해 보트에 나포 승선대(prize crew)를 실어 보내야 했는데, 적함들이 빽빽히 들어찬 해안에서 아직 간헐적으로 포격이 날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 배들은 애초에 전투 개시할 때부터 돛대와 삭구를 다 제거한 상태여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나포 승선대가 그 배에 오른다고 해도 어떻게 그 배를 빼내 올 수가 있겠습니까 ?  뿐만 아니었습니다.  영국 전함들도 피해가 막심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트레크로너 요새는 아직도 별 피해를 입지 않고 맹렬히 포격을 가해왔으므로, 그쪽에 위치했던 디파이언스 호와 모나크 호는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분전하는 모습입니다.  뭐니뭐니해도 바이킹의 직속 후예인걸요.)



여기서 넬슨은 훗날까지 계속 논쟁거리가 되는 편지 하나를 급히 휘갈겨 씁니다.  수신자는 바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섭정인 프레드릭 왕세자였습니다.  '영국인들의 형제인 덴마크인들에게'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그 편지의 내용은 한마디로 항복하라, 아니면 남은 선박을 다 불태워 포로고 뭐고 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영국인의 형제인 용감한 덴마크인들을 살리고 싶은데 너희들이 계속 포격을 해대면 어쩔 도리가 없다라는 식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지요.  그러나 실상은 넬슨의 함대도 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정말 덴마크 왕세자에게 전달되었고, 오후 3시경 왕세자도 휴전을 뜻하는 백기를 든 부관 린트홀름(Hans Lindholm)을 보내 '대체 의도가 뭐냐 ?' 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이 휴전이 넬슨의 함대를 위기에서 구합니다.  넬슨은 기꺼운 마음으로 린트홀름을 맞아들여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서 넬슨은 2번째 편지를 왕세자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의도는 인도주의에 따라 덴마크 수병들의 목숨을 구하려 하는 것 뿐이며, 덴마크 측은 덴마크 군함들로부터 부상자들을 데려가도 좋다, 대신 부상을 입지 않은 덴마크 수병들은 영국이 포로로서 영국 군함에 옮겨 실은 뒤 덴마크 군함들을 불사르거나 나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만약 덴마크 국왕께서 영국과 화평을 맺으신다면 그를 자신의 가장 큰 승리로 받아들이겠다고 겸손하게 의사 표명을 했습니다.  이 편지는 곧장 코페하겐 성채의 왕세자에게 보내졌고, 린트홀름은 그대로 파커 제독의 기함 런던 호로 보내져 좀더 협의를 한 뒤, 일단 24시간의 휴전에 양측이 동의하게 됩니다.




(아마 당시 왕세자의 눈에 들어왔을, 코펜하겐 시내에서 본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포연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아무튼 왕세자를 포함한 코펜하겐 시민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가득찬 넬슨의 편지가 훗날 논란을 낳은 것은 넬슨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덴마크 수병들을 배와 함께 불태워 버리겠다고 허풍을 쳤다고 덴마크 측 총사령관 피셔 함장이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셔의 주장에 따르면 이날 넬슨이 허풍으로 가득찬 편지로 왕세자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패배하여 물러난 쪽은 영국 해군이었을 거라는 것이었지요.  사실 총사령관은 왕세자가 아닌 바로 피셔 함장이었는데, 피셔는 이 휴전에 전혀 관여를 못했다는 점이 절차상 문제가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 피셔는 트레크로너 요새에서, 이미 반파 상태였던 모나크 호와 디파이언스 호를 신나게 맹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른 덴마크 군함들도 더 이상 저항을 못할 정도로 완파 당한 상태이긴 했습니다만, 적어도 총사령관 피셔에게는 항복할 의사도, 이유도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넬슨조차도 (비록 좀더 뒤의 일이긴 했지만) 이날의 전투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영국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고 인정하기는 했습니다.




(당시 덴마크 해군의 현장 총지휘관이었던 피셔 함장입니다.)

  

피셔의 주장도 꽤 일리가 있었던 것이, 전투가 일단 종료되고나자, 영국군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가 드러났습니다.  물론 덴마크군의 피해도 컸지요. 특히 덴마크 함대의 기함인 다네브로(Dannebrog)는 전투 중에 이미 화재가 발생했었는데, 휴전이 시작된 이후인 오후 4시 반 경에 마침내 폭발을 일으켜 아직 대피하지 못했던 250명의 수병들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250명을 포함하여 덴마크 측의 인명 피해는 총 790명 전사에 910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아무튼 1천7백명의 사상자도 적은 편이 아니었지요.  이에 비해 영국 함대는 253명 전사에 688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총 941명의 사상자라는 수자는 덴마크 측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영국측이 애초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는 더 많은 수자였습니다.  게다가 트레크로너 요새에게 두들겨 맞던 모나크 호와 디파이언스 호, 그리고 넬슨의 기함인 엘레펀트 호까지 총 3척이 비틀거리며 철수하다가 결국 모래톱에 좌초하고 맙니다.  이들은 다른 전함들이 낑낑대며 끌어주었음에도 결국 다시 물에 뜰 수 있었던 것이 한밤중이 되어서였으므로, 만약 휴전을 맺지 않았다면 영국군의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국 함대가 나포한 적함은 총 12척이었으나 실제로 나포할 가치가 있을 정도였던 덴마크 군함은 겨우 Holsteen 호 1척 뿐이었으므로 영국 함대의 전과는 상당히 실속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4월 3일, 넬슨은 (파커의 위임 하에) 영국 대표로 코펜하겐에 상륙하여 휴전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항구에 내린 넬슨에게 덴마크는 궁성까지 마차를 제공하려 했지만, 넬슨은 몰려든 군중 사이를 걸어가기를 택합니다.  이때 전쟁 전까지만 해도 영국과 덴마크는 사실 사이가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일강 전투의 영웅인 넬슨은 이미 덴마크에서도 유명 인물인지라 코펜하겐 시민들은 (사진도 없던 시대였으므로) 넬슨의 모습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코펜하겐 시민들이 넬슨을 보고 '넬슨 만세 (Viva Nelson) !'를 외치며 환호했다고 합니다만, 덴마크 측 기록에는 시민들이 그저 '경외심을 가진 침묵'으로 넬슨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덴마크 측 기록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코펜하겐 부두에 상륙하는 넬슨)



하지만 휴전 협상은 그다지 잘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넬슨의 승리가 그다지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지요.  덴마크 측은 자유 통상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했고, 결국 넬슨은 덴마크 측에게서 프랑스와의 교역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지 못하고 그저 14주간의 휴전만을 얻어냅니다.  그와 동시에, 넬슨은 영국 함대가 그 휴전 기간 동안 코펜하겐 항구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권리도 얻어냅니다.  대신 덴마크 포로들을 가석방 조건으로 풀어주었지요.  넬슨이 이렇게 3달간의 휴전과 코펜하겐 항구에 대한 자유 이용권만을 얻어낸 것에 만족했던 것은 바로 러시아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된 함대를 코펜하겐 항구 시설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수리한 뒤, 덴마크와의 휴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러시아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어차피 덴마크는 러시아라는 배경을 믿고 감히 영국에게 저항한 것이므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덴마크의 굴복도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아버지를 암살한 것으로 의심받던 알렉산드르 1세는 나중에 1813년 쿨름(Kulm) 전투에서 사로잡힌 프랑스의 방담(Dominique Vandamme) 장군에게 '약탈자에 무법자'라고 욕을 했다가 방담 장군으로부터 '최소한 난 지 애비를 죽인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라고 정면에서 디스를 당하는 모욕을 당합니다.)



하지만 넬슨의 신나는 모험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넬슨은 몰랐으나, 반영국 정책을 펴던 러시아의 짜르 파벨 1세가 3월 24일 이미 암살당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상드르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대세입니다.  당연히 이 못된 아들 짜르는 그 아버지가 아무 실속없이 말타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작했던 이 무장 중립 동맹에서 발을 뺄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 암살 및 새로운 짜르의 소식은 4월 하순 경에는 이미 코펜하겐에까지 전해졌지만, 이 암살 소식은 당분간 비밀로 지켜져 코펜하겐 앞바다에 정박한 영국 함대나 영국 본토에는 그 소식이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파커 제독은 4월 12일 스웨덴의 군항인 칼스크로나(Karlskrona) 앞바다로 출동하여, 스웨덴 함대를 위협하고 바다로 출항할 생각을 버리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파커 제독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넬슨의 함대가 수리를 끝낸 이후에도 스웨덴이 후방을 노리면 어쩌나 하는 뻔한 핑계를 대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러시아를 쳐야 한다고 생각하던 넬슨은 애가 탔습니다.  그런데 5월 5일, 영국 해군성도 넬슨과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파커 제독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넬슨을 총사령관으로 대체하는 명령서를 보내왔습니다.  이때 넬슨이 받은 명령은 러시아 함대와 스웨덴 함대가 합류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스웨덴 측에 편지를 보내 '바다에서 스웨덴 함대를 만나면 즉각 격침시켜버리겠다'는 협박장을 보내고, 아울러 6척의 전열함을 떼어 칼스크로나의 스웨덴 함대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협박은 잘 먹혀, 스웨덴 함대는 칼스크로나 밖으로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 지도에 A자로 표시된 것이 바로 칼스크로나입니다.)




(참고삼아 위성사진을 확대해보니, 현대의 칼스크로나 항구 조선소에서 뭔가 건조 중인데, 잠수함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뭔가 프리깃함 같은 것도 있네요.)



동시에 넬슨은 남은 11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즉각 러시아의 군항 레발(Reval, 현재의 탈린 Tallinn)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5월 14일 레발에 도착해보니, 우려하던대로 이미 얼음이 녹아 러시아 함대는 핀란드만 깊숙히 위치한 러시아의 군항 크론스타드(Kronstad)로 도주한 뒤였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넬슨은 파벨 1세의 암살 소식과 함께 무장 중립 동맹의 해체가 논의되고 있다는 다소 맥빠지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5월 17일 레발에서 철수했고, 1달 뒤 건강이 악화되어 소형 브릭함인 카이트 호(HMS Kite)를 타고 본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지도 위쪽의 헬싱키 바로 밑에 있는 탈린이 당시의 레발 항구입니다.)



결국 중립국의 자유 무역을 강대구이 해상 봉쇄로 막을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거창한 주제로 시작했던 이 원정은, 러시아의 짜르 암살이라는 음침한 사건에 의해 시시하게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실제로 덴마크는 영국 함대와의 14주간의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프랑스와의 무역을 재개했고, 이로부터 1년도 안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앵 조약을 맺고 근 10년 만에 드디어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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