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편에서 여러분은 나폴레옹이 드제의 죽음과 맞바꿔 마렝고의 승리를 얻어내는 것을 보셨습니다. 풍요로운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영토 200km를 이 전투 하나로 얻어낸 나폴레옹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자신의 승리를 100%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조약을 마무리하자마자, 7월 14일 이전에 통령 근위대가 반드시 파리로 귀환하도록 명령을 내려놓고 서둘러 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7월 14일은 11년 전인 1789년, 파리의 상퀼로뜨(서민)들이 바스티유 요새를 들이친 기념일로서, 매년 성대한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었거든요.
(19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성대히 치루어지는 바스티유 기념일입니다. 모네의 그림이지요.)
나폴레옹은 그 기념식에, 자신의 자랑스러운 근위대가 마렝고에서 빼앗아온 오스트리아군의 군기를 들고 행진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이는 나폴레옹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벼락 집권한 불안정한 위치의 통령에 불과했고, 그의 권력은 사실 총검으로부터라기 보다는 민중으로부터의 인기와 지지에 의지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가리켜 국민의 뜻에 의한 독재자라고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참으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이 러시아 만화는 '나폴레옹도 무찔렀다 ! 히틀러도 똑같이 무찌를 것이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2차 대전 당시의 포스터인가봐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잘 통치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 물론 이 세상은 동화가 아닌지라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가 겪어본 어떤 전투보다도 더 골치아프고 험악한 정치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앞뒤로 포위된 상태였는데, 앞쪽에서는 루이 18세 (Louis XVIII)의 복위를 바라는 왕당파의 압박이 있었고, 뒤쪽에서는 그의 독재 정치를 몹시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자코뱅(Jacobin) 파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실은 이건 테러와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일개 장군이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제1통령이라는 독재자가 되고나니,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입니다. 제조 중이던 폭탄이 발견되기도 하고, 10월에는 나폴레옹이 방문 예정이던 오페라 하우스에서 단검을 품고 대기 중이던 음모꾼들이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음모의 배후자가 누구냐 하는 점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이견이 분분했습니다. 나폴레옹 생각에는 이런 음모들은 자코뱅의 음모였습니다. 원래 자코뱅들은 공포 정치로 프랑스를 장악하고 있던 이들이니, 테러로 독재자를 제거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어울리는 방법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당시 파리에 나돌던 자코뱅의 불온 삐라 등에는 '수천명의 브르투스'를 운운하며 독재자를 처단하자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자코뱅들의 전성기는 공안위원회로 대표되는 공포 정치 시절이었지요. 여기서는 마라(Marat) 만세, 자코뱅당 만세 라고 씌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찰 책임자인 푸셰 (Joseph Fouche)는 오히려 반대쪽인 왕당파의 음모라는 분석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들어보면 맞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혁명 이후 10년 동안의 혼란과 무질서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고, 그 결과 나폴레옹의 독재를 순순히 받아들인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망명귀족들을 비롯한 왕당파들은 이런 분위기라면 왕정 복고도 가능하다고 보고, 왕정 복고를 위한 분위기를 살리는데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 중에는 나폴레옹의 와이프인 조세핀(Josephine de Beauharnais)과 의붓딸인 오르탕스(Hortense de Beauharnais)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다소 뜻밖같아 보이지만, 여자들의 허영심이란 자연스럽게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인간들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놀랄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거의 분명해진 조세핀은 특히나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미 나폴레옹에게 종신 통령이라든가 세습 통령직 이야기까지 나오는 판국이었거든요. 그럴 경우 그 뒤를 이을 아들이 반드시 필요해지는데, 자신처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이혼을 당할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지는 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해외 망명 중이던 루이 18세가 나폴레옹에게 친서를 보내 '프랑스를 위해 왕정 복고를 허용하라, 그리하면 보나파르트 장군을 프랑스의 큰 별로 만들어주겠다'고 할 정도의 분위기였습니다. 분위기가 그러했으므로, 혹시 나폴레옹이 죽기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부르봉 왕가의 복위가 이야기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정도면 왕당파가 폭탄 음모를 꾸밀만도 했지요.
(루이 18세는 결국 1814년이 되어서야 영국 화물선을 타고 프랑스로 돌아오지요. 이 그림과는 달리 매우 볼품없는 귀환이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왕당파와 자코뱅 양쪽 모두가 나폴레옹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것은 맞았습니다. 이런 테러 음모는 1800년 12월 24일, 파리에서 오페라 구경을 가던 나폴레옹의 마차를 노린 폭탄 마차 폭발 사건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나폴레옹의 마차는 폭탄이 폭발하기 직전 그 폭탄 마차를 지나친 바람에 간신히 화를 면했지요. 결국 이는 왕당파이자 방데 반란군인 슈앙(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참조)의 지도자, 카두달의 음모로 밝혀졌고, 카두달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다면 작은 소란이 나폴레옹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모로 장군의 추방과, 앙겐 공작(Louis Antoine de Bourbon, duc d'Enghien)의 납치 및 살해, 그리고 결국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이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앙겐 공작은 보시다시피 잘생긴 젊은이로서, 정치보다는 여자들 꼬시는데 더 관심이 많은 유쾌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의 애완견은 그가 죽은 뒤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스웨덴 왕실에 입양되었다고 하네요.)
앙겐 공작이라는 사람은 부르봉 왕가의 친척인 콩데 (Conde) 집안의 마지막 후계자로서, 사실 별 정치적 야망이 없는 순진무구한 젊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나폴레옹 부하들의 잘못된 수사로 인해, 실제로는 연관도 없는 카두달-피슈그뤼 음모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1804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법권 밖인 바덴(Baden) 지방에 살고 있던 그를 야밤에 납치하여 데려온 뒤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사형 언도를 내려 처형한 것이 '앙겐 공작 사법 살인 사건'의 전모였습니다. 이 사건은 유럽 각국의 귀족 사회에게 '나폴레옹은 상종 못할 막장'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낙인찍는 결과를 낳았고,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의 수뇌인 푸셰는 이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C'est pire qu'un crime, c'est une faute." - 이건 범죄보다 더 나쁜 대실수야 !
(앙겐 공작의 처형입니다. 이런 사법 살인은 독재 국가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꽤 많았지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모로 장군은 갑자기 여기서 왜 튀어나온 것일까요 ? 모로 장군은 브뤼메르 쿠데타 때도 나폴레옹과 협조했던 사람이쟎습니까 ? (혁명의 종말 - 브뤼메르 쿠데타 참조) 그가 왜 왕당파들의 나폴레옹 암살 음모에 관여한 것일까요 ?
실은 참여하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이 억지로 재판관들에게 압력을 넣어 모로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은 역겹게도, 원래 사형이어야 하는 모로의 죄를 국외 추방으로 감형시켜주는 아량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포장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대체 왜 모로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이 폭탄 테러를 당하기 직전인 1800년 12월 3일 벌어진 호헨린덴 (Hohenlinden) 전투 때문이었습니다.
(승전 때문에 결국 체포되었다고요 ? 왜 그랬을까요 ? 그림은 모로 인생 최고의 날, 호헨린덴 전투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잠깐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라는 사내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시지요.
1763년 생으로서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던 모로는 브리타니(Brittany) 지방의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호방하여 원래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잇도록 강제로 렌느(Rennes)의 법대에 보내 버렸지요. 모로의 법대 생활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성향의 동료 학생들을 꼬셔내 무리를 지어 술을 마시고 주먹을 쓰며 깽판을 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어쩌면 삥도 뜯었을지도 모르지요. 보통 이런 학생들은 교도소나 뒷골목, 빈민가에서 생을 마감하기 마련인데, 뜻밖에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가 학교를 다니던 렌느 지방에서도 서민들과 귀족 사회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곳곳에서 소란이 벌어졌는데, 이런 무정부 상태에서야말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모로는 그의 양아치 학생 폭력단을 이끌고 이런 분쟁을 다스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확실히 일진처럼 보이는 얼굴입니다.)
그러다 이 양아치 폭력단을 이끌고 그대로 입대, 자연스럽게 그 부대의 지휘관인 중령 계급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발미 전투의 영웅이자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는 두무리에 (Charles François Dumouriez) 장군 밑에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장군 계급까지 승진했고, 국방장관인 카르노(Carnot)의 눈에도 들어 사단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네덜란드 전선에서 그는 훗날 악연을 맺게 되는 피슈그뤼 장군(Charles Pichegru) 밑에서 복무합니다. 그는 1794년 프랑스 북부의 투르쿠안(Tourcoing) 전투에서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승리로 완전히 명성을 굳힌 그는 프랑스의 여러 군 중 가장 중요하다는 라인-모젤 (Rhine-et-Moselle) 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와의 주전선을 맡게 되었지요. 그의 군사적 능력은 여기서 발휘됩니다. 그는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을 여러차례 격파하여 라인강 너머로 여러번 진격했었고, 오스트리아의 젊은 군사 천재 카를 대공에게 패하여 후퇴할 때도 질서정연하게, 그것도 오스트리아군 포로를 무려 5천명이나 데리고 무사히 후퇴함으로써 더더욱 그의 진가를 증명했습니다.
(모로의 첫 승리, 투르쿠안 Tourcoing 전투입니다.)
그는 1797년에야 원정 준비를 마치고 다시 라인강을 도하하여 오스트리아 침공 길에 나섰지만, 이미 이때는 프랑스군의 에이스는 새로 떠오르는 별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제1차 대불동맹전쟁이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지요. 더군다나 그는 옛 상관인 피슈그뤼 장군이 망명 귀족들과 작당을 꾸미고 있다는 음모론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군에서 쫓겨나는 봉변까지 당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간 사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침공에 어쩔줄 몰라하던 프랑스 총재 정부가 1799년 다시 그에게 군대를 맡기면서 다시 지휘관으로 복귀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이탈리아 방면군 상황은 영 좋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복귀했을 때 그는 무보직으로 불만에 가득찬 상태로 파리에서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폴레옹이 유혹의 손길을 뻗쳐 쿠데타에 협조하게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쿠데타에 협조한 그에게 나폴레옹이 보답으로 준 것은 바로 그가 전에 맡았던 주력 전선인 라인 방면군 지휘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로가 바라던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마렝고 전투에서 빛나는 무훈을 세우고 있을 즈음인 1800년 6월 19일, 모로도 호슈타트(Höchstädt)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크레이(Pál Kray) 장군을 격파하여 이자르(Isar) 강까지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붙인 상태였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에 휴전이 맺어졌고, 모로는 만족한 상태로 파리에 돌아와 사교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조세핀의 딸인 오르탕스입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욕은 먹지 않는 미모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폴레옹은 조세핀의 아들 외젠 뿐만 아니라 오르탕스에게도 무척 좋은 아버지 노릇을 했습니다. 그는 오르탕스를 결국 자신의 동생 루이와 결혼시켰고, 그 세째 아들이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정적들은 나폴레옹이 오르탕스와 그녀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를 끔찍히 여기는 것을 보고 오르탕스와 나폴레옹이 근친상간을 하고 있다고 비방하기도 했습니다만, 적어도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래 본문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오르탕스와 모로가 결혼했다면 나폴레옹 3세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1870년 보불 전쟁의 치욕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때 그를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나폴레옹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은 자신의 의붓딸, 즉 조세핀의 전남편 소생인 오르탕스와 모로를 결혼시키고자 했으나, 모로는 그를 거절하고 마드모아젤 윌로(Hullot)라는 크레올 출신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즉, 조세핀과는 동향 출신의 여자와 결혼한 것이지요. 하지만 조세핀과 이 여자가 친했느냐하면 정반대였고, 그 윌로라는 여자의 집안은 조세핀의 집안을 원래부터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 윌로라는 모로의 아내는 매우 야심만만한 여자로서, 남편을 완전히 손아귀에 장악하고 모로의 모든 사교 활동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왕년 일진 출신이자 프랑스의 맹장인 모로도 와이프 앞에서는 한낱 고양이 신세였던 것이지요. 당시 사교계는 유명 인사의 집 거실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과나 식사를 즐기며 잡담을 하는 주였는데, 윌로가 베푸는 이런 연회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명단이 또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모로는 철없는 일진 학생 시절부터 공화국이라는 대의명분에 심취한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자코뱅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가 이 시절 파리에서 지내던 집에는 오쥬로나 브륀, 르쿠르브 등의 자코뱅파 장군들이 들락거렸고, 이런 '클럽 모로'의 동태는 푸셰에 의해 낱낱이 나폴레옹에게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로의 존재감이 다소 거북스러웠는데,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자코뱅들과 가까이 지낸다니 더욱 심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오쥬로는 시작부터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데, 그의 정치적 행보는 사실 골수 보나파르트파는 아니었기 때문에 1804년에 그가 나폴레옹 황제의 원수로 임명된 것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1814년 나폴레옹을 배신했는데, 정작 백일천하 때는 괜히 나폴레옹에게 붙었다가 욕만 얻어먹고 나폴레옹에게세도 내침을 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되돌아온 루이 18세에게서도 배신자로 찍혀, 말년에 연금까지 끊기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와의 휴전이 11월 12일 마침내 종료되었습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는 늙고 무능한 크레이 장군을 해임하고 왕족들 중에서 새 총사령관을 물색했습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대공이나 카를 대공이 모두 그를 고사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 (Francis II)의 동생이자 불과 18살 밖에 되지 않은 요한 대공 (Johann von Österreich)을 총사령관으로 앉혔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좀 너무한 일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노장 라우어(Franz von Lauer)를 서열 2위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좀 어정쩡한 지휘 체계였습니다. 막말로, 이건 혹시 전과가 좋으면 요한 대공의 공으로 돌리고, 패전이라도 하게 되면 그 책임은 라우어에게 뒤집어 씌우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라우어는 처신하기가 상당히 거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오스트리아의 전쟁 위원회는 공격적인 작전으로 유명했던 베이로더 (Franz von Weyrother) 대령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딸려보냈습니다. 원래 라우어는 출신 병과가 공병으로서, 요새 포위전이 주특기였습니다. 그는 제1차 대불동맹전쟁 때 뷔름저와 함께 독일 전선에서 싸웠고,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작전에서 뷔름저와 함께 만토바에서 나폴레옹에게 포위되어 고생하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혹시 라우어가 너무 소극적인 전투를 벌일 까봐, 공격적인 베이로더 대령을 딸려 보냈던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의 시작은 이렇게 별로 산뜻하지 못했습니다.
(18세 당시의 요한 대공의 모습입니다. 그의 형 프란츠 2세처럼 그도 원래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이었지요. 원래 투스카니 공작 가문이었거든요.)
아무튼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군이 공격적으로 나갔습니다. 베이로더 대령의 작전은 그야말로 과감한 것으로서, 마치 나폴레옹의 작전을 방불하게 했습니다. 즉, 그는 프랑스군의 좌측으로 빙 돌아 뮌헨 북서쪽까지 침투한 뒤 남하하여 프랑스군의 좌익을 격파하고, 계속 남하하여 뮌헨 서쪽을 점령하여 뮌헨의 프랑스군을 포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베이로더의 작전은 나폴레옹급이었지만, 그 작전을 수행할 오스트리아군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작전이 시작되어 며칠 강행군을 해보았으나 병사들만 죽어날 뿐 도저히 원하는 속도의 행군이 안되었으므로 결국 도중에 작전을 변경하여, 원래 계획보다 훨씬 동쪽에서, 즉 거의 뮌헨의 바로 북쪽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투가 1800년 12월 1일의 암핑(Ampfing)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로 기습당한 프랑스군은 의외로 용감히 잘 싸웠습니다. 사실 그럴만 한 것이, 이들은 프랑스 라인 방면군으로서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최정예 부대들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이나 오스트리아군이나 각 중대나 대대, 사단 등은 규정대로 100% 충원이 된 부대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었으나, 이 프랑스 라인 방면군은 거의 100% 채워지고 보급도 원활하게 잘 되는 진짜 엘리트 부대들이었지요.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훈련 상태도 좋고 경험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사기가 좋았습니다. 현장의 프랑스군 사단장 그르니에(Paul Grenier)는 약 1천7백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기습해온 오스트리아군에게는 오히려 2배 정도되는 약 3천의 사상자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래도 분산된 상태에서 밀집된 적의 공격을 버티어 낼 수는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하크 (Haag) 지역에서 전술적 후퇴를 감행했는데, 이 후퇴가 정말 교과서적으로 기가 막히게 질서정연하게 수행되었습니다. 모로가 1796년에 카를 대공으로부터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라인강을 무사히 건넜던 경험이 특히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르니에 장군은 나중에 이탈리아 전선에서 주로 공적을 세웠고, 왕정 복고 이후에 정계에 입문하여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다 갔습니다.)
이렇게 실속없는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군은 하크 지역까지 전진했다가 프랑스군이 모조리 후퇴한 것을 보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곧 크게 기뻐했습니다. 겁장이 프랑스놈들이 드디어 무너져 내린 모양이다 ! 라는 것이 경험없는 18살짜리 요한 대공과 자신의 작전에 자아도취된 베이로더 대령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과오가 다 자신의 책임이 될 것임이 분명한 라우어는 이렇게 쉬운 승리가 무척 의심스러웠으나 감히 18살짜리 황족의 막 손에 들어오려고 하는 첫번째 대승리를 말아먹을 수는 없는지라, 이 두 지휘관의 추격 명령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약 6만의 오스트리아군은 약 5만3천의 프랑스군이 도주해간 뮌헨 인근 호헨린덴의 숲 속으로 조급히 추격해 들어갔고, 이런 빽빽한 숲 속에서 좀더 빨리 진격하기 위해서 병력을 크게 넷으로 갈라 진격했습니다. 이렇게 분산된 네 부대는 서로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호헨린덴의 숲 속에는 모로가 휘하에 르그랑 (Claude Legrand), 네이 (Michel Ney), 그루시 (Emmanuel Grouchy, 예 워털루의 그 그루시 맞습니다), 리슈팡스 (Antoine Richepanse) 등 쟁쟁한 장군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슈팡스 장군의 활약이 호헨린덴 전투에서 가장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1802년 카리브해의 노예제도를 부활시킨다는 불명예스러운 임무를 맡아 카리브해에 쳐들어갔다가 그만 황열병에 걸려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등에 총질을 해댈 생각으로 서둘러, 그것도 뿔뿔히 흩어진 채 12월 3일 숲 속으로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은 때마침 내리는 폭설에 더욱 분산되어 버렸습니다. 일부 부대가 폭설에 발이 묶여 진격에 방해를 받은 것이지요. 이런 상태에서 클로브라트(Johann Kollowrat)의 사단을 시작으로 곧곧에서 프랑스군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된 오스트리아군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제일 나빴던 것은 뒤쳐졌던 오스트리아 사단들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과 대포 소리에 당황하다보니 대체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렇쟎아도 분산된 병력을 더욱 분산시켜 사방으로 탐색에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은 그야말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늑대같은 프랑스군의 손에 각개격파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라우어 장군입니다. 예상대로 총사령관인 요한 대공 대신 이 아저씨가 패전의 책임을 온통 뒤집어 썼습니다. 정작 패전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베이로더 대령은 계급도 낮은데다 요한 대공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이때 패전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베이로더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을 위해 작전을 짜줄 수 있었지요. 오호 통제라... 오스트리아가 자꾸 지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인사가 개판이거든요 !)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요한 대공은 황족답게 진짜 명마를 타고 있었으므로 이 말의 속력에 의지하여 전속력으로 (후방을 향해) 달린 덕택에 포로가 되는 망신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약 4천6백의 사상자와 약 9천명의 포로, 그리고 무려 75문의 대포를 노획당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2천의 사상자와 1천의 실종(또는 포로), 그리고 겨우 1문의 대포를 잃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모로는 나폴레옹과는 달리 천천히 뒷정리를 해가며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했는데, 이미 사기가 바닥을 친 오스트리아군은 이를 막아낼 사정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모로는 이후 약 2주 동안 200km를 서서히 전진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붙이고 전진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은 곧곧에서 항복하여 포로만 무려 2만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12월 17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는 서둘러 에이스인 카를 대공을 강제로 보내 그 동생인 요한 대공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게 했으나,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모로가 비엔나 서쪽 불과 170km 지점인 슈타이어(Steyer)까지 밀고 들어오자,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휴전을 구걸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12월 25일, 카를 대공과 모로는 휴전에 동의했고, 이는 결국 약 1달 뒤인 1801년 2월 9일의 루네빌(Lunéville) 조약으로 이어집니다. 이 조약으로 제2차 대불동맹전쟁은 사실상 끝나버리지요.
(그래도 나폴레옹이 1797년에 비엔나 70~80km까지 접근했을 때보다야 좀 낫지요 ?)
이 승리는 나폴레옹에게는 기쁨과 동시에 불안감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왕당파와 자코뱅 양측으로부터 온갖 음모에 시달리고 있어서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인 모로가 자신의 마렝고 전투를 덮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국민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결코 재미없는 일이었지요.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유는 바로 나폴레옹이 제1차 동맹전쟁을 실질적으로 끝내버린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2차 동맹전쟁을 이렇게 화려한 방식으로 끝내버린 사람이 모로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지요. 나폴레옹은 모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터진, 위에서 언급한 1800년 12월 24일 폭탄 마차에 의한 나폴레옹 암살 시도는 나폴레옹의 마음을 독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장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폭탄 마차의 배후로 지목된 카두달 등은 이미 영국으로 망명한 몸이었고, 모로가 전에 연루되었던 음모의 주역 피슈그뤼 역시 영국에 망명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업적인 정교협약 (Concordat,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참조)이나 레종 도뇌르 훈장 (나폴레옹 시대 군인들의 노후 대책 참조)을 모로는 거의 대놓고 비웃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모로는 와이프와 행복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뤼네빌 조약에 이어 1802년 3월, 영국과 아미엥(Amiens) 조약까지 맺은 상태라, 정말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였거든요.
(뤼네빌 조약이나 아미엥 조약이나 모두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측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그러다 1803년 8월 경 영국에서 파리로 비밀리에 들어온 피슈그뤼와 카두달이 나폴레옹의 암살을 꾀하다가 1804년 2월 나폴레옹의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모로는 이들과 만나 음모에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실질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에 따르면 모로도 독재자 나폴레옹의 제거에는 동의했으나, 그 결과로 루이 18세가 복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고 하는군요. 카두달은 재판 후 처형되었고 피슈그뤼는 감옥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영토 밖에 있던, 사실상 아무 죄도 없는 순진한 젊은 귀족 앙겐 공작조차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야밤에 납치되어, 1804년 3월 21일 전 유럽의 경악 속에 처형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로는 그렇게 막 나가는 나폴레옹도 그렇게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국민적 영웅이었거든요. 특히 군대가 그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나폴레옹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왕년에 '클럽 모로'에 드나들던 자코뱅파 장군인 르쿠르브(Claude Lecourbe)가 모로의 아들을 재판정 관람석에 데려와 "병사들이여, 여기에 너희 장군의 아들이 계신다 !"라고 외치자, 재판정의 모든 군인들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한 것입니다.
(르크루브 장군입니다. 그는 저 재판정에서의 사건으로 나폴레옹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혀 1805년 전역을 당하는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1814년 루이 18세가 복위하자 그는 백작에 봉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는 나폴레옹이 백일천하로 되돌아오자 그에게 충성하여 프랑스 동부 도시 벨포르에서 고작 8천의 병력으로 무려 4만의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도시를 종전이 될 때까지 지켜냅니다. 이 업적으로 그는 프랑스 역사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하네요. 당연히 백일천하가 끝나고 그는 퇴역했는데, 그만 퇴역하자마자 몇달 안되어 숨을 거둡니다. 지금도 벨포르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모로의 반역 음모에 대한 재판 결과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제1심은 7대5로 무죄 선고가 났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난리법석을 떨고난 뒤, 일부 재판관은 이건 반역죄이므로 무조건 사형이 언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벌어진 제2심에서는 기대했던 사형 대신 고작 2년형이 내려졌습니다. 일설에는 나폴레옹이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옥에서 2년 썩느니 그냥 외국으로 망명하라'고 모로에게 제안했다고 하고, 다른 설에는 모로가 '선수끼리 이러지 말고 그냥 깨끗하게 내가 외국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하자'라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와이프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고, 나폴레옹은 이 경쟁자를 그림 좋게 떠나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병사들도 '미국에서 편히 사시겠군'하며 별 반발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로는 정말 미국에서 편히 살았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독립한 신생국이었던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한가닥하던 사람이 도착하면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샤또브리앙이나 탈레랑도 혁명시 사정이 안 좋을 때는 미국에 망명했었지요. 미국 정부에서는 모로에게 이런저런 관직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하고 뉴저지 델라웨어 강변에 정착하여 사냥과 낚시, 사교 모임을 즐기며 정말로 편안하고 조용한 인생을 즐겼습니다. 마치 나폴레옹과의 권력 투쟁 따위는 다 잊은 듯 했습니다. 1806년 그가 그의 형에게 쓴 편지에는 "J'y mène une vie très monotone, mais très tranquille", 즉 난 단조롭지만 매우 조용한 삶을 살고 있어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 주의 모로 시는 정말 모로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래 사진은 모로가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는 델라웨어 강입니다. 저같으면 그냥 델라웨어 강 주변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미국인이 되어가던 모로의 인생은 1812년 바뀌게 됩니다. 때마침 미국은 영국과 1812년 영미 전쟁에 돌입한 상태여서, 모로에게 군 지휘권을 제안했으나, 때마침 들려온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소식에, 모로는 이럴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패망을 자기 손으로 이루어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마음 속에는 나폴레옹에 대한 앙심이 깊이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모로의 유럽행에는 그의 야심찬 아내 윌로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은 정말 변방의 촌동네라서, 거기서 잘먹고 잘살아봐야 여자들의 허영심은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와이프의 들볶임 속에 유럽에 도착한 모로는 러시아 짜르의 초빙을 받아 러시아군의 고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1813년 8월, 드레스덴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게 되자,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프랑스의 배신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던 것이지요. 짜르 알렉상드르는 그를 매우 각별하게 대했고, 드레스덴 전투에 임해서는 그의 천막에 찾아와 "당신의 명령을 받으러 왔소. 난 이제 당신의 참모니까." 라고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과분한 말을 들은 모로는 누가 봐도 심하다 할 정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도 창백해졌다고 합니다.
그가 죽기 바로 며칠전에, 전에 함께 프랑스군에서 싸웠던 "J"라는 이름의 장군이 역시 연합군 소속으로 나타나자, 전에는 별로 친분이 깊지 않았는데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망명자가 왔다고 생각하여 매우 반갑게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J라는 장군은 차갑게 손을 빼내었고, 머쓱해진 모로는 "이렇게 서로 비슷한 처지에서 만나게 되니 참 어색하구료" 하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그 J 장군은 더욱 차갑게, "비슷한 처지가 아닙니다. 저는 원래 프랑스 국적이 아니었거든요." 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모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돌아서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빛났던 드레스덴 전투... 이 전투는 소수의 프랑스군이 다수의 연합군을 꺾은 승전이었으나, 곧 이어진 다음 전투에서는 역시 중과부적으로 프랑스군이 패전합니다.)
모로의 죽음은 꽤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드레스덴 전투가 있던 8월 27일, 짜르와 함께 능선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대포알이 그의 오른쪽 무릎을 부수고 그가 탄 말의 몸통을 관통한 뒤 다시 그의 왼쪽 다리 일부를 부수어 놓았습니다. 그는 코삭 기병들의 창을 엮어 만든 들것에 실려 후송되었고, 짜르의 주치 외과의에 의해 오른쪽 다리의 절단 수술을 받았습니다. 모로는 정말 용감하고 침착하게 수술을 받았고, 절단이 끝나자 외과의에게 왼쪽 다리는 어떤 상태냐고 묻고는,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역시 잘라버리라고 주문했다고 합니다. 마취제도 없고 항생제, 해열제도 없던 그 시절 이런 중상을 입었으니 그의 고통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짜르의 근심 속에서 며칠을 고통받던 그는 마침내 6일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Soyez tranquilles, messieurs; c'est mon sort," - 조용히 해주시오, 여러분. 이것이 내 운명이오.
(모로 장군의 죽음. Auguste Couder의 그림입니다.)
아마도 그의 마지막 생각은 자신이 정당한 복수자인지 또는 프랑스의 배신자인지에 대한 갈등이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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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손가락 표시 눌러서 추천 좀 부탁드려요. 다음에는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을 다뤄야 할 지, 곧장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로 가야할 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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