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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의 가족

by nasica-old 200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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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각기 인생의 목표와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회사에서의 출세이겠고, 어떤 분은 돈 많이 버는 것이겠고, 어떤 분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일 것입니다.  제게는 가족의 행복이 목표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그런데 군인이라는 직업은 본질적으로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기는 꽤 척박한 직업입니다.  특히 전시에는요.  가장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요.  특히 전시에는,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은 강제로든 재주껏이든 현지의 여자들과 어떻게든 한번 해(?)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 남편을 흐믓한 눈으로 바라볼 부인은 없겠지요.  심지어 넬슨 제독조차도, '모든 해군은 지브랄타를 통과하면 독신자가 된다' 라고 이상야릇한 의미의 말을 남겼습니다.

 

 

 

로마 군단병의 경우, 일반 병사들은 원칙적으로 결혼은 금지되었습니다.  당시는 징집병 제도가 아니었는데, 일단 복무 서약을 하면 제대는 25년 후였습니다 !  그럼 20살에 입대하면, 45세가 될 때까지 총각으로.. 살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개는 주둔지의 현지 여자와 불법 결혼을 해서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군 지휘관들은 이런 식으로 생긴 병사들의 가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장교들 빼고는 모두들 인정을 했다고 합니다.

 

영국군의 상황도 로마 군단병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25년의 복무 기한이 있었던 로마 군단병들에 비해, 대개의 영국 병사들은 뭘 잘 모르고 종신 복무 서약에 서명을 했습니다.  영국군은 병사들의 결혼을 완전히 불허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지휘관의 마음에 따라 선별적으로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대부분의 하사관과, 일반 사병 중 약 7~8%가 결혼하도록 정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는, 영국 국내에 배치된 약 650명의 병력을 갖춘 연대 하나에는 약 50~60명의 '연대 공식 부인'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연대에서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부인들도 많았겠습니다만, 병사 자신이나 여자 당사자도, 대개 사회의 밑바닥 인생이었으므로, 어차피 공식이던 비공식이던 개의치 않았나 봅니다. 

 

 

 

아뭏든, 이들 '공식 부인' 중 몇몇은 부대원들이나 장교들의 세탁, 바느질 따위의 잡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공식 부인들은 부대 막사에서 살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래봐야, 막사 내의 한쪽 귀퉁이에 칸막이를 한 정도의 공간이었습니다만, 일부 병사들은 이를 '점잖지 못한' 관습이라고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상당수의 부인들은 점잖은 생활을 했겠습니다만 - 글쎄요.. 의심스럽습니다...-  많은 수의 병사 부인들은 욕설이나 만취, 다른 부인들과의 싸움 등의 불명예로 인해 막사에서 쫓겨나가서나 공식 부인 명단에서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절도 행위 같은 좀더 심각한 범죄는 일반 병사와 마찬가지로, 채찍질의 벌을 받았습니다.

 

1775년, 위니프레드 맥코웬이라는 부인은, 보스톤 시 소유의 황소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마을의 공개 장소에서 수레에 묶여 맨살을 드러낸 등에 100대의 채찍질을 당하고 3개월간 구류에 처해졌습니다.  채찍질 100대면 웬만한 성인 남자도 죽을 수 있는 중형이었습니다.  100대의 채찍질을 당하고 나면, 그 상처가 영구히 지워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한 출혈과 피부 손상, 쇼크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여자 하나는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자주 호의를 베푼' 죄목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에 묶여 의식을 잃을때까지 뺑뺑이를 당하는 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자와 놀아난 장교는 벌금형을 당했습니다.

 

문제는 연대가 해외로 파송될 때입니다.  당시 영국의 많은 연대나 대대들이 해외로 파송되었는데, 이때마다 추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추첨은 어떤 부인이 연대를 따라 갈 수 있는지 자격을 부여하는 추첨이었습니다.  공식 부인이라고 해도, 모두들 연대를 따라 해외로 나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사관의 부인까지 포함해서, 전체 병사 100명당 6명의 공식 부인만이 동반 파송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아이가 2명 이상인 부인은 무조건 제외되었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위험한 전쟁터로, 그것도 식량, 급수, 위생 등이 모두 엉망인 전쟁터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겠습니까 ?  당시 병사들은 모두 못데리고 가서 안달이었고, 부인들도 못따라가게 될까봐 무서워했습니다.  실제로 따라갈 수 있는 부인의 숫자가 훨씬 적었으므로, 당연히 추첨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들 그렇게 전쟁터에 못가서 안달이었을까요 ?

 

 

 

이는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일단, 영국 본토에서의 일반 사병들의 가족들의 생활 환경도, 뭐 그렇게 쾌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당시 영국 서민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비참했는데, 일반 사병의 사회적 계급은 거의 밑바닥이었으므로, 그 가족의 삶 또한 거의 밑바닥이었습니다.  또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도덕 상황, 안정성으로 볼때, 일단 헤어진다는 것은, 더군다나 먼 해외로 떠난다는 것은, 영영 이별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남편의 해외 파송때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혼과 동일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송금같은 것도 그렇게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병사의 얼마 안되는 급료를 본국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낼 방법도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연대와 동행하지 못하는 부인들은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하든가, 더 심한 경우 창녀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고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찢어졌...을까요 ?  의외로, 역시 당시 사회 상황과 또 그 병사들의 출신 성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귀찮은 마누라와 징징대는 애들로부터 해방되어 새 여자를 얻을 희망에 부풀었던 병사들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뭏든 부인들도 분명히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연대의 당당한 구성원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연대가 바로 집이고 가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인들도 연대에 강한 애착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부인들은 부상병과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고, 또 전투가 승리로 끝난 경우, 시체와 부상병이 즐비한 전쟁터로 용감히 뛰어들어가 약탈품을 찾았습니다.  시체나 부상병이 가진 몇안되는 동전이나 근사해보이는 군복, 돈이 될만한 검이나 피스톨 등이 대상이었는데, 자신의 장화를 벗겨가려는 이런 부인들에게 저항하는 적 부상병은 가차없이 부인들의 칼에 목이 따였다고 합니다.  이런 부인들이 애까지 데리고 부상병과 시체들을 뒤지는 광경 상상이 갑니까 ?

 

 

나폴레옹 전쟁의 스페인 전장에서, 영국군이 부르고스에서 처참하게 패배하여 후퇴할 때, 스키디 부인이라는 연대의 공식 부인은, 탈진한 남편과, 배낭과, 머스켓 소총과, 기타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1.5마일을 걸어서 숙영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남편은 이런 (괴력의) 와이프에게 고마와했을까요, 아니면 늘씬한 스페인 아가씨들에게 눈독을 들였을까요 ?  부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전자였어야 했을텐데요. ㅎㅎㅎ

 

 

 

(제 글에서 인용된 구체적 사례는 Mark Adkin이라는 현역 영국군 소령이 지은 'Sharpe's Companion'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Sharpe 시리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해설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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