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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음식 이야기

인간의 굴레, 그리고 민스파이

by nasica-old 200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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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 서머셋 모옴 (배경 : 19세기 말 영국) --------------------------


결과적으로 필립은 크리스마스에 갈 곳이 전혀 없어져버렸으므로, 크리스마스를 그의 하숙집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친구 헤이워드의 영향으로, 그는 이 축제 기간이 아주 상스럽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였고, 이 명절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되자, 주변의 떠들썩함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그의 하숙집 주인 내외는 그날을 출가한 딸과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필립은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날 식사를 밖에서 하겠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정오 쯤 런던 시내를 향해 걸어가서, 가티네 식당에서 혼자 앉아 칠면조 한조각과 크리스마스 푸딩을 먹었다. 그 후로도 할 일이 없었으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서 오후 미사를 드렸다.  거리는 거의 텅 비어있었고,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뭔가 약속이 있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목적지를 가지고 걷고 있었다.  게다가, 혼자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필립에게는 그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는 여태까지 평생 이처럼 외롭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원래 그의 의도는 거리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다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었으나, 도저히 이야기하며 웃고 떠드는 행복한 사람들 모습을 또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워털루로 되돌아왔다.  오는 길에, 웨스트민스터 브릿지 거리를 지나며 햄과 민스 파이 두개를 사서 반즈에 되돌아왔다.  그는 작고 쓸쓸한 그의 방에서 음식을 먹고 책을 읽으며 저녁을 보냈다.  침울함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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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mince)라는 단어는 고기 같은 것을 잘게 썬다는 뜻입니다.  제가 최근까지 열심히 읽던 Bernard Cornwell의 Sharpe 시리즈에도, 이 mince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음식을 가리킬 때도 나오지만 주로 '잘게 다진다'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즉 다음과 같은 경우지요. 


"프랑스군이 우리를 mincemeat으로 만들어 놓을거야."  (아주 개박살을 내놓는다는 뜻입니다.)


저 위에 필립이 크리스마스날 외롭게 혼자 먹은 mincepie는, 원래 명칭은 mincemeat pie입니다.  즉, mincemeat를 넣은 파이인 거지요.


이야기가 여기서 좀 복잡해집니다.  먼저 파이란 과연 무엇인가부터 알아봐야지요.


우리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파이는 주로 호두파이나 체리파이, 페칸파이 같은 것들입니다.  주로 커피빈이나 파스꾸치 같은 비싼 커피 전문점에서 조각 단위로 팔지요.  이런 것들을 보면, 파이라는 것은 뭔가 단단한 과자껍질 속에 촉촉한 과일이나 견과류가 들어있는 과자 종류입니다.  윗면이 과자껍질로 덮힌 것도 있고, 안덮힌 것도 있지요.

 

 

(이것이 흔히 보는 파이)

 

그런데 사실 파이라는 것은 종류가 꽤 많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저는 카투사로 군생활을 했었습니다.  거기서 가끔 나오는 음식 중에, chicken pot pie 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접시 위에 올려진 것을 보면, 전혀 파이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냥 닭고기와 감자, 당근 같은 것을 뜨거운 크림 소스 같은 것에 버무리고, 그 위에 연한 카스텔라같은 빵조각이 조금 덮힌 음식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전에 소개드린 혼블로워의 영국 해군 식사 장면에서 나왔듯이, 파이 속에는 고기 종류도 많이 들어가며, 디저트가 아니라 주식으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이것이 제가 군대에서 먹었던 치킨 팟 파이... 이건 과자라기보다는 요리)


제가 여태까지 본 것들을 보면, 파이의 정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밀가루로 된 껍질 속에 고기나 과일 등 촉촉한 소를 담은 음식으로, 껍질은 밑에만 있을 수도 있고, 밑과 위를 다 덮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위만 덮은 것도 있다."


전혀 권위가 없는, 저만의 정의니까 뭐라고 태클을 거셔도 따로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대충 맞는 것 같아요.


그러면 다음으로 mincemeat에 대해서 봐야지요.  Mincemeat는 당연히 minced meat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러나, minced meat과 mincemeat는 아주 다릅니다.


영한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

 

mince·meat〔〕 n.  민스미트 《민스파이의 소[고물];건포도·설탕·사과·향료 등과 잘게 다진 고기를 섞은 것으로 만듦》


영영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1. N-UNCOUNT
Mincemeat is a sticky mixture of small pieces of dried fruit. It is usually cooked in pastry to make mince pies.

2. N-UNCOUNT
Mincemeat is the same as mince.[ mainly BRIT ]


즉, 원래는 정말 잘게 다진 고기와 잘게 부순 말린 과일을 섞어놓은 것이었던 모양인데, 요즘 mincemeat라고 하면 말린 과일만 있고 고기가 들어간 경우는 거의 없나 봅니다.  아직도 일부 지방에서는 민스미트에 고기를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왜 고기가 안들어갔는데 mincemeat라고 부르냐고요 ?  사실 원래 meat라는 단어 뜻에는 꼭 고기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과육(果肉)이라는 단어에도 고기 육자가 들어가지요 ?  그것처럼 영어의 meat도 과실의 과육처럼, 뭐가 덩어리진 음식물을 말하기도 합니다. 


가령 전에 언급했던 Hornblower 시리즈 중에도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Hornblower and the Atropos  by C.S Forester  (배경 : 19세기초 터키 해안)  ----


무디르는 형식적인 우아한 사양 후에 감사히 커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커피를 맛보고는 변화가 일어났다.  무디르는 곧 평소의 절제된 얼굴로 돌아가긴 했지만, 잠깐이나마 커피 맛에 놀랐다는 표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커피에 설탕을 잔뜩 넣어 거의 시럽 상태가 되도록 만들고는, 컵을 손에 대지 않고 찻잔을 들어 입가로 들어올렸다.

 

"여기에 원래는 작은 과자와 sweetmeat 도 있어야 합니다, 함장님." 통역 노릇을 하던 터너가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블랙스트랩(럼주와 당밀을 섞은 것:역주)과 해군용 건빵을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쟎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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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맨 처음에 사전을 찾아보기 전에는 저 sweetmeat 라는 것이 뭔가 소금에 절이지 않은 고기를 뜻하나보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터키 사람들은 커피와 함께 간식으로 고기를 먹나 하고 생각했었지요.  나중에서야 sweetmeat 라는 것이 고기가 아니라 그냥 봉봉이나 캐러멜 같은 설탕과자 종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튼 민스파이라는 것은 결국 말린 과일을 잘게 부수어 촉촉하게 뭉친, 달콤한 소를 집어넣은 작은 파이입니다.  지름은 약 5cm 정도 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설날에 떡국을 끓여먹듯이, 영국애들은 크리스마스면 민스파이를 만들어 먹는다고 합니다.  또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1살 더 먹는다고 말하듯이, 영국에서도 크리스마스 축제 12일 동안 매일 민스파이를 1개씩 먹어야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또 민스파이에 집어넣은 소, 즉 민스미트를 만들때도, 시계방향으로만 저어야지 반시계 방향으로 저으면 또 재수가 없다고 하는군요.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도 '인간의 굴레'의 주인공 필립이 크리스마스날 혼자 쓸쓸하게 방구석에서 민스파이를 혼자 먹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지 않으신가요 ?  저도 먹은 음식은 다르지만 그런 경우 있었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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