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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이 광장에 어울리는 이름은 ? - 보쥬 광장 이야기

by nasica-old 201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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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족은 유럽 비행기편을 파리에 도착했다가 파리에서 다시 귀국편에 오르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저가 항공을 타고 다시 파리로 와서 1.5일을 더 보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로마에서 파리로 돌아가게 되니 무척 기분이 좋더라구요.  심지어 공항에서 이탈리아 어가 아닌 프랑스 어가 보이니까 (아는 단어도 몇 개 없었지만) 반갑더라구요.  마치 며칠 사이에 프랑스 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제가 묵었던 호텗 방에서 내려다 본 파리 시내 모습입니다.  예쁘던데요.  저 멀리 몽마르트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 즉 성심 성당이 보입니다.  가만 보면 초고층 빌딩으로 숲을 만들어놓고 좋아하는 건 미국인들과 아시아인들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다시 돌아온 파리에서의 첫날 일정을 바스티유 광장, 즉 7월 혁명 기념탑이 있는 곳 근처에 있는 보쥬 광장과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보쥬 광장에 대해서는 사실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냥 거기 빅토르 위고 기념관이 있다는 말만 듣고 간 것이었어요.  막상 가보니, 정반대였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노트르담의 꼽추'를 썼다는 그 집은 사실 별로 볼 것이 없었고, 보쥬 광장은 의외로 상당히 볼 만 하더군요.




(바스티유 광장의 7월 혁명 기념탑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온갖 혼란과 파괴만 겪고 결국 다시 왕정 복고로 이어졌으니 말짱 헛것 아니었냐고요 ?  실패한 혁명도 반드시 인류 역사에 강렬한 영향을 끼칩니다.  인류의 역사는 가끔씩 일보 후퇴도 하지만, 결국은 진보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은 결코 실패한 혁명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에 간접적으로 기인한 바가 큽니다.)




(보쥬 광장 한쪽 편에 있는 메종 드 빅토르 위고입니다.  뭐 화가도 아니고 소설가 집에 뭐 볼 것이 많았겠습니까마는... 진짜로 별로 볼 것이 없어서 약간 실망했습니다.)



(저 기념관 안에 들어가니, 빅토르 위고가 정치가로서 활동할 때 그를 다루었던 신문 캐리커쳐가 많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다들 아시다시피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2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를 배신자로 맹비난하고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보쥬 광장 (Place des Vosges)은 이름부터 우리에게는 생소한데, 왜 보스쥬가 아니고 보쥬라고 읽는가 부터가 좀 불만일 수 있습니다.  고딩 때 불어를 배운 저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몰랐는데, 이름 중간에 자음 앞에 들어가는 s는 원래 묵음이라고 회사 일로 만난 프랑스 인이 말해주더군요.  이 보쥬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이냐고요 ?  의외로 그냥 지방명입니다.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로렌느 (Lorraine) 지방의 지역구 (departement)이고, 그 이름도 그냥 옆에 있는 보쥬 산맥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특이할 만한 점으로는 여기가 잔다르크 (Jean d'Arc)의 고향이라는 점 정도이지요.




(프랑스 지도에서 보쥬의 위치입니다.)



이런 시골 지역 이름이 왜 파리의 멋진 광장에 붙여진 것일까요 ?  그 이유를 알자면 이 광장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셔야 합니다. 




(구글 위성 사진으로 본 보쥬 광장입니다.  보시다시피 한변이 140m인 정사각형으로서 평수로 따지면 대략 6천평 됩니다.)



이 광장은 지도에서 보시듯이 완벽한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광장입니다.  근세 이후에 만들어진 계획 도시라면 몰라도,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파리의 거주 구역 한 복판에 이런 정사각형 광장이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사실 이 곳에는 원래 광장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 소유의 건물들이 모여 있던 투르넬 관 (Hôtel des Tournelles)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은 1559년 마상 창시합을 하다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앙리 2세 (Henri II)가 마상 창시합을 벌였던 바로 그 곳입니다.  




(Hotel de Tournelles의 예전 모습입니다.  마상 경기 시합장의 모습도 보입니다.)




(앙리 2세가 마상 시합 도중 치명상을 입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에게 부상을 입힌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스코틀랜드 근위대 대장이었습니다.)



프랑스 종교 내전 중의 대표적 배신극인 1572년 바르톨로뮤 학살의 주범으로 유명한 카트린느 드 메디치 (Catherine de' Medici)가 바로 이 앙리 2세의 미망인이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 듯이 이탈리아 태생이던 그녀는, 아직 중세 시대 필이 나던 이 투르넬 관이 원래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28세의 청상과부로 만든 이 곳이 싫다는 핑계를 대고 이 곳을 철거해버리고 자신은 이탈리아 풍으로 지은 새 궁전 루브르 궁전 (Palais du Louvre)으로 옮겨 갔지요.  루브르 궁전의 건설을 위해 이 투르넬 관 부지 일부를 팔기도 했고, 또 그 건물을 철거하면서 나온 자재를 일부 다른 공사에 재활용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이 투르넬 관 부지는 탄약고 및 연병장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양반이 앙리 4세입니다.  '세 앙리의 전쟁'의 주인공으로서, 결국 그가 최후의 승자로서 프랑스의 왕좌에 올랐지요.  앙리 4세의 등극으로 발로아 왕조가 끝나면서 부르봉 왕조가 열립니다.  다만 그 세 앙리는, 앙리 4세도 포함하여, 모두 암살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곳에 아름다운 광장이 만들어진 것은 부르봉(Bourbon) 왕가의 초대왕이자, 프랑스에서 성군으로 존경받는 앙리 4세 (Henri IV)의 명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원래 경제 부흥을 위해 (앙리 4세와 닭 요리 관련 해서는 빵보다는 고기 ? - Poule au pot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469 참조) 이탈리아 출신의 기술자들 수백 명을 데려와 금/은/실크 공장을 세우려고 했습니다만 결국 실패했고, 대신 이곳에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근사한 광장이 딸린 폐쇄형 주택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1605년부터 7년 간 만들어진 이 광장의 이름은 보쥬 라든가 하는 촌티나는 지방명이 아니라, 루아얄 광장 (Place Royale, 왕실 광장)이라는 우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이에요.  원래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루아얄 광장은 이제 시민들을 위한 보쥬 광장이 되었습니다.)



이 광장의 의미는 이곳이 유럽 최초의 도시 계획에 의한 광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광장은 사방이 웅장한 건물들로 둘러 싸여 있는데, 이 건물들의 전면부는 모두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하여 건축되도록 했습니다.  유럽 도시들이 특히 예뻐 보이는 것이,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일정한 패턴의 건축 양식 때문인데, 그런 개념을 살린 최초의 광장인 것이지요.  또 이 광장에는 예쁘게 다듬은 보리수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져 있는데, 사실 이건 17세기 초반 개장할 때가 아니라,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만들어진 조경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건물은 붉은 벽돌로 된 벽에 돌로 일정한 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지붕은 박공창이 나 있는 청색 슬레이트로 되어 있습니다.)



이 광장은 1612년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느 (Anne of Austria) 의 결혼식을 축하하며 개장되었는데, 정작 왕족들은 이 곳에 산 적이 없었고, 대신 앙리 4세의 명재상이던 쉴리 (Maximilien de Béthune, Duke of Sully), 루이 13세의 재상이던 리셜리외 (Richelieu) 추기경 등 유명 인사들이 이 곳 건물들에 거주했습니다.  빅토르 위고도 한때 여기에 살면서 '노트르담의 꼽추'를 탈고했다고 합니다.  아,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앙졸라의 친구 중 하나인 레글 (Laigle)의 별명이 보쉬에 (Bossuet)인데, 그에게 그런 별명을 안겨준 장본인인 보쉬에 (Bossuet) 주교도 여기에 살았습니다.  웅변으로 유명했던 보쉬에의 별명이 모의 독수리 (L'Aigle de Meaux)였거든요.




(이 양반이 진짜 모의 독수리, 보쉬에 주교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보쉬에, 즉 레글은 대머리라고 되어 있지요.)



이 광장 중앙에는 루이 13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이 동상은 그를 보좌하던 리셜리외 추기경이 세운 것입니다.  루이 13세는 사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명한 역사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바로 그 왕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안느도 삼총사 속에서 '목걸이를 잃어버린' 바로 그 여왕 맞습니다.  삼총사에서 루이 13세는 무척이나 찌질스러운 왕으로 나오고, 또 오스트리아의 안느는 청순가련(?)형으로 나옵니다만, 실제로는 뭐 꼭 그렇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일단 루이 13세는 리셜리외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30년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냈지요.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니라'라고 떠들면서 프랑스 왕국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것도 루이 13세가 합스부르크의 세력을 좀 손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안느, 삼총사에서 삼총사가 보호하던 바로 그 여왕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안느라고는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합스부르크의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썼다고 합니다.  프랑스어를 끝끝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하네요.)



(루이 13세가 사망한 지 며칠 뒤인 1643년 5월 19일에 벌어진 로크롸 Rocroi 전투에서 15~16세기를 주름잡던 스페인의 무적 총창부대 테르치오 tercio의 무적신화가 깨지게 됩니다.  이때 프랑스 군의 지휘관은 약관 22세의 앙기앵 공작, 훗날 대 콩데 (Le Grand Conde) 공이 되는 양반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나폴레옹이 살해하게 되는 앙기앵 공작의 조상이 되나 봅니다.)




(로크롸 전투에서 고전하다 최후에야 항복했던 스페인의 테르치오 부대)




(여담입니다만, 루브르에서 이 그림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 grand conde의 접견이라는 제목만 보았고, 이 대 콩데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이 콩데가 바로 로크롸 전투 이후 일약 프랑스 최고의 지휘관으로 떠오른 콩데입니다.  그는 나중에 프롱드의 반란으로 적국인 스페인에 투항하여 활동하다가, 결국 사면을 받고 루이 14세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에서 승전을 거둔 뒤, 처음으로 베르사이유의 루이 14세를 알현하는 콩데 대공의 접견 장면을 그린 제롬의 명작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사진을 찍은 이 루이 13세의 동상은 오리지널 버전이 아닙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이 루아얄 과장이 무사할 리가 없었지요.  이 왕의 동상은 혁명 때 철거되어 아예 녹여버렸습니다.  그렇게 커다란 청동상이라면 녹여서 활용할 곳이 아주 많았을테니까요.  카톨릭 사제들을 박해했던 무신론자 혁명가들에게는 특히 리셜리외와 함께 카톨릭 국교 정책을 펼쳤던 루이 13세의 동상은 특히 꼴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이거 17세기 작품이 아니라 1825년 작품입니다.)



자, 원래의 주제였던 이 광장의 이름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이 광장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예 석판에 새겨진 설명문이 현장에 붙어 있더군요.  프랑스 대혁명은 기본적으로 파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무리 프랑스가 중앙집권형의 국가였다고 해도, 파리에서 평민들이 들고 일어나 만든 국민의회니 국민공회니 하는 것들이 파리를 제외한 각 지방 (departement)에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인 상황이었지요.  특히 제1차 대불동맹이 맺어지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과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혁명 정부는 발 등에 불이 붙은 셈이 되었습니다.  혁명 정부로서는 사람과 무기, 그리고 돈을 모아서 빨리 군대를 조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혁명 정부에게는 사람도, 무기도, 결정적으로 돈도 별로 없었지요.  세상에 어떤 사람도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군대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고요.




(노예로서의 삶을 끝내고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자는 호소에 응하는 자원병들)



이렇게 위기에 빠진 국민공회에게 프랑스 전국 각 지방 중에서 최초로 세금을 납부하고 자원병들을 보내온 지방이 바로 보쥬 지방이었습니다.  물론 국민공회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보쥬 지방이 선례를 보이자, 다른 지방들도 세금과 자원병을 보내오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지원에 힘입어 1792년 9월 20일 발미 (Valmy)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발미(Valmy)에서 생긴 일 http://blog.daum.net/nasica/6862441 참조)

파리의 혁명 정부에서는 보쥬 지방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광장에 보쥬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의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도 제1통령이 된 첫해인 1800년에 보쥬 지방에 대한 감사를 다시 한번 표시했지요.  그래서 이런 석판이 붙어 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사전 찾아가며 개발새발 번역을 해봤습니다.






POUR AVOIR ETE LE PREMIER DES DEPARTEMENTS FRANCAIS
POUR LE PAIEMENT DES CONTRIBUTIONS ET L'ENVOI
DE VOLONTAIRES A L'APPEL DE LA PATRIE EN DANGER
L'ASSEMBLEE LEGISLATIVE LE 11 AOÛT 1792
ET LA CONVENTION LE 27 MARS 1793 PROCLAMERENT
QUE LE DEPARTMENT DES VOSGES AVAIT BIEN MERITE DE LA PATRIE
LE 1ER CONSUL BONAPARTE DECIDA DE LE DONNER
EN EXEMPLE A LA NATION LE 21 SEPTEMBRE 1800
TOUTE LA FRANCE SALUAIT LES VOSGES AU SON DU CANON
ET CETTE PLACE DEVENAIT LA PLACE DES VOSGES

프랑스 지방 중에서 가장 먼저
위기에 빠진 조국의 호소에 응해
세금과 지원병을 보내준 것에 대해
1792년 8월 11일 입법의회와
1793년 3월 27일 국민공회는
보쥬 지방에게 조국의 감사를 드린다
제1통령 보나파르트는 1800년 9월 21일
국가적인 모범 사례를 지정하기로 결정하여
전 프랑스의 이름으로 보쥬에게 축포로 치하하며
이 광장을 보쥬 광장으로 명명한다
 
   






(빅토르 위고 기념관 내부에서부터, 계속 바깥 어딘가에서 큰 소리로 여자 성악가의 솔로 음악을 틀어놓은 것 같았어요.  밖에 나와보니, 음악을 틀어놓은 것이 아니라 남녀 한쌍이 즉석 공연을 하고 있더군요.  저 여자분 성량이 대단하던데요 ?  보쥬 광장을 둘러싼 저 건물들은 모두 전면에 아치로 천정이 된 복도가 있어서, 가끔 이런 거리 공연도 있나 보더군요.)




(알고 보면 스피커를 쓰긴 썼더군요.)



왕정 복고 이후에 이 광장의 이름은 당연히 다시 루아얄 광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 이후 들어선 제2 공화국이 이 광장의 이름을 다시 보쥬로 바꾸었습니다.  저도 이 광장의 이름은 보쥬가 더 어울리고, 그것이 프랑스에게나 전체 인류에게나 더 깊은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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