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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그대는 나폴레옹이 아니다 - 타보르 (Tabor) 산 전투

by nasica-old 201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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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까지는 아크레에서 나폴레옹이 포위전의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과정을 보셨습니다.  여기까지는 꽤 순조로왔는데, 사실 그렇게 순조롭다는 사실 자체가 좀 의아한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나폴레옹이 시리아로 원정을 오게 된 이유가, 약 4만의 대군이 이집트를 침공하기 위해 시리아에 집결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런 4만 대군에 대항하여 불과 1만3천의 프랑스군이 오히려 선빵을 날린다는 계획 자체가 약간 무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프랑스군이라고 뭐 기관총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아크레까지 올 때까지, 그 4만 대군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엘 아리쉬나 자파 등에 각각 수천명씩의 수비군이 있었을 뿐이고, 지금 아크레에서 농성하고 있는 것도 약 4천명 정도의 수비군 뿐이었지요.  다 합쳐봐도 약 1만 수천명에 불과했습니다.  대체 4만이라는 오스만군은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요 ?




(이것은 현대의 시리아 지도지요.  요즘 이 동네가 완전 막장이더군요.)



여기서, 먼저 시리아라는 동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당시 시리아라는 지명은 오늘날의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등을 모두 포함하는 명칭으로 쓰였습니다.  또 흔히 생각하는 사막이 아닌, 꽤 온화한 기후의 풍요로운 지방이었습니다.  이 지방을 대표하는 도시는 바로 다마섹 (Damasek), 흔히 로마식으로 다마스커스(Damascus)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다마스커스는 원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예수장이들을 잡으러 가다가 이곳에서 예수님의 레이저 광선을 맞고 눈이 멀고 나서 개종하여 사도 바울이 된 뒤, 결국 오늘날의 기독교의 토대를 닦게 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교 학자에 따라서는 기독교를 예수와 바울의 합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더군요.)




(세상에 저렇게 레이저 광선을 맞고도 개종을 하지 않는다면 정말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시리아의 주요 도시는 아크레같은 코딱지만한 요새 도시가 아니라, 다마스커스나 더 북쪽의 알레포(Aleppo)였습니다.  당연히 대규모 군대는 이곳에 집결하고 있었지요.  또, 나폴레옹이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크레나 자파같은 소도시가 아니라, 다마스커스나 알레포를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폴레옹은 다마스커스로 가지 않고 아크레에서 땅을 파고 있었을까요 ?




(전에 아크레에 제자르 파샤가 세운 모스크를 보여드렸습니다만, 이런 다마스커스의 모스크에 비하면 거긴 정말 촌동네라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일단, 아크레가 다마스커스나 알레포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아크레를 우회하여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집트와의 보급로 확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마당에, 아크레를 놔두고서는 더 이상 진격이 어려웠습니다.  또, 일단 아크레를 함락시키고 나면 일처리가 매우 쉬웠습니다.  일단 다마스커스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어서 군사적 가치는 별로 없었으므로, 아크레 다음의 군사적 목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알레포였는데, 사실 알레포가 다마스커스보다 오히려 더 큰 시리아 치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알레포는 해안에서 약 110km나 떨어진 내륙 도시였습니다.  즉, 영국 해군의 제해권과는 상관없이 공략이 가능한 곳이었지요.  그래서 제자르 파샤나 나폴레옹이나 아크레를 결전의 장소로 정하고 툭탁툭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도 시리아 최대 도시는 수도인 다마스커스가 아니라 알레포입니다.  사진은 알레포의 대 모스크)



하지만 분명히, 아크레의 수비 병력은 불과 4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아크레가 그 이상의 병력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은 도시여서 그런 측면도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느려빠진 오스만 투르크의 병력 동원 능력 때문인 것이 더 컸습니다.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에서 농성 준비를 하면서, 다마스커스와 알레포의 태수들에게 구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해놓았습니다.  그렇게 오스만 투르크의 정규 병력 뿐만 아니라, 인근 레바논 주민들의 지도자인 바시르 셰합 2세 (Bashir Chehab II)에게도 지원 요청을 보내놓았지요.  이 바시르에게는 나폴레옹도 연합하자고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바시르는 제자르와 나폴레옹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철저한 중립을 지켰지요.




(바시르 셰합 2세입니다. 이 양반이 나폴레옹에게 적극 협조했다면 어쩌면 지금 시리아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까요 ?  아무튼 이 양반은 결국 십수년 뒤에 이스탄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아무튼 4만이라고 하는 다마스커스 군은 실존하는 존재였습니다.  나폴레옹도 아크레를 포위하고 있는 내내 뒤통수가 계속 찜찜했습니다.  이렇게 참호를 파고 있다가 만약 4만의 병력이 정말 들이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폴레옹은 정말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 상황을 보면 나폴레옹은 그다지 자신감을 느낄 수가 없는 형편이었거든요.  애초에 1만3천이 시나이 반도를 건넜는데, 그중 1천은 전사 내지 병사했고, 1천은 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으며, 2천은 엘 아라쉬나 가자, 자파 등지에 수비 병력으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결국 아크레 앞에 진을 친 프랑스군은 9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4만은 고사하고 2만의 병력이라도 쳐들어오는 날에는 정말 계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더라도 아크레 포위진영에는 최소 5천은 남겨두어야 했으니, 그 수가 몇만일지 불확실한 다마스커스 군을 요격할 프랑스군 병력은 겨우 4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야전에서는 프랑스군이 여태까지 오스만군을 간단하게 발라버렸다고 하더라도, 4천대 4만은 너무 심한 비율이었지요.  4천대 2만이라고 해도 이건 좀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일단 적의 위치라도 확실히 찾아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꾸준히 병력을 파견하여 정찰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3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나자렛 (예, 예수님 고향 맞습니다) 근방을 수색 중이던 쥐노 (Junot) 장군이 약 3천명의 적 기병대와 맞닥뜨렸는데, 이들을 깔끔하게 분쇄하고 약 500~600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뿐만 아니라, 쥐노 장군을 지원하러 보병 1,500명을 끌고 나갔던 클레베르(Kleber) 장군도 4월 11일, 약 5천의 적군과 조우하여 이들을 쫓아버렸습니다.  이어 4월 15일 새벽에는 약 1천명의 보병을 이끌고 정찰을 수행하던 뮈라(Murat) 장군도 갈릴리 호수 북쪽에 약 5천의 적 기병대가 텐트를 치고 숙영 중인 것을 목격, 이들을 기습하여 패주시켜 버립니다.  이때 오스만 기병대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터라, 짐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도주했고, 그들의 짐을 약탈하던 프랑스군은 그 지방의 유명한 다마스커스제 과자류를 잔뜩 발견하고는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건 제 블로그에서 유일하게 저작권 시비가 없는 사진입니다.  제가 이번 두바이 출장 때 직접 찍은 것이거든요.  몰랐는데, 중동 지방의 레바논-시리아의 전통 과자류가 굉장히 유명하더군요.  저 사진 속의 물건은 너무 비싸서 - 약 5만원 - 못 샀고, 식당에서 한조각 먹어보았는데, 진짜 달고... 맛있던데요 !)



프랑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5대1, 심지어 10대1의 수적 열세 속에서 싸워도 거의 일방적인 승리만을 거두었으니, 적을 업신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정말 4만이 나타나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다 !' 

하지만 이들이 무찔렀던 것은 오스만 투르크의 정예병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대들이었습니다.  당시 아크레를 지키던 오스만군은 니잠 제디드 (nizam-i jedid)라고 하여, 유럽식 무장과 훈련을 받은 당시 오스만의 최정예병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쥐노나 뮈라가 무찔렀던 기병들은 제대로 된 오스만 정규군이 아니라, 오스만 태수들의 명령 반, 그리고 약탈물에 대한 욕심 반으로 몰려 나온 아랍인들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모아놓은 진짜 '다마스커스군'은 이때 이미 갈릴리 호수 서쪽 타보르(Tabor) 산 인근까지 접근해 있었습니다.  이 군대는 약 35,000으로서, 기병이 2만에 보병 1만5천 정도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오스만 정규군 외에도 이집트에서 도망쳐온 마멜룩 기병들과, 나블루스(Nablus)의 산악지대에서 약탈물을 노리고 내려온 산악민들, 기타 아랍 부족들이 1만 정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벌교 사람들이 주먹 세기로 유명한데, 이쪽 동네에서는 나블루스 사람들이 그쪽 방면에서 유명한가봐요 ?)



이들을 포착한 것은 클레베르 장군이 지휘하던 보병 1,5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Nazareth)에 있던 클레베르는 당시 무척이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습니다.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다마스커스군의 행방을 초조하게 탐색하던 나폴레옹은 뮈라나 쥐노, 클레베르 등에게 지나치게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면서 통제했고, 가뜩이나 나폴레옹이 못마땅하던 클레베르는 그런 상황이 너무나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4월 15일 밤에 드디어 다마스커스군의 본대의 위치를 파악한 클레베르는, '나폴레옹 너 따위의 지휘를 받지 않아도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상황을 간단히 알린 뒤, 나폴레옹의 새로운 지시가 오기 전에 서둘러 적의 대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다마스커스의 대군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적을 두고 계신 동네, 나자렛의 1840년대 모습입니다.  아, 예수님 본적은 베들레헴인가 ?)



다만, 자신감으로 충만한 클레베르의 생각에도 보병 1,500명만으로 기병과 보병의 혼성대군 4만을 정면으로 들이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해보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클레베르는 나름대로 현장의 지리를 이용한 기습 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즉, 타보르 산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다마스커스군에게 서쪽으로부터 최단거리로 직행하지 않고, 타보르 산을 북쪽으로 빙 돌아 동쪽에서 들이치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대략 새벽의 어둠을 타고 기습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강인하고 우직한 군인의 대명사 클레베르 장군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과는 사이가 별로...)



클레베르의 부대가 위치해있던 나자렛에서 타보르 산 남쪽의 다마스커스군 진지까지는 대략 12km 정도, 즉 3시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클레베르의 기발한 기습 작전대로 타보르 산을 빙 둘러 돌아가면 그 거리는 대략 18km, 즉 5시간 정도가 걸리게 되었지요.  클레베르는 대략 그 시간을 계산하여, 새벽 2시 정도에 다마스커스군 진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습니다. 






전에 '바클레르 달브 (Bacler d'Albe), 나폴레옹의 중추 신경'  편에서 다루었듯이, 나폴레옹은 지형지물 파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시리아의 상세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대략 개발새발 그린 지도라도 가지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클레베르 장군에게도 그런 지도가 있긴 있었을텐데, 글쎄요, 클레베르의 길잡이가 엉뚱한 수작을 부린 것인지, 또는 클레베르가 지도를 잘 안보는 스타일이었나 봅니다.  정작 행군을  해보니, 클레베르의 예상과는 다르게 행군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렸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행군한 프랑스군이 마침내 다마스커스군의 진지 뒤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는 커녕 아침 6시 정도였었고, 이미 훤히 동이 터 있었기 때문에 다마스커스군에서도 프랑스군의 접근을 목격하고 대응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리를 중요시하는 나폴레옹이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지요.

무척이나 뻘쯤해진 클레베르는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무려 2만의 기병을 거느린 적군에게서, 고작 1천5백의 보병들이 등을 보이고 달아난다면 그야말로 전멸당할 위험도 있었으니까요.  그는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2개의 작은 방진을 구성했습니다.  이 보병 방진이야말로 나폴레옹이 마멜룩 기병들로부터 이집트를 정복할 때 썼던, 궁극의 전술이었지요.  하지만 당시 피라미드 전투에서는 무려 2만의 프랑스 보병 방진 앞에 고작 6천의 마멜룩 기병들이 덤벼 들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고작 1천5백의 보병에 대해 무려 2만의 기병들이 덤벼들었으니까요.




(나폴레옹, 보고 있나 ?)



곧 전투가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피라미드 전투를 재현하는 듯 했습니다.  마멜룩 기병들이 상당수 포함된 다마스커스 기병대는 조그마한 프랑스 보병 방진 2개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감히 접근을 못했습니다.  머스켓 사정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제 사격이 날아와 기병들을 쓰러뜨렸으니까요.  하지만 기병들의 수자가 워낙 많다보니, 다마스커스군은 번갈아가며 휴식을 취하며 프랑스군을 견제할 수 있었고, 반면에 프랑스군은 밤샘 행군에 이어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밥은 커녕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방진 속에 서있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것은 갈증과 허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중동의 태양이 이들을 지글지글 볶아댔는데, 이 뙤약볕 속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서있자니 정말 괴로왔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자, 피라미드 전투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양측의 눈에 훤히 보였습니다.  몇시간 더 지나면 프랑스군의 방진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 뻔했지요.  게다가 더욱 안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기병들의 돌격 위협에 일제 사격으로 응사하다보니, 프랑스군은 탄약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클레베르는 거의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지금이라도 방진을 풀고 산쪽으로 후퇴를 감행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외계인은 사각형으로 싸운다 - 피라미드 전투 편에서 다루었던 크라수스의 패전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세요.)



그때 기적처럼 저 멀리서 번쩍이는 총검들이 프랑스 병사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병사들은 '꼬마 하사관이다 !  꼬마 하사관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 !'고 외치며 기운을 냈습니다.  정말로 나폴레옹이 구원차 달려왔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다마스커스군의 본진 위치를 발견했고 그를 공격하겠다는 클레베르의 보고서를 받자마자, 너무나 큰 병력 차이를 염려하여 즉각 지원 부대를 끌고 달려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력은 불과 2천5백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뮈라와 쥐노 등에게 상당한 규모의 정찰 병력을 내보낸 상황에서, 더 이상 아크레 포위군으로부터 병력을 차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1,500 vs 35,000의 싸움이 4,000 vs 35,000이 된다고 뭐 크게 달라질 것이 있었을까요 ?  그대로라면 없었겠지요.  나폴레옹도 멀리서 전투 상황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그렇게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리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겪은 바를 통해서, 오스만 군 중 상당수는 비정규 자원병이고, 이들은 분위기에 쉽게 좌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미리 수백명의 병력을 따로 우회시켜, 클레베르를 포위하느라 텅 빈 적의 본진에 불을 지르게 했습니다. 




(타보르 산의 전투.  이상하게도 승전 규모에 비해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별로 홍보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좀 수상한 면이 있어요.)



갑자기 후방에서 나타난 프랑스군 때문에 약간 어리둥절하던 다마스커스군은, 그 병력이 작은 것을 보고 다시 자신감을 얻으려 하던 찰라에, 본진에 불이 나며 소란이 벌어지자 광속으로 사기가 떨어져버렸습니다.  게다가 이에 합세한 클레베르가 방진을 풀고 돌격을 실시하자, 원래 제대로 훈련된 부대가 아니었던 다마스커스군은 쉽게 공포에 질렸고, 순식간에 군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글자 그대로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이름 시몬이었던 베드로를 낚은 곳이 바로 갈릴리 호수였지요 ?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시지요.)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프랑스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도주하는 적군을 쫓아 갈릴리 호수까지 갔으며, 여기서 많은 적군이 익사했고 프랑스군에게 척살당한 적군의 피로 호수가 붉게 물들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전에는 그토록 목이 말랐는데도, 호수로 도망치는 적군을 쫓아가 그동안 당했던 괴로움에 대한 보복을 하느라 아무도 물을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라고 썼더군요.  이건 좀 의아한 부분인데, 타보르 산 남쪽으로부터 갈릴리 호수까지는 무려 17~18km 정도 떨어진 거리로서, 아무리 속보로 뛰어간다고 해도 3시간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렇게 먼 거리까지 추격을 했다는 것도 의아하고, 또 그렇게 먼 거리를 추격하고도 목이 마르지 않았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또 다마스커스군도 굳이 호수 쪽으로 도주했다는 것도 좀 의아하고요.  어쩌면 이 타보르 산 전투는 타보르 산 남쪽이 아니라 동쪽, 그러니까 타보르 산과 갈릴리 호수 중간 지점에서 벌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전투에서 다마스커스군은 약 6천명의 전사를 냈는데,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공식 기록에 따르면 2명의 전사자와 60명의 부상자만을 냈다고 합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사상자 보고서는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되긴 합니다.
 




(아, 왜 오스만 병사들은 호수로 달려갔을까요 ?  설마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갈릴리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



아무튼 1799년 초에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좋든싫든 시리아 원정을 떠나게 만들었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다마스커스군은 이 한번의 전투로 어이없이 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클레베르가 다 말아먹을 뻔한 전투를, 나폴레옹이 매우 적절하고 과감한 상황 판단을 통해 환상적인 대승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로써 나폴레옹은 이미 이집트 방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지요.  하지만 내친 김에 콘스탄티노플, 그러니까 이스탄불까지 진격하겠다는 나폴레옹의 야망이 이 정도에 만족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1차 관문인 아크레의 포위 진지로 다시 돌아가 더욱 가열찬 공격을 퍼붓게 됩니다.

과연 아크레의 운명은 어찌 될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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