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경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분포)
오늘날의 그리스는 매우 작은 나라이지만, 고전 시대의 그리스는 지중해 세계에서 나름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로마 장군 루쿨루스가 기원전 1세기 경에 오늘날의 터키 지방인 소아시아에서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일 때, 미트리다테스는 그 지역의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그 전쟁을 로마와 그리스의 전쟁으로 선전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방의 그리스 인구가 상당한 규모였었다는 이야기지요. 또 로마가 진출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6세기에, 이미 그리스인들은 남부 프랑스에 식민도시 마살리아를 건설하고 그리스 문명(정확하게는 포도주와 그를 담는 토기인 암포라)를 그 지역에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고, 오늘날 우리가 마르세이유라고 부르는 도시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문명이 이런 술단지로 대표된다니 좀... 그렇군요.)
(마살리아에서 주조된 67그램짜리 은화. 앞면에는 아폴론 신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의 두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아마도 그의 태양 전차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퀴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아름다운 마르세이유 항구)
그리스의 고전 시대에, 오늘날 터키의 영토로 되어있는 소아시아 해안지역은 모두 그리스 식민도시로 뒤덮여있었고, 이탈리아 해안이나 시칠리아 섬은 그리스 본토나 거의 다름없을 정도로 많은 그리스의 식민도시가 존재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흑해 연안이나 프랑스 남부 해안,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등지에서 그리스 도시를 발견하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식민지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강력한 본국에서 군대와 행정관을 파견하여 현지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러나 그리스의 식민도시라는 개념은 그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식민도시라는 말을 뜻하는 헬라어인 apoikia 라는 말의 뜻은, '다른 곳의 고향'이라는 뜻 정도라고 합니다.
(이 아포이키아라는 단어는 해외로 이주한 현대 그리스인들도 즐겨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지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할만한 능력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 원주민들의 비위를 건드릴까 노심초사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원주민들은 다수이고, 그리스인들은 (적어도 식민도시 창건 초기에는) 소수였을테니까, 당연히 원주민들의 분노를 사서는 안되겠지요.
(크세노폰과 1만명의 그리스 용병들이 페르시아 제국 영내를 돌파해온 경로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가령 기원전 4세기 초, 크세노폰(Xenophon)이 기록한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페르시아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싸움에 패한 뒤, 페르시아군의 추격을 피해 흑해 해안 지방까지 먼 길을 뚫고 나온 그리스 용병 1만명이 흑해 연안의 그리스인 식민도시인 코티오라(Cotyora)에 도달합니다. 이 무일푼의 용병단은 본격적인 그리스라고 할 수 있는 비잔티움(Byzantium, 오늘날의 이스탄불)으로 가기를 원했는데, 육지와 바다 중 어느 길을 이용해서 가는 것이 좋겠냐고 현지 그리스인들에게 묻자, 그 대표가 이렇게 말합니다.
(크세노폰이 지은 Anabasis는 원정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 크세노폰은 마치 자기가 그리스 용병단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것처럼 써놓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니들이 육지로 가면 우리는 편하다. 그냥 저쪽길로 가라고 알려주고 여기서 니들과 작별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육지로 가자면 니들은 용맹하고 숫자도 많은 파플라고니아(Paphlangonia)인들과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고 길도 험하니까, 바닷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크게 인심써서 돈도 주고 배편도 마련해 줄테니까, 바닷길로 편하게 가라."
명백히, 그 현지 그리스인 대표는 이 무일푼의 떼강도같은 그리스 용병단을 아끼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 배고픈 그리스 용병단이 육지를 횡단하면서 벌일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원주민인 파플라고니아인들과 원한이 생겨, 자신들의 통상과 안전이 위협받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초창기에 그리스인들의 무력은 원주민들에 비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식민 활동은 현지 원주민들과 어느 정도 협력을 하지 않고서는 어려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저 위에 언급된 남부 프랑스의 마살리아의 경우입니다. 마살리아의 창건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도시인 포카에아(Phocaea)로부터 무역 기지를 세우기 위해 온 프로티스(Protis)라는 남자가 이 최적의 항구인 마살리아 터를 발견했는데, 때마침 현지 부족장 딸의 구혼자들이 몰려드는 잔치에 초대되었답니다. 그 잔치에서 족장 딸인 깁티스(Gyptis)가 프로티스를 남편으로 선택하면서 살림을 차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살리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지 부족들과의 평화적인 교류와 통상을 통한 공존 형태의 식민 활동은 후대까지 이어져, 페리클레스의 시대에도 마살리아는 밤에만 주변 갈리아족의 출입을 통제할 뿐, 낮에는 갈리아족들이 시내까지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로, 불안불안하게나마 주변 원주민들과 별탈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식민 도시가 주변 민족들과 항상 조화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인구가 적은 기원전 8~7세기라고 할지라도, 좋은 땅에는 이미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거든요.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족보도 알 수 없는 인간들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타나면 좋아할 리가 없었지요. 게다가 그리스인들은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자기들끼리도 툭하면 치고받고 전쟁을 벌였는데, 말도 잘 안 통하는 이민족하고야 오죽 했겠습니까 ? 여차하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리비아에는 카다피 말고도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대 키레네의 유적입니다.)
전쟁으로 건설된 대표적인 식민지는 바로 리비아의 키레네(Cyrene)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롬멜과 몽고메리가 전투를 벌였던 주무대인 리비아 지역을 흔히 키레나이카라고 불렀는데, 그건 바로 그 지역에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키레네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키레네는 기원전 7세기 경에 그리스의 섬인 테라(Thera)인들이 창건한 식민도시인데, 초기에는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아 고생을 하다가 어느 정도 좋은 땅에 자리를 잡자, 리비아인들이 몰려와 제발 다른 곳으로 떠나달라고 사정 및 협박을 하는 바람에,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하는 신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키레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땅을 나눠주겠다'라는 대대적인 캠페인 광고를 펼쳐, 그리스 본토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세력을 불린 뒤, 리비아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리비아인들이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이집트 왕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큰 전쟁이 붙었는데, 이때 밀집 보병 전술을 쓰는 그리스식 전투 방법을 처음 접한 이집트군이 대패하여, 키레네가 비로소 완전히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보면 대단할 것 없지만, 막상 처음 대하면 어찌 상대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밀집보병전법인 팔랑스(phalanx))
그런데, 왜 그리스인들은 저렇게 많은 식민도시들을 건설했을까요 ?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국이 좁고 가난하여, 늘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그리스는 대개 산악 지방인데다 강우량도 많지 않아서 (산토리니의 빛나는 태양이 꼭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농사가 그리 잘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북부의 유럽 내륙에서 내려온 전사들의 후예인 도리아인들답게, 그리스인들은 원래 바다에서 고기잡는 어부 노릇은 그리 자랑스러워 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인구가 늘어나면 굶어죽거나, 정처없는 이민을 떠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3일을 굶으면 담을 넘는 법인데, 하물며 바다야 못 건너겠습니까 ?
그렇다면 이 식민 원정단은 본국에서 어떤 지원을 받았을까요 ? 뭔가 지원을 받았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들 참여했겠지요 ? 어디로 가든지 그리스인들은 거의 언제나 배로 이동을 했으니까, 하다못해 타고 갈 배와 식량은 국가에서 제공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것을 마련할 돈이 있었을리 없었으니까요. 대개는 시민들 중에서 부유한 시민 몇몇을 설득하여 그런 식민도시 창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즉 돈을 대거나, 또는 아예 식민 활동에 직접 참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민도시 창건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자 투기였습니다. 운만 맞아준다면, 가난뱅이 신세에서 단번에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지주가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까딱 잘못하면 굶어죽거나, 현지 원주민들에게 맞아죽거나, 또는 폭풍을 만나 물고기 밥이 되는 경우도 있었을 테니까요. 가장 안 좋은 것은, 일단 원정선에 올라타면 그건 원-웨이-티켓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식민단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기존 모국의 시민권을 잃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되돌아와야 할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모국에서는 이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키레네(Cyrene)의 경우, 기근에 시달리던 테라시에서 원정단이 떠날 때 조건이, "절대 돌아오지 말라"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애초에 리비아 해안의 어떤 섬에 정착하여 몇년을 살았으나 영 살림살이가 나아지질 않자, 지친 원정단이 대표를 보내 '돌아가면 안될까요'하는 질문으로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는데, 돌아온 신탁은 '리비아 언저리에서 뭘 하는 거냐, 남자답게 리비아 본토에 상륙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떠나보낸 원정단이 거지떼가 되어 되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질겁을 한 테라 시민들이 뭔가 손을 써서 그런 신탁이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부분입니다.
식민도시 창건이 대개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식민도시는 본국과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이었습니다. 식민도시 입장에서도 본국에 대해 크게 빚진 것 없고, 본국에서도 원정 초기의 지원으로 셈 끝내고 이젠 남남이라는 식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헤어질 때의 사정이 키레네의 경우처럼 언제나 야박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식민도시는 모국의 언어(방언)와 종교(많고많은 신 중 특별히 모시는 신)를 그대로 고수했기 때문에, 모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생판 남인 도시들보다야 친하게 지냈겠지요. 나중에 식민도시가 외적으로부터 위협받는 상태가 되면, 본국에 구원 및 원조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저 4개 도시의 불화와 합종 연횡이 그리스 전체를 30년 전쟁으로 몰고가서 결국 그리스의 몰락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식민도시가 본국의 명령에 따른다던가, 특히나 세금을 바친다던가 하는 일은 분명히 없었습니다. 식민도시는 분명히 독립적인 정치 권력을 가졌고, 또 세월이 100년 200년 흐르면서, 모국과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코린트(Corinth)와 그 식민도시인 코르키라(Corcyra)와의 관계입니다. 이 두 도시는 무역상의 잇권을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결국 전쟁까지 벌이게 되는데, 식민도시인 코르키라가 보기 좋게 승리하게 됩니다. 자식뻘 되는 도시에게 체면을 구긴 코린트가 하도 분통이 터져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맏형인 스파르타에게 지원을 부탁하면서 생긴 길고 긴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위기를 느낀 코르키라는 도리아 계통인 자신들의 근본을 무시하고, 이오니아 계통인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식민도시가 항상 성공적으로 창건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대표적인 실패 사례 중 하나가 트리키스의 헤라클레아(Heraclea in Trichis)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도중에 스파르타의 주도 하에 그리스 북부 테살리 부근의 해안에 창건된 이 도시에는, 스파르타의 강력한 지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작전주에 개미주식꾼들이 뛰어들 듯이) 뛰어들었는데, 자기 땅 주변에 경쟁 정치 세력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테살리아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결국 이 식민도시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 외에도, 강력한 경쟁 세력이 있던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의 식민 활동은 크게 어려움을 겪었고 때로는 참담한 결말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가령 그리스인들의 '거의' 독무대였던 시칠리아 섬에는 나중에 카르타고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납니다. 주로 시칠리아 섬의 동부 해안에 몰려있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에게까지는 여파가 심하지 않았으나, 카르타고와 가까운 남서부 해안의 아그리겐툼(Agrigentum)같은 도시는 카르타고군에게 점령 및 약탈을 당해 도시가 몰락하는 비운을 겪습니다.
(붉은 글씨는 그리스 식민도시, 노란색은 페니키아, 즉 카르타고의 식민도시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아, 시칠리아에서 두 세력이 한판 붙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
그렇다면 어떤 곳이 식민도시 창건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일까요 ? 일단 적절한 항구를 끼고 있고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해양 민족이니까), 주변 토지가 비옥하며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사니까), 주변에 강대한 이민족 또는 기존 그리스인들이 없는 (사실 강대한 이민족보다는 강대한 기존 그리스인들이 더욱 무서운 존재입니다... 헤라클레이아의 최후를 볼 때 특히 그렇습니다) 곳이 제일 좋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장소라면 당연히 이미 다른 민족이나 다른 도시의 그리스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특히 입지가 좋으면 좋을 수록, 그런 곳에 자리를 잡은 민족은 이미 번창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만큼 점령하기도 어려웠겠지요.
(현대 한국에 태어났다면 군 지휘관보다는 기획 부동산 쪽으로 진출했을 것 같은, Anabasis의 저자 Xenophon)
하지만 그런 장소가 비교적 후대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리스의 고전 시대는 기원전 4세기로서, 그때만 하더라도 인구 70억인 지금에 비하면 정말 엄청나게 인구수가 적은 편이었거든요. 저 위에 언급했던 그리스 용병 1만명 중의 하나였던 크세노폰도 소아시아의 북부 흑해 연안에서 바로 그런 장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비잔티움과 헤라클레이아 (이 헤라클레이아는 앞서 언급했던, 테살리 지방의 헤라클레이아와는 다른, 이름만 같은 도시입니다) 사이에 있던 소아시아 북부 해안 지역이었습니다.
이 부근이 최적의 식민도시 입지라고 그가 판단한 것은, 그 곳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비잔티움과 헤라클레이아 사이의 거리는 3단 노선으로 (즉 꽤 빠른 속력으로) 하루가 걸리는 거리인데, 그 사이에는 이민족의 것이든 그리스 것이든 다른 도시가 없다
- 자연항구가 될 만한 포구가 있는데, 항구의 외부쪽 해안은 커다란 바위들로 되어 있어 상륙이 어렵고, 육지와 연결되는 부분은 좁은 지협(地峽) 형태로 되어 있어 육지로부터이건 바다로부터이건 외부 침략에 대해 방어가 쉽다
- 주변에 배를 만들만한 목재를 구할 수 있는 숲이 울창하다
- 주변 토지가 비옥하여 이미 트라키아인들의 촌락이 많고, 밀, 보리, 기장, 참깨, 포도 등의 작물이 풍부하다
주변에 이미 호전적인 트라키아인들이 많이 정착해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만, 크세노폰의 경우에는 당시 그리스에서는 엄청난 병력이었던 1만명의 군대가 있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이한 것 두가지는 조선용 목재 구하기가 쉽다는 것과, 포도가 많이 난다는 것을 조건으로 뽑았다는 것입니다. 한술 더떠, 크세노폰은 '다만 올리브는 나지 않는다'라고 아쉬워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가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근 농촌에서 포도와 올리브를 키워, 그것들을 포도주와 올리브유로 가공하여 배에 싣고 나가 밀, 보리 등 부족한 식량과 교환을 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이 영위하던 경제 생활 그대로였습니다.
이렇게 창건되어 자리를 잡은 식민도시의 주민들은, 자신의 도시에 거의 절대적인 충성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권'이라는 것은 요즘처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권리도 아니고, 시민권 없이는 제대로 된 자유인 노릇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애국 이외에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애정이 없었다면, 그리스 세계가 그렇게 팽창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특히 그리스의 모든 도시마다 예외없이 있었다는 두 시설, 즉 체육관과 극장을 아름답게 꾸미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시칠리아 섬에 남아 있는 그리스식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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