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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진정한 불꽃 남자, 조아생 뮈라

by nasica-old 2009.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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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에 나폴레옹 시대의 기병에 대해 2편 연속으로 글을 썼는데, 나폴레옹의 기병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요아킴 뮈라(Joachim Murat)입니다.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 뮈라처럼 독특한 인물도 없습니다.  우선,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서 왕이 된 사람은 베르나도트와 뮈라 뿐인데, 사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는 무관하게 스웨덴 왕이 된 것이니까, 나폴레옹이 직접 왕위에 앉혀준 사람은 뮈라 뿐입니다.  이렇게 뮈라가 왕위에 앉은 것은 사실 나폴레옹의 매제였다는 사실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는 했습니다만, 뮈라가 나폴레옹에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안겨준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뮈라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의 출세도 없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이후 권력층에게서 완전히 소외된 나폴레옹은 무척 궁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를 단번에 권력의 핵심으로 끌어올려준 것은 바로 방드미에르(Vendemiaire, 포도달) 13일의 친왕당파들의 반란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은 나폴레옹은 많은 수의 반란자들을 적은 수의 국민공회 군대로는 대적할 수 없다고 보고, 과감하게도 파리 시내에서 대포의 화력으로 반란자들을 진압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명을 받아 기병들을 이끌고 교외에 있던 대포들을 반란군보다 아슬아슬하게 먼저 손에 넣어 나폴레옹의 반란 진압을 성공하게 해준 장본인이 바로 요아킴 뮈라였습니다.  뮈라는 원래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20살의 나이에 기병대에 입대하여, 5년만에 장교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데모 진압에 대포를 쏴 ??  사실 방드미에르 사건은 데모가 아니라 반혁명 무장 봉기였습니다.) 

 

 

방드미에르 때의 인연으로 뮈라는 그 후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 참여하며 나폴레옹의 신뢰를 한몸에 받게 됩니다.  특히 브뤼메르 (Brumaire, 안개달) 19일의 쿠데타, 즉 나폴레옹이 총재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킨 사건에서 척탄병들을 지휘하여 500인 위원회를 끝장내는 공로를 세웁니다.  이러한 공로로, 뮈라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보나파르트와 결혼하여 나폴레옹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됩니다. 

 

 

 

(쿠데타를 진행하다가 500인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는 나폴레옹, 이때 나폴레옹을 호위한 저 두 척탄병은 조세핀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게 됩니다.) 

 

 

사실 캐롤린 보나파르트는 뮈라가 브뤼메르 쿠데타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해도 뮈라와 결혼했을 것 같습니다.  뮈라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장신의 곱슬머리 남자로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거든요.  원래 당시 기병대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그러자면 꼭 나오는 것이 잘생긴 기병 장교와 귀족 가문의 아름다운 처녀 아니겠습니까 ?  요아킴 뮈라는 캐롤린과의 결혼말고도, 당시 기병대의 전형적인 성격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돌적이고, 용감하고, 강인한데다 호탕하지만, 정작 당대의 군사 과학과는 동떨어진 면이 많았습니다.

 

 

 

(예나 전투에서의 뮈라.  - 1만명의 기병 선두에 서서 돌격해 보신 적 있어요 ?  없으면 말을 마세요 !) 

 

 

뮈라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이 뮈라에 대해 촌평을 내린 것을 몇개 모아보았습니다.

 

나폴레옹 :

나와 함께 하면, 그는 내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저쪽 방향에 있는 적군 4~5천명을 무찌르라고 명령하면 그는 번개처럼 달려가 적군을 짓밟았다. 하지만 그를 혼자 내버려두면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둔하게 행동했다.

 

제16 엽기병(Chasseur)의 어느 장교 :

그는 개인적으로 정말 용감했지만, 사실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다.  그는 적군 앞에서 기병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보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폰 루스(Von Roos) :

힘이 장사였고,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용감했고, 전투의 위험 한가운데서도 존경심이 들 정도로 침착했다.  우아한 군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적군인 코작 기병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에 대해 종합을 해보면, 용감하기 짝이 없지만, 장군감은 아니었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실 기병대의 지휘관은 치밀한 전략같은 것과는 거리가 좀 멀었습니다.  오로지 스피드가 생명인 기병대에서, 지휘관이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용기와 과감성이었거든요.  기병대 지휘관은 전투 상황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뮈라는 주로 나폴레옹의 기병대만을 지휘했고, 기병대 지휘관으로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성공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동프러시아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의 활약입니다.  1807년 2월 동프러시아의 매서운 추위 속에 베니히센 장군의 러시아군과 이제 막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를 마친 나폴레옹군이 맞부딪힌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 버립니다.  즉, 지도가 필요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던 폴란드와 동프러시아의 도로망 때문에, 나폴레옹은 특유의 기동성을 살리지 못하고 더군다나 병력을 분산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뚜렷한 열세를 보이면서 나폴레옹 자신이 포로가 될 뻔하기도 하는 위기 속에서, 다부 원수의 지친 병력이 엉금엉금 기어오는 동안 이제 남은 병력이라고는 기병대 밖에 없었던 나폴레옹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뮈라에게 돌격 명령을 내립니다. 

 

 

 

(아알라우에서의 프랑스 기병대)

 

 

이때 뮈라의 활약은 정말 눈부셨습니다.  그는 80여개의 편대를 둘로 나누어 적의 기병대를 공격하고 또 동프러시아 특유의 안개를 이용하여 적의 보병대를 그대로 관통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말을 돌려 재편성한 뒤 다시 적의 보병대를 관통하는 위력을 보여줍니다.  이 돌격에서 약 15%의 병력을 잃기는 하지만, 이때 뮈라의 활약이 있었기에 다부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나폴레옹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특히 적의 포병대를 제거하여, 아일라우 전투가 패배로 끝나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이때의 기병 돌격은 역대 나폴레옹 전쟁의 기병 돌격 중 최고의 돌격이라고 할만 했습니다.

 

또, 이때 뮈라가 지휘한 약 80여개의 기병 편대(약 11,000명)의 돌격은 단일 규모로는 당시까지 역대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이 돌격의 규모는 1위인 라이프치히 전투와 2위인 보로디노 전투에 이어 3위를 기록합니다.  우습게도, 혹은 필연적으로, 이 라이프치히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도 모두 뮈라가 지휘했습니다.  심지어 역대 4위 규모였던 드레스덴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조차도 뮈라가 지휘하는 등, 나폴레옹 전쟁 중 기병을 이야기할 때, 뮈라를 빼고는 이야기가 안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대장관이 역대 2위... 대체 역대 1위는 어땠다는 것인지) 

 

 

사실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뮈라의 천재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좀더 작은 규모였던, 1799년 아부키르 (Aboukir) 전투였습니다.  당시 이집트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이집트의 원주인인 투르크 제국은 영국 해군의 시드니 스미스 경의 군함에 2만명의 투르크 육군을 태워 아부키르 만에 상륙합니다.

이때 투르크 군의 지휘관은 세이드 무스타파 (Seid Mustafa)였는데, 이는 당시의 무능한 다른 투르크 지휘휘관과는 달리 러시아군과의 전투로 다져진,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보병대에게 기병 돌격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해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장기전을 펼칠 준비를 했습니다. 

 

 

 

(1799년 아부키르 전투 - 그림 가운데 저 환한 빛 속의 인물이 뮈라 아니고 또 누구겠습니까 ?)

 

이 방어선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 프랑스군은 투르크의 두번째 방어선을 뚫지못하고 일단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두번째 방어선을 뚫은 것이 바로 뮈라의 유명한 기병 돌격이었습니다.  그는 투르크 병사들이 방어선 밖에 나와 프랑스군의 부상자들을 살해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정말 전광석화처럼 기병들을 이끌고 몰아닥칩니다.  우왕좌왕하는 투르크 병사들을 따라 투르크 방어선 안쪽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한 뮈라는 그대로 무스타파의 천막까지 들이닥쳐 그를 사로잡습니다.  이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무스타파는 뮈라의 군도에 손가락 두개를 잘렸고, 무스타파가 쏜 권총에 뮈라는 턱에 부상을 입었는데, 뮈라는 "다행히 나의 (섹쉬한) 입술은 무사하다"고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가령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퇴하여 돌아올 때, 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대보다 먼저 귀국했던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후퇴의 총 지휘를 맡겼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본인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얼마나 달랐을지 의문이긴 합니다.)  당시 나폴리 왕이던 뮈라의 지위가 가장 높았고, 또 위기일 수록 친인척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뮈라의 지휘는 엉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나폴레옹은 뮈라의 총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에 대해서는 영 높은 점수를 주지는 않았거든요.  바클레르 달브 (Bacler d'Albe), 나폴레옹의 중추 신경  ( http://blog.daum.net/nasica/6862369 ) 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폴레옹은 전투 전에 지도를 자기 손바닥처럼 파악하는데 힘을 썼지만, '뮈라는 지도조차 없이 전쟁을 하려고 한다'며 툴툴거렸습니다.  또 뮈라 자신도 '내 작전 계획은 적군이 눈 앞에 있어야 만들어진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랑삼아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장교였던 나폴레옹과, 아무런 군사 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 출신의 여관집 아들과는 생각하는 바가 많이 틀렸나 봅니다.

 

 

 

(이렇게 잘생긴 내 얼굴에 두뇌까지 요구하다니 당치 않다 !!)

 

  

하지만 뮈라의 용감성은 정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작전 계획은 그저 과감한 돌격 뿐이었거든요.  그는 결코 위험 앞에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눈에 띄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적군의 대포와 소총, 창칼에 몸을 던졌습니다.  대개 당시 장교들이 자신의 용기를 나타내기 위해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경험은, 부상 외에, 자기가 탄 말이 적탄에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뮈라도 그런 경험을 가졌습니다.  1807년 하일스베르크(Heilsberg) 전투에서 그는 적의 포병대에 정면 돌격을 감행하다 적 대포의 산탄에 맞고 쓰러졌는데, 다행히 그의 말과 그의 한쪽 장화만 잃었을 뿐, 그는 무사했는데, 그러고도 그는 곧장 다른 말로 갈아타고 전투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뮈라의 말년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이 거의 확실해지자, 그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연합국 측에 붙습니다.  혹시 그렇게 하면 자신의 나폴리 왕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이 배신의 배경은 놀랍게도 (사실은 보나파르트 집안 꼬락서니를 보면 별로 놀랍지 않은데)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뮈라의 부인인 캐롤린 보나파르트의 꼬드김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의 지위와 부가 사실 오빠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대체 너란 여자는... 캐롤린 보나파르트) 

 

 

결국 뮈라는 연합군에게서도 버림받아, 원래 나폴리 왕국의 원주인이었던 부르봉 가문 출신의 페르디난드 4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납니다.  뒤늦게나마 뮈라는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을 찾아가지만 그의 배신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그를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건 나폴레옹으로서도 큰 손실이었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네이(Ney) 원수가 아닌 뮈라가 프랑스 기병대를 지휘했었다면, 전투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뮈라는, 일단 코르시카 섬으로 피신했다가, 칼리브리아(Calabira)에서 반란을 일으켜 다시 나폴리 왕국을 되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뮈라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칼에 불과했나봅니다.  반란은 실패하고, 그는 숙적 페르디난드 4세에게 잡혀 한낱 범죄자처럼 병사들에게 총살당하게 됩니다.  이때, 총살대의 장교는 그에게 눈가리개와 의자를 권하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난 하도 많이 죽음을 무릅써와서, 이젠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네."

 

그러고는 당당히 서서 아내의 모습이 새겨진 보석 장식에 키스를 한 뒤,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내 얼굴은 상하게 하지 마라 - 가슴을 겨냥해서 - 발사 !"

 

확실히 불꽃 남자다운 최후 아니겠습니까 ?  자신의 자칭 꽃미남 얼굴에 연연하는 것도 우습고요.

 

 

 

 

그의 시체는 그를 지독하게 증오했던 페르디난드 4세에 의해 중범죄자들의 시체를 버리는 구덩이에 버려졌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그의 현재 무덤은 파리 시내의 유명한 묘지인 페르 라셰즈 (Pere Lachaise) 묘지에 있습니다.  이 묘지에는 뮈라의 동료 원수들이었던 오쥬로나 맥도널드 뿐만 아니라, 비제, 발자크, 쇼팽 같은 유명인들이 함께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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