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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의 생활

by nasica-old 2008.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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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고 해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 생활은 힘든 것입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에 가기 싫어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초기에는 영지의 주민들을 징집해서 군대를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건전한 민간인들은 그냥 영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것을 깨닫고는 점차 용병들의 비율을 늘렸습니다.  그 결과, 초기에는 그렇게 강철같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도 후기에는 질이 많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아하는 군대에 가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의 부적응자나 범죄자, 굶어죽기 일보 직전인 가난뱅이 등등이었거든요.

 

조선 시대에도, 군대 가는 대신 무명포를 관가에 갖다바치고 군역을 면제받는, 군포제라는 제도가 있었지요.  그만큼 군대가는 것을 싫어들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지금 대한민국에서 부활시킨다고 해도 아주 인기있는 제도가 되었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시받고 혐오하던 병졸 생활보다도 더 심한 생활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군 생활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수군은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에, 죄수를 형벌로서 수군에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18~19세기 대영제국을 건설한 주역인 로열 네이비는 어땠을까요 ?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도 수병들의 상당수는 감방에서 썩던 죄수들이었습니다.   해군의 생활이 육군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는 것은 Sharpe 시리즈 중 "Sharpe's Regiment" 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신병으로 위장 입대한 하퍼가 훈련 캠프에서 문제를 일으키자, 연대 장교들이 하퍼를 살해할까 해군에 넘겨 수병을 만들까 하고 고민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입니다.  육군 병사에게 있어서 사형이나 해군 입대나 거의 비슷한 수준의 형벌이라는 이야기지요.

 

육군과 해군은 입대 과정부터가 틀렸습니다.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 종료시까지, 철저히 모병제였습니다.  즉, 평범한 서민 청년은, 자기가 원치 않는한, 군대에 갈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군은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자원하여 해군에 입대하는 사병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반 상선에 근무하던 선원들은 당연히, 규율이나 생활 조건, 무엇보다도 급여 조건이 훨씬 더 좋은 상선에서 근무하기를 원했습니다.  바다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시골 청년 중에, 멋도 모르고 지원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대부분의 수병들은 press gang이라고 하는 징병단에 의해 'press'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강제로 잡혀'갔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내내, 영국 해변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해군 장교 및 그 부하들로 이루어진 press gang들이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눈에 띄는 청장년을 닥치는대로 잡아갔습니다. 물론 최우선 타겟은 일반 선원들이었지만, 뱃일은 전혀 안해본 사람들이 잡혀가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오랜만에 귀항하여 선술집에 들렀던 뱃사람, 도시로 물건을 사러나왔던 잡역부, 그냥 빈들거리던 백수 등 어느 누구라도 정부에서 면제 대상으로 지정되지 않은 사람은 다 press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면제 대상으로 해준 사람들은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의 선원 등 소속이 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는 18세에서 55세 사이의 사람들만 press 대상이었지만 이는 거의 언제나 무시되었습니다.  즉, 소년이나 노인이나 닥치는대로 였습니다.  당연히, 이 press gang에 잡혀가는 친구나 친척, 가족을 구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press gang과 난투극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할당 법안(Quota Act)라는 것이 만들어져, 바닷가 지방에서는 일종의 징집 형태로 지방마다 할당된 인원수의 해군 지원병을 내놓아야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죄수들에게 '감옥이냐 해군이냐'를 선택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시 press gang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어이없는 것인가는 Aubrey 시리즈 중의 다음 한 장면을 보시면 실감나실 겁니다.

 

 

 

Post Captain by Patrick O'Brian  (배경 : 1804년 영국)-----------------

 

(잭 오브리 선장은 폴리크레스트 호의 출항 준비를 하며, 수병의 부족으로 고민을 합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부하인 풀링스 소위의 임관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됩니다.  이 축하잔치는 선창가의 한 여관을 빌려서 진행됩니다. - 역주)

 

젊은 풀링스 소위는 부두가에 자기 부모와, 그리고 자신의 연인인,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장한 소녀와 함께 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녀는 레이스가 달린 벙어리 장갑을 끼고, 엄청나게 큰 푸른 눈에 표정은 잔뜩 겁을 먹은, 분홍색 얼굴 빛에 작은 체구를 하고 있었다. 

 

'집에 데려가서 애완동물로 키우고 싶군.'  잭은 보호자적인 호의를 가지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풀링스 소위의 아버지는 뉴 포레스트 인근의 농부였는데, 잔치를 위해 통구이용 젖먹이 돼지 두마리와, 숲에서 사냥한 많은 숫자의 새고기, 그리고 전용의 탁자를 하나 둬야 할 정도로 커다란 파이를 가져왔다.  여관에서는 거북이 수프와 와인, 그리고 생선 요리를 제공했다.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은 폴리크레스트 호의 젊은 장교들과 보조 항법사들이었다.

 

 

...중략...

 

(원래 잭 오브리 함장은 빚으로 인해, 법정에서 체포 영장이 나와있었고, 집행관이 그를 체포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원래 절대 폴리크레스트 호 밖으로 나오지 않던 잭이, 항구의 여관에서 열리는 풀링스 소위 임관 축하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안 집행관이, 한 무리의 수행원들를 이끌고 그 여관을 습격합니다.  위기에 몰린 잭은 창가에 매달려 있다가, 소식을 듣고 몰려온 폴리크레스트 호의 수병들에 의해 구출되어 보트가 기다리는 부두가로 수병들과 함께 달립니다. - 역주 )

 

사태가 이렇게 되자 길거리의 수행원들은 한순간 멈칫했으나, 수석 집행관이 여관에서 수행원들을 이끌고 '법의 이름으로 !  법의 이름으로 !'를 외치며 튀어나오자, 다시 좁은 골목을 메우고 에워쌌다.  곧 골목길에는 세찬 주먹질 소리와 신음소리, 몽둥이끼리 부딪히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수병들은 잭을 가운데에 둘러싼 채, 바다 쪽 방향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법의 이름으로 !"  집행관이 다시 외치며 가로막는 수병들을 뚫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조타장인 본덴이 집행관의 멱살을 잡고, 그의 신분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빼앗았다.  본덴은 그것을 멀리 바닷물 속에 집어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집행관직을 방금 잃으셨네, 친구.  이제 자넬 패줄 수도 있어, 친구.  그러니까 조심하는게 좋아.  안그러면 질질 짜면서 집에 가게 될거야."

 

집행관은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단검을 꺼내들고는 잭을 향해 몸을 던졌다. 

 

"끈질기구만, 응 ?"  본덴은 그렇게 말하고는 몽둥이를 집행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는 진흙탕에 쓰러졌고, 연이어 여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풀링스 소위와 그의 친구들에게 짓밟혔다.  이 광경을 보고, 집행관의 부하들은 친구들과 야경꾼, 군대를 불러오겠다고 소리를 치며 우르르 도망쳐버렸다.  그들은 땅 위에 뻗은 두명의 동료를 남겨둔채 가버렸다.

 

"미스터 풀링스, 수고스럽겠지만 그 자들을 강제 징집(press) 해주겠나."  잭은 보트에 올라탄 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진흙탕 속의 친구도 징집하게.  두명 더 있다고 ?  아주 좋아.  모두 탔나 ?  군의관은 어디 있지 ?  군의관을 찾아보게.  아, 거기 있구만.  자, 밀어라.  모두, 힘껏 노를 저어라.  저 집행관은 틀림없이 아주 훌륭한 수병이 될 거야."  그는 나지막히 덧붙였다.  "우리 생활에 익숙해지면 말이지.  아주 완벽한 불독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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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렇게도 해군이 인기가 없었을까요 ?  간단합니다.  근무 조건이 너무나도 열악했거든요. 일단 군함이라는 특성상, 24시간 근무를 해야 했으므로, 교대 근무를 해야 했는데 그 교대 간격이 4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은 아무리 길게 자도 한번에 4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한번에 최소 3개월에서 보통 1년 가까이 했습니다.  휴가 ?  그런거 없었습니다.  제독들조차도, 심한 경우에는 3년씩 육지를 밟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수병들은 오죽했겠습니까 ?  보급, 수리 등을 위해 항구에 닿는 경우에도, 수병들이 상륙하도록 허락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상륙하는 즉시 탈주할 가능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범 수병들만 일부 선별적으로 항구에 상륙하도록 허가를 받았고, 대개의 수병들은 배에 갇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야간에 대포 포문을 통해 탈주할까봐, 항구에 들어오면 전체 포구를 모두 그물로 막아놓는 경우도 많을 정도였습니다.

 

음식도 형편없었습니다. 당시 선원의 전형적인 식사는 만든지 최소 6개월은 지난 건빵과, (소금에 절인지 역시 최소 몇달은 지난) 삶은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콩 삶은 것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육군과 마찬가지로 럼주, 정확하게는 럼주와 물을 섞은 그록(grog)이 매일 일정량 주어졌습니다.  럼주의 배급량은, 육군의 매일 1/3 파인트의 럼보다 조금 더 많은, 매일 1/2 파인트의 럼과 1갤런의 맥주였습니다.  특히 물의 배급이 제일 심각했습니다. 나무통에 장기간 저장되는 물은 쉽게 상해서 몇 개월 지나면 푸른색 부유물이 가득했는데, 이나마 무척 절제하여 배급이 되었고, 긴 항해의 막판에는 정량의 절반만 배급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당연히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이 창궐했습니다.  괴혈병의 증상은 전신의 무력감, 잇몸이 퉁퉁붓고 이빨이 빠지는 현상, 고약한 입냄새, 그리고 몇년전에 완치된 상처가 새롭게 덧나는 현상 등이 있는데, 결국은 다 죽었습니다.  이 치료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채소를 먹으면 금방 나았습니다.  당시 망망대해의 군함에서는 신선한 채소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다행히 긴 대양 항해의 경험상, 영국 선장이나 군의관들은 레몬 주스나 오렌지 주스를 매일 선원들에게 공급하면 괴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요법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들어서야 해군 전체에 시행되었습니다.

 

다음은 영국 해군의 규정상 식단입니다.

 

요일 건빵 (파운드) 맥주 (갤런) 쇠고기 (파운드) 돼지고기 (파운드) 완두 (파인트) 오트밀 (파인트) 설탕 (온스) 버터 (온스) 치즈 (온스)
1 1 - 1 0.5 - - - -
1 1 - - - 0.5 2 2 4
1 1 2 - - - - - -
1 1 - - 0.5 0.5 2 2 4
1 1 - 1 0.5 - - - -
1 1 - - 0.5 0.5 2 2 4
1 1 2 - - - - - -
총계 7 7 4 2 2 1.5 6 6 12

 

 

잠자리도 불편했습니다. 선원들은 갑판 아래의 탁트인 공간에 그물 침대(해먹)를 걸고 잠을 잤는데, 당연히 사생활이란 존재할 수가 없었고 (화장실도 갑판의 난간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공간이 충분치않아 많은 선원들이 좁은 공간에서 해먹을 걸어야 했습니다.  당시 어떤 무명 선원의 회고입니다.

 

"같은 하갑판에 500~600 명이 해먹을 걸고 잠을 잤다. 측면의 포문은 다 닫아두어야 했으므로, 환기도 안되었고, 천장 높이도 6피트에 불과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으므로, 그 열기는 끔찍했다."

 

겨울철에는 이 상황이 다행이었겠지만, 여름철, 특히 지중해나 인도양, 태평양에서 활약했던 많은 영국 군함에서는 그 생활 조건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목조 선박에는 화재의 위험으로 인해 난방이 금지되어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불을 피울 수 있는 곳은 주방이었는데, 그나마 폭풍이나 전투시에는, 난로가 뒤집어지면 화재가 발생할 수 있었으므로 그마저도 불을 꺼야 했습니다.  당시의 대포는 발사를 하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했는데, 해군에서는 이마저도 화재의 위험때문에 격발 장치를 부싯돌로 바꾸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격발 장치는 끈을 잡아당기면, 머스켓 소총처럼 스프링에 의해 부싯돌이 격발되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면 수병들의 성욕구는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남자들만 가득한 폐쇄공간에서는 수음도 흔했겠고 동성애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시 기록에 이런 것을 다룬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항구에 들를때마다, 선원의 부인이나, 또는 애인, 또는 창녀들이 '부인 면회'라는 명목으로 선장 허락하에 수백 명의 대규모로 배 위에 올랐습니다.  또 아예 항해 내내 하갑판 깊숙한 곳에 창녀들을 몇명 숨겨두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한 어떤 포병의 수기에도, 이런 여자들이 건네주는 포도주가 없었다면 그 전투의 피로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적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해군을 싫어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높은 사망률 때문이었습니다.  복무 중 사망률은 30명 중 1명 꼴이었는데, 이는 당시 포로로 잡힌 적병의 사망률인 55명 중 1명보다 2배 가량 높은 숫자였습니다. 당시 일반 사병에 대한 포로 대우가 별로 안좋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적군에 항복하는 것이 해군으로 복무하는 것보다 생존률이 높았다는 것이지요.

 

당시 영국해군의 제해권은 거의 완벽했고, 프랑스 함대는 항구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영국해군이 하는 일은 프랑스 항구 앞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초계임무 뿐이었습니다. 전투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망자는 많았습니다.  주로 질병(나쁜 식사가 주 원인이었겠지요)이 그 원인이었고, 폭풍 등의 자연 재해에 의한 사고사도 많았습니다.  전투로 인한 전사는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1810년 1년동안의 해군 사망자의 원인별 비율입니다.

 

사망원인 사망자수 %
질병 2592 50.0
안전사고 1630 31.5
난파, 폭발등 대형사고 530 10.2
전사 281 5.4
전투후 부상 악화 150 2.9
총계 5183 100

 

함장의 생활은 그 함장이 얼마나 부자인지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일단 함장은 전용 요리사와 하인을 대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식량은 자신의 돈으로 따로 구입하여 배에 실었습니다. 돈이 많은 함장은 군함의 장식 페인트칠과 선원들의 예식용 유니폼도 사비로 더 멋있게 꾸몄다고 합니다.

 

장교들도 자신들의 식량을 따로 단체 구매하였습니다. 장교들은 wardroom, 즉 장교 식당에서 따로 먹었는데, 선장과는 달리 개인 식사는 안되었으므로, 집이 부자인 장교라 할지라도 먹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장교들과 같은 것을 먹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함장이 될때까지는요.

 

영국 해군에서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채찍질 규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군함이라는 특성상, 규율은 육군보다도 더 엄격했습니다.  영국군함 위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전 수병들을 모아 놓고 함장이 군법을 읽어 주게 되어있었는데, 이는 당시의 높은 문맹률로 인해, '법을 몰랐다'라는 핑계를 대는 수병들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규정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shall suffer death" 즉 사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장교나 준사관을 때리면 무조건 사형이었습니다.  설사 장교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육군은 그냥 로프를 채찍으로 사용했는데 비해서, 해군은 아주 독특한 형태의 채찍을 썼습니다.  바로 'cat-o-nine-tails' 였습니다.  이건 그냥 당시 세가닥으로 된 굵은 로프를 풀어서 만들었습니다. 


 

 

 

이 채찍은 주로 갑판장이 붉은 자루 속에 넣어서 보관했는데, 씩 한주일 동안 뭔가 잘못을 저지른 수병을 기록해두었다가 매주 한번씩 공개적으로 이 cat-o-nine-tails로 채찍질을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것이 가죽으로 만든 채찍에 비해서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또 몇백대의 채찍질이 흔했던 육군과는 달리, 원칙적으로 몇십대 이상은 때리지 못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걸로 등판을 한차례 맞고 나면, 그 상처는 영구히 남았습니다. 

 

여기서 비롯된 영어 숙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cat has nine lives 《속담》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 고양이는 쉽게 죽지 않는다.

: 왜 하필 9개의 목숨인지 궁금하셨지요 ?  그냥 이 채찍의 꼬리 수였습니다.

 

let the cat out of the bag 《구어》 (무심코) 비밀을 누설하다.

: 신참 수병은 갑판장의 붉은 자루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했겠습니다만, 자루에서 이 cat이 나오는 날 곡소리가 났을 겁니다.

 

not be[or have enough] room to swing a cat 아주 옹색하다, 비좁다.

: 고양이를 휘둘러 ?  그 고양이가 바로 이 cat-o-nine-tails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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