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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머스켓 소총을 둘러싼 이야기

by nasica-old 2008.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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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머스켓 (musket) 소총이라고 하는 종류의 총은, 총열에 강선(rifle)이 없는, 활강 총신(smoothbore barrel)을 가진 소총을 뜻합니다.  초기에는 주로 불붙인 화승(slow match)을 이용하여 발사하는 점화 방식을 가졌는데, 이를 영어로는 matchlock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러서의 주된 점화 방식은 부싯돌을 이용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영어로는 flintlock이라고 불렀습니다.
 

18~19세기의 머스켓 소총과, 현대적인 자동/반자동 라이플 소총을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우스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래도 비교를 해보았을 때, 머스켓 소총의 단점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1. 발사 속도

2. 유효 사거리

3. 불발 확률

 

여기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발사 속도

 

요즘 개인용 자동 화기는 분당 몇십발 ~ 몇백발 쯤이야 우습게 쏘아댑니다만, 당시 머스켓 소총의 발사 속도는 분당 3발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고, 상당한 훈련을 거쳐야 그렇게 빨리 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물건과 비교하면 매우 곤란...) 

 

먼저, 탄약이 달랐습니다.  현대식 탄약처럼, 바닥에 뇌관이 붙어 있는 금속제 탄피와 일체형으로 된 총알이 아니라, 적정량의 화약을 기름종이로 싸고, 그 끝 부분에 둥근 공 모양의 총알을 말아둔 형태의 탄약을 사용했습니다.  병사들은 이런 탄약포(cartridge)를 일인당 60개 휴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전 방식은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왼손으로 머스켓총을 잡고 오른손으로 탄약통을 하나 꺼내 입으로 머스켓볼을 뜯어냅니다. (이때 당연히 총알은 입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화약도 조금 입에 들어가게 되는데, 결코 좋은 맛이 아니었고, 화약 속의 염분 때문에 병사들은 심한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19세기 중반의 세포이 반란의 원인도 이 탄약포의 사용 방법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새로 지급되기 시작한 탄약포에 힌두교에서 금기로 삼는 쇠기름과, 이슬람교에서 금기로 삼는 돼지기름을 섞어 발랐다는 이야기가 세포이 병사들 사이에 퍼졌거든요.)

2. 콕(격침, hammer)을 한단계 뒤로 당깁니다. 이를 half-cock 위치라고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방아쇠를 당겨도 콕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3. Frizzen(덮개 ? 야후 영어사전에는 안나오네요. 그림 참조)을 총구 방향, 그러니까 앞으로 밀어서, priming pan(뇌관실 정도로 번역하면 됩니다. 요즘 소총의 약실과는 다른 것이고, 요즘 소총에는 없는 장치입니다.  이 pan 밑부분에는 진짜 약실, 그러니까 화약이 장전되는 곳으로 통하는 좁은 구멍이 있습니다.)을 노출시킵니다.

 

 

 

4. 아까 총알을 뜯어낸 탄약통에서 화약을 약간 여기에 부어넣고, frizzen을 다시 뒤로 당겨 priming pan을 닫습니다.

5. 왼손으로 머스켓 소총의 총구 부분을 잡고, 개머리판을 땅으로 내려 세웁니다.

6. 탄약통의 화약을 모두 총구에 들이붓고, 빈 탄약통 껍질을 밀어넣습니다.  이건 화약을 틀어막는 마개(wadding) 역할을 합니다.  이어서 입에 물고 있던 총알을 총구에 뱉습니다. (종이 껍질을 총알을 넣은 뒤에 넣기도 한 모양입니다.)

7. 총신 아래에 끼워져 있는 밀대(ramrod)를 꺼내어, 총구에 끼워진 빈 탄약통 껍질과 총알을 총신 끝의 약실까지 밀어넣습니다. 꾹꾹 눌러두지 않으면 화약이 폭발할 때의 가스가 총알에 충분히 힘을 실어주지 못합니다.

8. 다시 밀대를 총신 아래의 홈에 끼워 넣습니다.

9. 머스켓 소총을 다시 들어올리고, 콕을 한단계 더 뒤로 당깁니다.  이것이 full-cock 위치이고, 이제 격발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10.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콕에 끼워진 부싯돌이 frizzen을 강하게 내리치면서 불꽃이 튀고, 이 불꽃이 priming pan에 담긴 약간의 화약을 점화합니다.  이 화염이 pan 밑부분의 좁은 구멍을 타고 약실에 번져서 약실의 화약을 폭발시키고 총알이 발사됩니다.  이때 pan의 불붙은 화약 중 일부는 튀어나와 사수의 뺨에 닿게 되어 따가움과 동시에 시커먼 검댕을 묻히게 되고, 또 총구에서 나오는 화약 연기는 사수의 시야를 거의 완벽하게 가려서 목표물에 명중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이 과정을 여러분은 1분간 몇번이나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  그것도 나를 향해 총을 쏘고있는 적에게서 겨우 30~40m 떨어진 곳에서, 뻣뻣하게 선 자세로, 바로 옆의 동료가 총을 맞고 쓰러지며 비명을 지르는 상태에서요.  당시 평균적으로 훈련된 병사라면 1분에 2발을 이런 식으로 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장전된 상태에서 쏘기 시작했다면 1분에 3발이겠지요.

 

영국군의 전통은 빠른 사격 속도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군이 분당 2~3발을 쏘았다면, 영국군은 분당 3~4발을 쏘았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즉, 영국군 200~300명이 프랑스군 300~400명의 화력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렇게 영국군의 사격 속도가 빠른 이유는 단 하나, 훈련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실탄으로 사격 연습을 하는 군대는 영국이 유일했습니다.  이건 당시 영국군이 바다를 제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무역으로 국가 재정이 튼튼했고, 또 물자도 풍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경우에는,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조차도 아끼기 위해서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놓고 사격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사격의 속도는, 분당 몇십발이냐 몇백발이냐를 다투는 현대적 자동화기 시대 뿐만 아니라, 머스켓 소총 시대에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적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입히느냐는 둘째치고라도, 적으로부터 쏟아지는 총탄의 양은, 당시 전투 제1의 요소, 즉 사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거든요. 

 

아까 당시 영국군 병사 1인당 60발의 탄약을 소지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이 탄약이 바닥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대개의 전투는 3~4발 쏘고는 돌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영국군처럼 방어 위주의 전투를 벌였던 경우에도, 탄약 소모량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813년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스페인 비토리아 시 근처에서 프랑스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는  매우 치열했던 전투로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많은 탄약이 발사되었는데도, 양군 병사들이 발사한 탄약의 1인당 평균을 내보면 약 28발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1분당 20발을 쏠 수 있는 엔필드 라이플 같은 볼트 액션식 소총이 나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병참장교는 예전에 비해 무려 6~7배의 탄약을 공급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게다가 개인용 자동화기가 나오면 정말...  2차대전 때의 전쟁 영화를 보면 총격전을 조금 벌이다가 곧 "Ammo !" 라며 탄약을 달라는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지요.  나폴레옹 전쟁 때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답니다.

 

 

(볼트 액션식 소총으로서, 거의 반자동 소총의 발사 속도를 냈다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주력 소총 엔필드 라이플)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대표적 서부 영화 중에, 'The Good, the Bad, the Ugly'라는 영화가 있지요.  아마 예전에 TV에서 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영화 배경은 남북 전쟁 때인데, 주인공들은 6연발 리볼버 권총에 윈체스터 라이플을 쓰는데, 정작 남북 양군 병사들은 위에서 제가 써놓은 것과 같은, 입으로 총알을 뜯어내야 하는 전장식 소총을 쓰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왜 군인들이 민간인들보다 훨씬 구식의 소총을 썼던 것일까요 ?  소총 가격 문제도 있고, 당시 후장식 소총 생산량 문제도 있었습니다만, 아주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탄약 소모량이었습니다.  즉, 전체 병사들에게 분당 10발 이상씩 쏘아댈 수 있는 후장식 소총을 지급할 경우, 그 탄약 공급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2. 유효 사거리

 

다만 이렇게 훈련을 중시한 영국군도, 사격의 명중률이나 정확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당시 머스켓 소총의 명중률은 너무 형편없었으므로, 오로지 근거리에서의 쾌속 사격만이 중요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머스켓 소총의 사정거리가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당시 머스켓 소총의 정확한 유효사거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측정된 적이 없나 봅니다.  다만 1814년, 영국군 대령인 Hanger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대략 80야드 (1 yard는 약 91cm), 즉 70m 정도를 유효사거리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군대있을 때 썼던 M16A1 소총의 경우 450m가 유효 사거리였습니다.

"머스켓 볼은 80야드 거리에서, 심지어 100야드 거리에서도 사람 모양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150야드 정도에서 발사된 머스켓 볼에 맞은 병사는 정말 억세게 운이 없는 병사라고 할 수 있다.  200야드에서 쏜다면... 그건 달에다가 대고 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병사들의 개인 화기가 고작 이런 정도의 유효 사거리와 발사 속도를 가졌다면, 그 부대 전술은 요즘과는 많이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먼저, 적의 사격으로부터 숨을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어집니다.  별로 맞을 확률이 없으니까요.  또 저의 총탄을 피하기 위해 엎드리거나 하면, 가뜩이나 느린 머스켓 소총 장전 속도가 더더욱 느려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집니다.  이 때문에, '워털루'나 '패트리어트' 같은 당시 전쟁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양쪽 병사들이 주욱 늘어서서 총알을 무릅쓰고 천천히 걸어서 전진하는 전법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쪽 군대가 접근해서 전투를 전개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결정 요소는 먼저 몇줄로 늘어서서 공격할 것인지였고, 그 다음에는 어느 거리까지 접근해서 발포를 할 것인지, 마지막으로는 다시 발포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총검 돌격으로 들어갈지였다고 합니다.

가장 골치아픈 것이 어느 거리까지 접근해서 발포를 할 것인지 였습니다.  고려할 사항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조금이라도 먼저 발포를 해서, 반격해올 적병의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여놓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러자면 먼거리에서라도 먼저 쏘는 것이 유리합니다.
2. 머스켓 소총의 사정거리가 사실상 70m를 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파괴력을 가진 일제 사격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쏘는 것이 유리합니다.  특히 당시 쓰이던 흑색 화약은 한번 발포하고 나면 총열 안에 많은 찌꺼기를 남기기 때문에, 쏘면 쏠 수록 재장전도 힘들어지고 명중률도 더 나빠집니다.

위와 같은 사항들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술이 많이 채택되었습니다.

1. 적이 사격을 하건 말건, 우리편이 총에 맞아 쓰러지건 말건 그냥 묵묵히 대오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전진합니다.  이때 대오를 칼같이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일단 대오가 흐트러지면 인간의 공포심 등으로 인해 대오를 재정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2. 약 60야드, 즉 55m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하면 일단 정지한 후, "Make ready !  Present !  Fire !"를 외칩니다.  즉, 일제 사격을 퍼붓습니다.
3. 그 다음에는 "Charge !"를 외칩니다.  즉, 총검 돌격을 실시합니다.  

즉, 대부분의 경우, 1발만을 발사하고 재장전없이 돌격하여 총검을 이용하여 끝장을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제사격을 하고 나면, 자욱한 화약연기로 인해 거의 연막탄을 터뜨린 상태가 되기 때문에 어차피 피아간에 조준 사격은 거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양쪽이 서로 멈춰서서 사격전을 벌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40야드, 즉 37m 정도의 거리에서는 머스켓 소총도 거의 빗나가는 경우가 없었고, 또 이럴 경우 적군이 재장전할 시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40야드까지 접근한 뒤에야 일제사격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이 대열의 병사들에게 외치는 소리는 어김없이 "Don't shoot high !" 였다고 합니다.  즉, 이때의 머스켓 소총의 반동은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저 정도의 거리에서는 상대방의 무릎을 겨누어야 상대방의 가슴에 맞을 확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 상태라는 것이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 (또 많은 경우 실탄 사격을 별로 해보지 않은 병사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무릎을 겨누라고 했는데도 상대방의 가슴을 겨누는 바람에 일제 사격이 적군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묵묵히 전진해오는 적군을 보고, 명령없이 발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유명한 구호 중의 하나는 "Wait until you see the whites of their eyes !" 였답니다.  즉, 적병의 눈흰자위가 보일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거리가 30야드인지 50야드인지 구별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다는 것을 보면, 아주 좋은 구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중률은 매우 낮았답니다.  나폴레옹군과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맞붙은 탈라베라 전투의 경우, 발사된 100발의 머스켓 볼 중 적에게 부상이라도 입힌 것은 겨우 3~4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또 위에서 언급했던 비토리아 전투에서는, 사용된 머스켓 볼은 3백6십만발이 넘었지만, 총탄에 의해 죽음이나 부상을 당한 전투원은 겨우 8000명으로서, 약 459발 당 1발이 명중을 한 것지요.   베트남전에서는 약 5만발 당 1명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때의 명중률이 높다고 해야 하나요 ?

 

 

 당시 사격이 얼마나 명중률이 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 전쟁을 벌이던 가리발디의 자원병들은 어느 도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골목길에서, 적군의 총탄이 그야말로 빗발치듯 쏟아졌기 때문에, 가리발디 군은 골목 속에서 꼼짝을 못하고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리발디 군의 부관 하나가, 적군의 사격은 정확성이 형편없으니 겁먹지 말라고 병사들을 격려하다가, 자기 말을 증명하기 위해 아예 골목길에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고 거기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 부관을 맞추는 총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가리발디 군은 용기를 얻고 돌격, 마침내 승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일화집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3. 불발탄

 

요즘 소총도 불발이 종종 일어납니다만, 당시 머스켓은 그렇게 간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불발 확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보통 9발을 쏘면 그 중 한발은 불발이었다고 하네요.  요즘 소총이야 탄약 자체가 불발탄이거나, 탄약이 약실에 잘못 들어갔거나 하는 경우에 불발이 발생하고, 또 그럴 경우 불발탄을 빼내기만 하면 쉽게 다시 발사가 가능했지만 이때의 머스켓 소총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즉, 불발탄을 빼내기 위한 방법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탄약포의 종이 껍질까지 이용해서 약실 깊숙히 꾹꾹 밀어넣었던 총알과 화약을 빼내려면 총구를 바닥에 대고 여러번 탁탁 내리쳐 빼내야 했습니다.  이는 시간도 많이 걸렸고,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대오를 엄격히 지키면서 전진하는, 야전에서의 전투 상황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통상적으로 머스켓 소총은 전투시에 9발 정도 쏘고 나면, 대오에서 이탈해서 불발탄을 처리하던가, 아니면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버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이렇게 불발이 된 머스켓 소총은 금방 교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사관이나 상등병들이 대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죽어넘어진 병사들의 머스켓을 주워 불발탄이 든 머스켓과 교체해 주었거든요.

불발탄이 발생하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1. 부싯돌 불량 (품질 좋은 부싯돌은 통상 30~50회 정도 격발이 가능했답니다.)
2. Priming pan에 넣은 화약의 불량  (약간의 습기만 있어도... 원래 부싯돌로 불붙이는게 꽤 어렵지요.)
3. 바람이나 격한 동작으로 priming pan에 넣었던 화약이 날라간 경우
4. hang-fire (priming pan의 화약이 느리게 타는 바람에 2~3초 후에 발사되는 현상.)
5. 사람의 실수 (총알을 먼저 넣고 화약을 넣는다든지 등등)

여러분 중에 부싯돌로 불붙여 보신 분 있으십니까 ?  일단 부싯돌이라는 것이 구하기 힘든 거라서, 아마 거의 없으실 겁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양질의 부싯돌은 프랑스의 Meusnes 지방에서 나왔습니다.  대혁명 이전에는 이 지방 주요 수출물은 핵심적인 군수품인 이 부싯돌이었다고 합니다.  또 부싯돌 깎는 기술도 핵심 군사 기술이었고, 프랑스 육군 포병대에서만도 이런 부싯돌공이 168명이나 있었답니다.

 

좋은 부싯돌이라도 몇번 반복해서 쓰다보면 그 다음부터는 잘 불꽃이 튀지도 않고, 또 공기 중의 습기에 따라서 불꽃이 잘 안튀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비오는 날이면 머스켓 소총은 거의 막대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비오는 날 아무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총이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퍼커션 캡 (percussion cap) 이라는 형태의 발화장치를 붙인 총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플린트락과 같습니다.  단, 플린트락은 공이치기에 부싯돌이 붙어있는 대신, 퍼커션 캡에는 작은, 평평한 모양의 쇠망치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뇌관 약실에는 일반 흑색 화약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뇌산염 같은 것이 밀봉되어있는, 얇은 구리판으로 된 원통 모양의 뇌관을 끼워넣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작은 망치 모양의 공이가 이 구리판을 세차게 때리고, 그러면 구리판 속의 화학약품이 폭발하면서 역시 좁은 구멍을 통해 주 약실의 흑색화약에 폭발을 일으키는 형태였습니다.

 

 

 

이 획기적인 발화방식은 어떤 영국인 목사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포사이스(Forsyth)라는 이름의 이 목사는 새 사냥을 즐겼던 모양인데, 별로 사냥감을 잡지 못했나 봅니다. 기존의 플린트락 사냥총을 쏘면, 먼저 뇌관약실의 화약이 폭발해야 했고, 이는 진짜 총알이 튀어나갈 때까지 약 0.5초 정도 새들에게 피할 수 있는 경고 시간을 준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냥 성적이 안좋았던 것이 그 때문만이었을까요 ?  솜씨나쁜 목수가 연장탓 한다던데... ㅎㅎㅎ)  아무튼 이 양반은 최초의 퍼커션 캡 방식의 소총을 특허 등록했습니다.  이때가 1807년인데, 정작 영국군이 이 방식을 Brown Bess 머스켓 소총에 적용한 것은 1842년으로서, 이때는 이미 포시스의 특허권이 만료된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이 퍼커션 캡이 좀더 발전한 형태가 바로 금속제 탄피에 이 금속제 뇌관을 붙인, 현재 우리가 쓰는 탄약입니다.  그런 것이 만들어진 것은 1850년대라고 하네요.  그러나 군대에서의 채택은 훨씬 느려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1860년대의 미국 남북전쟁 때에도 여전히 가루 화약을 총구로 집어넣는 전장식 소총이 보병들의 주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머스켓 오발 사례 중에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이 밀대(ramrod, 총알과 화약을 약실까지 밀어넣는데 쓰이는 금속 막대기.  평상시에는 총열 밑의 홈에 끼워둠)를 빼내는 것을 잊어버리고 발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전투가 한창이라서 정신없는 상황에서는, 특히 적이 이제 막 코앞까지 돌격해들어온 상황에서는 밀대를 빼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1808년에 발라돌리드에서, 프랑스군의 말러 장군은 화약만 있고 총알은 없는 공포탄으로 휘하 부대의 사격 연습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말러 장군의 실수는, '총알이 없다'라는 사실에 너무 안심하여, 사격하는 병사들의 앞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군은 다음 순간 자신을 향해 발사된 18개의 밀대 중 한개에 꿰임을 당합니다.  웃기는 것은, 비록 총알이 안들어있었지만, 많은 병사들은 바로 장군을 조준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비슷한 사례로, 1804년 롱혼에서 비슷한 공포탄 연습을 하던 제5 리뉴연대 병사 중 하나도, 밀대를 발사하여 구경하던 민간인 하나를 죽입니다. 그 오발 사고를 일으킨 병사에게는 다행히도, 그 구경꾼은 때마침 수배 중이던 흉악범이었다고 합니다만, 그 병사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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